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년만에 찾아뵙는 에디터스 노트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마지막 에디터스 노트였던 0410호에서, 담당 에디터는 “엽기적인 살인사건과 싱숭생숭한 한국 정치계의 분위기, 늘어만 가는 카드 빚과 군대 문제, 성적 문제, 연애 문제와 같은 ‘서기 2002년의 우울'”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서기 2003년이 된 지금, 우습지도 않을 정도로 상황은 똑같습니다. 엽기적인 (유괴) 살인사건과 연쇄자살, 언제나 한심한 정치, 카드 빚 문제(그 무서운 ‘공익광고’, 다들 보셨는지요), 군대 문제, 성적(교육) 문제가 강도를 더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작년 소리바다 재판으로 시작된 음원 저작권 문제는 해를 넘겨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를 대상으로 제 2라운드에 돌입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젠 아주 가속을 밟아 ‘막 나가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중세사가인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는 중세인들이 언제나 ‘살갗이 벗겨진 사람들처럼’ 고통에 대해 민감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2003년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도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음악 따위나 들으면서 만화책을 뒤적이는 것이 사치스러움을 넘어 죄를 짓는 기분마저 든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정확히는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삶이 빠듯해질수록 ‘문화’를 향유하는 태도는 비난받곤 합니다. 최근의 문화 이론들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문화 자체가 생산의 영역이라는 반론을 펼치곤 하지만 문화 자체 속에 숨어 있는 ‘잉여’의 본성은 그러한 이론에 호락호락 응해주지 않습니다. 좋은 음악일수록 아마도 그 음악이 얽혀 있는 산업적 이해 관계가 계산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쾌락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돌이켜 보자면, 2003년 상반기 영미권 팝/록 음악계는 유난히 화제작이 많았고, 또 그 화제성에 값하는 내용의 음반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거물’들의 컴백도 성공적이었으며, 꾸준한 활동을 유지해온 중견 인디 뮤지션들과 신인 뮤지션들의 음반 중에도 주목할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다만 이 흐름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소위 ‘판’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몇 년 전부터 계속되어온 현상으로서,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신보가 어떤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이들은 ([weiv]의 거라지 록 두 번째 특집도, 이에 편승하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겠지요)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은 데 다소 실망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런 예측이긴 합니다만, ‘거라지’는 트렌드의 중심이라기보다는 ― 트립합이 그러했듯이 ― ‘보조적’ 기능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또 다른 ‘거라지’, 그러니까 미즈 다이너마이트나 디지 라스칼 같은 UK 거라지랩은 이제 막 ‘주류’로 향하는 본격적인 발걸음을 디뎠으니, 조금 더 지켜봐도 좋을 듯 합니다(조만간 UK 거라지 랩에 대한 간략한 특집이 있을 예정입니다. 또 다른 ‘비장의’ 특집도 있을 예정이오니, 많은 성원 부탁드리겠습니다).

0515의 첫머리는 몇 장의 신보 리뷰입니다. 국내 음반으로는 클럽 빵의 밴드들이 모여 낸 컴필레이션 음반 [Lone Star], 두 번째 음반을 준비중인 힙포켓의 미니 음반 [Idetity], ‘노숙한’ 신인 최현석의 포크 음반 [푸른별], 뜨거운 감자의 (의욕도 뜨거운) 두 번째 음반 [New Turn]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해외 신보로는 서정적인 리리시즘을 팝의 감수성에 무거운 듯 가벼운 듯 실어내는 퍼니스 브라더스의 [Yours, Mine & Ours], 톰 웨이츠와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축복을 받은 신세기의 ‘piano man’, 에드 하코트의 신보 [From Every Sphere]가 올라와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즐겁게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계속 약속을 ‘어겨’ 왔던 개편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뭘 그리 거창하게 하길래 이렇게 질질 끌고 있는가, 라는 질책도 종종 듣습니다만, [weiv]의 현재 처지를 고려해 주시는 분들께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이왕 기다리신 거, 조금만 더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혹시나 이 에디터스 노트가 또다시 해를 넘겨, 내년 이맘때쯤 다시 한 번 오래간만이라며 인사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지난 2003년의 에디터스 노트 필자는 한국이 상황이 이러이러하다 했습니다. 지금은 2004년입니다. 갈수록 나빠지는군요.”라고 말하게 되는 상황을 미리 상상하는 것이 기우일까요. 지금의 분위기는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지만, 여전히 언젠가의 어딘가에서 주크박스는 돌아갑니다. 그것만이 진실이라면,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닐지 모를 일입니다. 다시 찾아뵐 때까지, 평안하시길. | 글 최민우  200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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