캐스커 | 여정(旅程) | 파스텔뮤직, 2012

 

캐스커식 일렉트로팝의 꼼꼼한 여정

캐스커(Casker)의 스타일은 2집 [Skylab](2005) 이후로 어느 정도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웬만한 곡들은 “캐스커풍이군.” 하고 생각하게 하는 일관적 스타일이 강한 편이다. 이러한 ‘캐스커 월드’의 랜드마크를 꼽자면, 라틴 리듬이 가미된 라운지 계통의 스타일과 밝은 신스 사운드, 파스텔뮤직에 대해 흔히 떠올리는 상큼한 정서와 그리움이 담긴 듯한 우울함, 그리고 일종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을 멜로디 라인과 화성의 색채 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어느 정도 ‘캐스커풍’이라 할 수 있는 점들이 많다는 것인데, 이는 약점이 될 수도 강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4집 [Polyester Heart](2008)에서는 라틴풍 사운드나 펑키한 느낌을 강조했다면, 5집 [Tender](2010)에서는 조금 더 내추럴한 느낌이 두드러지는 식의 변주가 이뤄지고 있었다.

여섯 번째 앨범인 [여정(旅程)]에서는 “Intro”, “The Healing Song”, “Wonderful”, “Face You” 등이 이색적으로 눈에 띈다. 록적인 색채가 가미되거나 ‘댄스곡’의 전형을 따르는 등의 시도가 기존 캐스커 곡들보다 더 강한 팝송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특히 인트로 이후 댄서블한 트랙이 세 곡이나 연거푸 이어진다는 점은 기존 앨범과의 또 다른 차이라 할 만하다. 한편 뮤직비디오도 공개된 “Undo”는, 널리 알려진 캐스커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듯한, 살랑살랑한 곡이다. 다만 사운드적으로 다른 곡들에 비해 훨씬 내추럴한 방향이어서, 뒤를 잇는 곡 “잔상”과 함께 듣는 이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는 배치로도 읽힌다.

이러한 전제 하에 살펴보면, 신스의 사용은 팝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제는 신스를 사용하는 팝이라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테크닉들, 예컨대 글리치나 비트 리피터, 워블 사운드 등의 효과들이 이 앨범에선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트 크러셔는 자주 사용되고 있으나 파라메터를 천천히 움직여 필터 스윕 같은 효과를 내는 등, 유행과는 조금 거리를 두는 방식이다. 그 외에 신스 자체의 소리들도 이펙트의 흔적이 많이 느껴지지 않는 벌거벗은 사인파나 삼각파를 사용하기도 하고, 음정을 벗어나는 큰 폭의 디튠이나 글리산도, 아르페지에이터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앨범은, 오히려 웬만한 음반에선 당연하고 익숙하게 들리는 신스의 존재를 다시 한번 쿡 찍어 강조한다.

* 비트 리피터(beat repeater):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반복시키는 이펙트로, 흔히 ‘판이 튀는 듯한’ 효과를 낸다.
* 워블(wobble): 주로 베이스의 필터나 볼륨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여 울렁거리는 사운드. 덥스텝 계통의 음악에 많이 사용되면서 유행하게 되었다.
* 비트 크러셔(bit crusher): 소리를 더 낮은 사양으로 ‘다운 샘플링’하여 노이즈가 섞이게 하거나 파형을 왜곡하는 등의 이펙트. 찌그러지거나 금속적인 소리를 내곤 한다. 이 앨범의 “Wonderful”, “여전히”, “Blossom”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 필터 스윕(filter sweep): 소리의 특정한 대역을 걸러내는 필터를 이용하는 테크닉으로, 필터링되는 대역을 옮김에 따라 상승 혹은 하강하는 느낌을 준다. 댄스 음악에서 흔히 노이즈에 적용하여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사운드를 구현한다. “나쁘게”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 디튠(detune): 신스의 음정을 어긋나게 하는 일.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작은 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편지”, “Face You” 등에서는 좀 더 큰 폭으로 사용되어 음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 아르페지에이터(arpeggiator): 신스나 시퀀서에 종종 내장된 기능의 하나. 특정한 패턴의 아르페지오를 만들어주며, 손으로 연주한 아르페지오보다는 기계적인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한편, 시간의 축으로 보았을 때 앨범의 편곡은 다소 복잡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각 곡에서 사용되는 신스들은 비교적 긴 호흡으로 깔리며 반주로서 기능하기도 하지만, 필요한 순간에 한두 번 등장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혹은, 같은 악기지만 잠시 전혀 다른 소리로 변화하기도 한다. 특히 앨범 후반부의 트랙들이 그러한데, 루프의 반복과 각각의 시퀀스라는 단위를 살짝 벗어나 더 적극적인 표현을 노리고 있다. 신스도 연주자가 따로 있는 실제 악기처럼 다루는 인상이다. 듣는 이에 따라 이러한 특성은 사운드의 조합과 더불어 산만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어느 정도 취향이 작용하는 영역이라 생각된다.

전반적으로 앨범의 곳곳에선 밸런스를 위한 고심이 엿보인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기존 팬을 붙잡아 둔 채로 새로운 것을 해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일 수 있다. 또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팝’을 만들면서도 일렉트로닉으로서의 정체성을 살릴 것인가 하는 고민일 것이다. 캐스커의 팝적인 프로듀싱은 검증됐다 말하기도 구차하고, 융진의 보컬은 밝은 상냥함과 매끄러운 야비함을 오간다. 남은 돌파구는 사운드상의 연구와 다이내믹함의 보충이었을 것이다. 일렉트로닉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이 앨범은 그러한 맥락에서 더욱 가치 있다. 영어로 이어지던 앨범 제목이 1집 [철갑혹성](2003) 이후 처음으로 한국어로 돌아간 것도, 어쩌면 그와 같은 의도가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 미묘 tres.mimyo@gmail.com

rating: 8/10

 

수록곡
01. Intro
02. The Healing Song
03. 나쁘게
04. Wonderful
05. Undo
06. 잔상 (inst.)
07. 편지
08. P
09. 천 개의 태양
10. Face You
11. 여전히
12. Bloss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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