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음악 비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악 비평의 표면적 정의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가치’는 비평이 현재 수행하는 역할을 통해 정립되고 부정되고 재정립될 때야 발생할 것이다. 이 기획의 발단은 바로 거기였다. ‘우리’는 이 일을 좋아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더 잘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바늘 같은 게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음악비평’가’는 비평의 위기나 역할을 거론하기에 앞서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고 부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비평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자 했다. 질문은 간단했다. “음악 비평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국내외 관계자 20여 명에게 메일을 보냈고 그 중 19명의 답변을 받았다. 글쓴이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원문은 최대한 수정하지 않았다. 다소 길겠지만 끝까지 읽어주시길. | 정리 차우진 nar75@naver.com 김인수 | 밴드 크라잉 넛 멤버 음악 비평의 출발. 음악을 훌륭하다 아니다 할 만한 평가의 기준은 대개 그 사람의 주관이나 기호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음악에 대한 느낌을 다른 이에게 완벽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그래서 어떤 음반을 사거나 새로운 음악을 들을 때 그에 대한 평가를 참고하게 되는데, 그때 비평과 음악을 동시에 접한 내 느낌은 다르기 마련이다. 60년대를, 90년대를 빛낸 명반 몇 선, 무슨 장르의 100대 명반 같은 선정들도 대부분 기호나 주관이 더 큰 작용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물론 듣는 사람에게 감흥을 주지 않는 음악이 그 리스트에 선택될 리도 없겠지만. 어쨌든 ‘이 훌륭한 음악을 많은 이들에게 소개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진 비평가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명감에도 결국 개인의 주관과 기호는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음악의 기준은 모호한 것이다. 그 미의 기준은 객관적 잣대가 아니라 애인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딱히 뭐라고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는 마음. 음악 비평도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모임 별 | 아티스트 거짓 또는 잘못된 정보를 유통시키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목인 |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음악 비평에게, 우선 주위에서 들은 바를 대신 전한다면, 1) 비평이 대중의 눈치를 본다는 것. 대중의 반응을 본 뒤 뒤늦게 리뷰를 쓴다는 느낌. 2) 비평이 새로운 흐름을 앞서 읽어내질 못하거나 애써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 3) 비평이 음악을 별로 많이 안 듣는 것 같다는 것.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 체감들이 있다는 것 뿐. 이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것들을 전한다면, 1) ‘최초’ ‘적어도 없었다’ ‘미덕’ ‘진정성’ ‘일상’ 같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수사를 너무 남발한다는 느낌. 2) 비평이 무의식중에 음악 씬을 위에 서서 개개 음악가들이 열심히 언덕을 오르고 있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느낌. 씬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 대부분이 음악을 ‘하러’ 이 씬에 왔지, 씬의 ‘성장’에 기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인디 음악에 대한 비평에는 항상 이 ‘성장’의 관점이, 하나의 소우주인 작품에 대한 이야기보다 앞선다는 느낌. 3) 때로 관심 없거나 취향에 안 맞는 음악에까지 몸소 펜을 들어 무성의한 악평을 단다는 느낌. 4) 어떤 음악에는 비평조차 없다는 것. 나는 음악이 그렇듯 비평 역시 계속 변화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올바른 비평의 기준이 뭐니 얘기하기보다 그냥 소박하게 음악 비평과 음악을 서로 대화 상대로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좋은 대화라면 성의가 바탕이 된 대화일 것이다. 음악이 더듬더듬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는데, 말의 서투름만 공격한다든가, 들은 체 만 체 한다거나, 음악의 욕구는 이미 다른 곳에 있고 변하고 있는데 동떨어진 기준만을 읊조리는 것도 성의 있는 대화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지한 비평이라면 퀄리티, 작품성 이런 기준을 넘어 ‘인생’이라는 넓은 지평까지 염두에 두고, 음악과 함께 나눌 대화가 어때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로 당신의 대화상대가 그런 고민까지 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흐른 | 대중음악가, 싱어송라이터 대중음악은 복잡한 텍스트고 비평의 관점은 다양할 수 있다. 미학적인 관점, 가사에 치중하는 관점, 음악 산업 관계에 주목하는 관점, 대중문화 텍스트로 접근하는 관점도 다 좋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음악적인 접근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게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데도. 음악을 하는 입장에서 나는, 사운드 자체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비평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 비평이 화성학에 기반 할 필요는 없다. 곡 구조나 편곡, 레코딩, 믹싱, 사운드의 질감 및 효과, 발성, 그리고 연주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얘기를 할 공간이 있느냐는 거다. 가뜩이나 음악 용어 자체도 낯선 마당에 영화잡지의 앨범 리뷰에 사운드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을 거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대중음악 비평의 주된 활동무대(?)가 대중 잡지나 웹진이다 보니, 또 그래서 저널리즘 글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비평가들 스스로도 사운드에 대한 고민은 살짝 옆으로 제쳐놓은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잠시 개인적인 투정을 좀 해 보자면, 내가 주구장창 들은 얘기는 ‘여성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영국에 갔다 온 경험’에 대한 얘기였다. 나는 내 음악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듣고, 또 더 많이 하고 싶다. 음악을 (영화나 시나 미술이 아닌) 음악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좀 더 많이 들리고 보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평가들이 각계격파하며 노력하는 건 알지만 좀 더 분발해줬으면 한다. 대중음악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거기서 정보도 공유하고 의견도 주고받고 논쟁도 하고 때때로 힘들어서 못해먹겠다는 신세한탄도 하고. 어쨌든 우리는 대중음악 판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이 판이 잘 되려면, 비평가의 말이 뮤지션에게 중요한 질문으로 다가와야 한다. 생산적인 피드백도 있어야 된다. 뮤지션과 비평가가 음악적 결과물에 대해 토론할 수 있고, 그 토론이 더 좋은 노래, 더 좋은 앨범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뮤지션에게 비평이 그저, 별점 몇 개 줬는지 확인하고 치워버리는 글일 뿐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안정일 | 프로덕션 루바토 대표, 음악산업 연구 몽상가 음악 산업에서 비평의 존재는 먹기도 거북하고 버리기도 아까운 ‘계륵’과도 같다.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몇 백배 많은 창작자들이 다양한 작품들을 토해내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 뿐 아니라 음악의 사회적 가치도 달라진 시대. 비평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도 달라졌음이 분명하다. 함께 고민할 문제라 생각한다. 비평은 작품의 아름다움과 추함의 미학적 가치를 논하며, 예술적 발전을 위한 사고를 확대시키는 긍정과 부정의 반복된 과정일 것이다. 심지어 한국의 음악 산업이 정량적인 성장에 치닫는 시절엔 평론이 사회학적, 역사적 가치에 집중되던 때도 있었다. 요즘 비평들을 마주하는 공간은 청자들에게 음악을 추천해주는 기능의, 어떤 식으로든 대중적이거나 권력화된 매체들이다. 순위를 매기거나 다른 작품과 상대적 비교를 덧붙이거나, 혹은 그것이 주가 되어버린 ‘예능적인 구조’ 위에 있는 것이다. 비평가의 미학적, 사회학적, 역사적, 음악학적 식견을 통한 분석은 교차되기 어렵고 리스너로서의 어눌한 인상의 서정성, 언어 사용의 유려함, 사운드의 독창성에 대한 찬사만 남는다. 비평이 존재하는 위치가 오히려 비평을 규정하는 룰의 한계다. 한편 요즘의 비평에서 자주 마주하는 고약한 버릇들도 있다. 창작자의 의도를 면밀하게 읽어보지 않고 음반 전체의 통일적 질감, 기획 등을 기준으로 한 비판이 서슴없다. 개인적으로 그 칼날의 반대편에 뭔가 숨겨진 것이 있는 지 살펴보며 강하게 부정하고 싶어지는 지점이다. 심지어 음악적 발견이나 가치 평가는 빈약하고(음악 용어의 사용을 지칭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음악이란 문법을 잘 모르는 것 같기는 하다), 특정 장르의 호흡으로 평가하거나 역으로 장르의 보호벽을 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작품에 대한 명백한 칭찬도 어색하게 들리는 경우도 많다. ‘제일가는’, ‘성장하는’, ‘흔치 않은’이란 표현을 과감하게도 남용한다. 또 산업 종사자들이 영민하지 못한 관계로 음악 산업의 여러 담론을 제기하고, 이슈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비평가인 경우가 많았다. 어떤 가치의 분석적 기재로 범주가 사용되었는데, 이후에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그 ‘범주’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사용된다. 서로 다른 얼굴을 지닌 유령이 큰 영향을 미치고, 존재하지도 않는 또는 왜곡되어 스스로 규정하기 모호한 말들을 계속 생산해내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애초의 의도와 효율성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책임감 없이 왜곡된 범주들의 남용은 애석하게도 비평가로부터 공급되고 비평으로 확산된다. 본인의 한계이든, 그 글이 담기게 되는 매체의 문제이든 결국 결과로 남겨지는 것은 비평가의 취향이나 미학적 판단 기준과 완성도다. 이것이 과연 좋은 음악을 판단하는 잣대로 소비자에게 전달되고 있을까? 혹은 창작자들이 더 좋은 작품을 만들게 돕는 약이 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오히려 어떤 음악을 소개하기 위한 그럴듯한 문학적 카피만 남은 게 아닐까? 오늘의 음악 비평이 더 좋은 음악을 만들게 하고, 무심코 지나친 미학적 가치를 찾게 하는 곳에 서 있는지 의심스럽다. 발전이 없는, 비루한 길로 향하지 않기를 바란다. 박다함 | 노이즈 뮤지션, 자립음악생산조합 운영위원, pdh_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생각이 복잡해서 어떤 글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핫뮤직을 읽으면서 자라왔던 세대여서 음악 평론이나 소개글을 종이 매체로 접하면서 자라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PC통신과 인터넷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것 같습니다. 확실히 종이 매체로 접하던 시절에는 확고하게 비평가가 있었고, 그걸 접하는 사람들만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인터넷이 그걸 많이 사라지게 해준 것 같습니다. 위키피디아가 생기면서는 궁금했던 부분들도 많이 해결이 되었지요. 위에까지는 어떤 환경이었는지 이야기 하는거였고, 아마 이야기는 제가 지켜봤고 보고 있는 인디 음악/웹진으로 풀 수 있을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볼께요. 2009년 즈음, 아마츄어증폭기의 [수성랜드]가 발매되었을때 한 평론가의 SNS에서 여러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아마 한국대중음악상 혹은 올해의 앨범을 이야기하던 중에 “왜 이 앨범이 언급이 되지 않았냐”라는 이야기가 “비평가의 역할이 무엇이냐, 어떤 음악을 듣는거냐, 비평가끼리만 듣는 앨범이 있냐” 같은 이야기로 번졌던 것 같습니다. 논쟁 아닌 논쟁이 일주일 가까이 지속되는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대놓고 말하자면, 음악 웹진에 실리는 글들을 보면서 친구들과 웃거나 한 적도 많았습니다. 누군가는 “내 앨범이 그 웹진에 실리는 걸 결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엔 음악 비평이 철학 비평이나 말도 안되는 소설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수용자에서 창작가로 입장이 바뀐 사람으로서 복잡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2장의 앨범을 기획하고 발매하면서 앨범을 평가받고 싶은데, 혹은 앨범에 대한 리뷰를 보고 싶은데 어디에서 가능할까, 싶은 마음입니다. (사실 모르겠습니다) (알게 모르게) 일종의 불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평론가들만 듣는 앨범이 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떤 앨범들만 주목이 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비야냥 거립니다.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 아니냐. 나오는 앨범의 수는 많은데 리뷰는 고정된 것 같습니다. 그 사이 포털 사이트의 음악 코너들이 늘어났습니다. (여전히 의문스럽습니다.) 어제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이 있었지요. 수상하신 분들께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수상되지 않은 앨범들, 더 많은 음악들을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많은 팬들의 자발적인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만 계속 맨 땅에 헤딩하는 구조가 아닌, 상호 바라보는 구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김민규 | 일렉트릭 뮤즈 대표 메일을 받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음악 비평’이라기보다는 ‘음악 관련 모든 담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우선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어 담론의 질에 대한 언급은 될 수 없는 상황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근거에 대한 고민’과 ‘근거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 ‘질’에 대한 언급은 부질없다는 판단에서였죠. 짧은 글에 모든 걸 말할 순 없으니 ‘근거지’에 대한 이야기만 집중하겠습니다. 음악관련 담론의 근거지는 몇 가지 방향 – 잡지, 웹진, 팬덤, 커뮤니티 등등 – 에서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건 궁극적으로 당시의 어느 씬에 종속될 겁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에서 담론을 생성하고 있는 근거지는 의미있게 존재하는 걸까 싶습니다. 또한 음반의 리뷰가 음악잡지(웹진)가 아닌 포털 사이트, 또는 패션지에서 더 많이 생산되고 있는 건 음악 관련 담론을 ‘직업’으로 생산하고 있는 이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씬의 음악을 음악가와 레이블이 팬들과 관계하며 책임지는 것처럼, 담론의 근거지를 만들고 그를 통해 씬, 팬덤과 교류하는 건 음악 관련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의 몫입니다. 여기에 자본(화폐)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건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근거지’없는 음악 담론의 시간이 10년이 넘어가는 것 자체가, 지금 음악 담론의 수준과 상황을 쉽게 설명해준다고 봅니다. 음악 활동을 10년 이상 현역으로 이어가고 있는 아티스트, 15년차가 되어가는 레이블 등이 존재하는 이 씬에 그러한 시간을 담지하는 음악 담론의 근거지가 없다는 건, 음악비평과 담론을 언급하기조차 우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조직 만들어 연말에 시상하고 원고료 포털 사이트에서 받으며 기생하는 그런 것 말고, 음악 판에 필요한 건 끈기를 토대로 형성되는 ‘근거지’일 것입니다. 송재경 | 밴드 9와 숫자들 리더, 튠테이블 무브먼트 대표 음악 비평에 대한 견해, 사실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굳이 따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이미 뜻이 정해진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다. · 비평(批評) [비ː평] [명사] 1.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 2.남의 잘못을 드러내어 이러쿵저러쿵 좋지 아니하게 말하여 퍼뜨림. 다원주의가 보편화된 시대, 개개인의 취향이 존중 받고, 매체의 진화, 또는 번식으로 그 표현에는 더 이상 장벽도 제약도 없다. ([GMV], [Hot Music], [Sub]로 갈증을 풀고 부클릿에 빼곡히 적힌 음반평을 정독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비평과, 이를 업으로 삼는 평론가는 유효한가? 대답은 Yes or No다. 사물(여기서는 음악)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지식과 통찰력을 갖춘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신뢰하고 존중할 것이다. 그가 권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가치를 찾으려 노력할 것이고, 내 창작에 대한 그의 충고를 진지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 비평이라면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백 번 유효하지 않을까. 물론, 논할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김예원 | 밴드 리딤 멤버, [싸이월드 뮤직] 기획자 내 경우엔 음악 비평에 대해 항상 양면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먼저 뮤지션 입장에서는 ‘비평은 어쩔 수 없이 아티스트와는 상당히 괴리되어 있는 게 아닐까?’ 라고 느끼게 된다. 심지어 평론가들로부터 칭찬받는 몇몇 선배들조차도 “제대로 내 음악을 알고, 이해한 상태에서 글을 쓰는 평론가들은 거의 없었다. 실제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그러니 비평엔 별로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 얘기에 충분히 공감한다. 별 생각 없이 만든 가사나 멜로디에 너무 과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아티스트의 영향이 엿보인다는 리뷰나 칼럼을 보고 좋아할 뮤지션/팬은 별로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비평이 쓸모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음악이든 칼럼이든 리뷰든 자신의 글을 컨텐츠 취급하는 게 싫은 이들에겐 미안하게도, 서비스를 만드는 입장에서 훌륭한 음악 비평은 분명 컨텐츠로서 의미가 있다. 좋은 음악 비평은 서비스 트래픽이나 사용자의 평균 체류시간을 높이는 컨텐츠로 기능하고 있으며, 리스너들이 그 비평을 얼마나 신뢰하냐에 따라 서비스에 권위(혹은 충성도)가 부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 비평은, 음악의 본질 혹은 아티스트의 의도와 무관한 어떤 것일지라도, 음악 산업을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된다. 한편 비평가들이 아티스트 혹은 일부 리스너들의 적의에 굳이 위축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세계니까. 결국 잘 쓰면 된다는 얘기다. 조은영 | [Daum뮤직] 기획 난 음악 잡지를 읽던 세대도 아니고 소위 ‘음악 마니아’도 아니었기에, 음악 비평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음악 서비스 기획을 하면서 처음 음악 비평을 접했을 땐 공부하는 느낌도 들었고, 어쩐지 똑똑해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꼭 이렇게 어렵게 써야 하나 싶어 비평가분들께 글이 너무 길고 어렵다는 불평도 많이 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전문가의 권위는 약해지고,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도 있는 시대다. 더군다나 무슨 글이든 제목만 읽고 댓글을 다는 사용자가 대부분인 포털 사이트에서 길고 진지한 음악비평을 누가 읽으려고 할까? 그럼에도 음악 비평을 고정적으로 [Daum뮤직]에 소개하게 된 것은, 이런 때일수록 음악에 대한 길고 진지한 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쉽게 접하지 못했거나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몰랐을 뿐, 분명 이런 글을 읽고 싶거나, 심지어 좋아하는 이들이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게 가벼워지는 시대라고 해서 비평이 사라져버린다면 그 또한 끔찍할 것이다. 그래서 난 비평가들이 네티즌들의 악플이나 무플에 신경 쓰지 않길 바라고, 또한 인기에 영합한 글을 쓰지 않길 바란다. 그런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음악을 듣는 게 직업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기 위해, 시대에 발맞추고 읽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도 필요하다고 본다. 아무리 훌륭한 글이라도 읽지 않고 외면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하나, 새롭고 다양한 음악을 소개해주는 역할에도 충실하면 좋겠다. 비평가들이 추천한 음반들을 의심 반 기대 반 접했다가 ‘완전 소중’해진 경험도 많으니까. 단, 비평가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다 비슷하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으니 각자가 다양하게 추천해주길 바란다. 조영철 | 로엔 엔터테인먼트 제작이사 음악 비평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진 못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음악 비평이 음악을 듣는 많은 대중들과 좀 더 호흡할 수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비평을 통해서 대중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완성도 있는 음반을 칭찬하고 소개하는 기능도 중요하지만, 대중적으로 관심받는 음반에 대한 적극적인 피드백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컨텐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또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우수한 음반에 대해 칭찬함으로써 대중들과 소통하고 주류적인 대중음악의 발전 방향도 도모하는 효과를 가져올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음악 비평이, 물론 음악적 성취에 대한 부분들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음악 산업적인 지형과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고민하면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서용훈 | a.k.a. 서교수(음악 블로그 [New Classik]), 로엔 엔터테인먼트 A&R 비평을 가장한 대중가요 분석 글을 2년 정도 썼고, 그 계기로 현재는 창작 집단에 몸을 담은 지 넉 달 정도가 된 이상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의 시선과 듣고 평가하는 사람의 시선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걸 몸소 실감 중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기존 음악 평론의 가장 큰 문제는 대중음악을 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작 대중의 수요와는 유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창작과 감상의 패러다임은 많은 부분 변화하고 있다. 음악이 탄생하는 근원이 아티스트 개인의 경험에서 분업화된 집단의 기획력으로, 노랫말의 역할이 내러티브 전달에서 스타일의 표출로, 비평의 논점이 개인적 성찰과 감상에서 분석과 분해를 기본으로 하는 지적인 탐구로. 그 와중에도 좋은 음악들은 계속해서 등장 중이고, 따라서 새로운 세대의 음악 비평은 새로운 형태의 창작자들에게서 진정성을 발견하고자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비평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댄디즘적인 시각보다는 진주를 발견하기 위해 진흙탕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김주미 | a.k.a. 노랑트위티, 사운드홀릭 레이블 디렉터 예전의 나는 음악평론이 어려웠다. 그 악기는 어떤 이펙터를 거쳐 어떤 소리로 나오는지, 보컬의 발성과 음역대는 어떤 것이며 이 음악의 출현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분석적인 전문 용어가 혹독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게 되었을 때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앨범과 공연 등을 편하게 소개하는 글을 썼다. ‘초등학생도 쉽게 다가 갈 수 있는 글’이 모토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비평가가 가져야 할 객관성과 냉철함, 거기에 부과되는 독자들의 야유와 독설이 두려웠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지금 나는 그런 시간을 지나 막 비행 준비를 마친 아티스트를 넓은 세상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 음악 비평을 보자면, 비평가 마음대로 폄훼할 수 있는 음악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글을 다 쓴 다음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까고 보는’ 관점이 섹시하게 보일 리 없지 않을까. 가뜩이나 블로그의 글이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윤호준 | a.k.a. 호떡바보, [음악취향 Y] 필자, [주머니 속의 대중음악] 저자 좋은 음악을 소개해주거나 아니면 반대로 나쁜 음악(음악 자체로든 또는 사회/문화적으로든)을 지적해주는 일 말고도, 대중음악 비평으로 할 수 있는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나는 왜 만날 이러고만 있는가, 이 더러운 기분이 소맷자락의 땟자국처럼 항상 따라다녔다. 근데 뭐,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밖으로 일을 벌리기 보다는 안으로 일을 벌이고픈 생각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발언이 음악의 영역 밖으로 확대되길 바라는 것보다 음악의 영역 안쪽을 찌르는 게 더 쉽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바깥쪽으로 뭘 할 수 있는지는 이제는 잘 모르겠고, 안쪽으로 하는 일은, 어느 비평가든 마찬가지겠지만 모종의 스릴을 안겨준다. 다른 비평가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 짚어내지 못한 것, 짚어내지 않는 것, 심지어 쉬쉬하는 것들을 긁어내고 싶은 욕구가 나에겐 항상 있다. 다만, 실제로 얼마만큼 그렇게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련다. 대중음악 비평가의 역할, 의무, 한계를 따져보는 일보다 그냥 리뷰를 쓰는 게 취미가 돼버린(이게 직업이 되거나 작업이 되는 걸 나는 이제 별로 바라지 않는다)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음악을 다 듣고, 음악을 들으면서 만들어진 생각들을 글로 옮겨 적는 것이 리뷰라는 기존의 통념도 이제는 별로 없다. 리뷰든 칼럼이든 거기에 들어가 있는 사고는 음악을 들었을 때 생기는 게 아니라 그냥 글을 쓰고 있는 그 순간에 생긴다. 그 사실이 재미있어 지금도 간간이 쓰고 있는 거다. 내 글을 존중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객관적 해석이라 인식해주는 몇몇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으면서. 맹선호 | 공연기획자, 매거진 [엘리펀트 슈] 기자, 논문을 마치지 못해 슬픈 뮤직 비즈니스 대학원생 음악 하는 친구는 요즘 밴드들이 음악을 너무 안 듣는다고 했고, 다른 친구는 창작을 한다고 꼭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하는 건 아니랬다. 음악을 만들지 않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음악 비평을 하려면 그 누구보다 많이, 또 부지런히 들어야 하는 건 알겠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음악을 들을 것이라고도 믿는다. 게으른 천성에 음악 찾아 듣기가 만만찮은 내겐, 그래서 음악평론은 알고 싶은 음악에 대해 ‘이 노래 좋닼ㅋ’ 혹은 ‘이 앨범 그지같엌ㅋ’ 따위의 저렴한 감상을 넘어 그 음악과 밴드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다. 물론’‘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란 생각이 들만큼 어려운 글도 있지만, 가끔 나보다도 내 취향을 더 잘 아는 것 같은 글을 보거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글을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이런 나로서는 그저 고맙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김영혁 | 음악 칼럼리스트 ‘음악 평론가’라는 직함을 당당히 쓰고 있는 한 블로거의 글을 우연히 읽었을 때, 사실 한국의 음악 평론이 겪고 있는 문제가 고스란히 그 안에 담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보고 피식하며 웃거나 좀 더 심각한 표정으로 화를 냈겠지만, 어쩌면 클리셰로 가득 찬 그의 문구들은 기존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써놓은 리뷰나 앨범 속지에서 ‘좋지 않은 부분’만을 고스란히 답습한 결과가 아닐까란 생각으로 이어진다. 우선은 음악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분석의 대상이 되는 음악에 대한 얘기는 절대적으로 적고, 그 음악을 둘러싼 주변의 얘기들로 맴돌다가 다소 애매한 결론을 내리거나 결론을 유보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는 것. 그러면서 불필요한 외국어를 남발하고, 적절한 형용사 몇 마디로 사운드 전체를 묘사하는 형태의 글. 아마도 그는 그것을 평론이라 믿었을 것이고 그래서 평론가라는 직함을 자신 있게 붙이고 다닐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론은 단지 원고를 쓰기 위해 존재하거나 평론가라는 직업군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음악을 사랑하게 하는 방법에 대한 길잡이를 해주려면 적어도 형용사 사용법 외에도 더 많은 공부와 경험이 필요하다. 사실 어떤 관점의 문제보다 우리 음악계, 우리네 음악 시장에 시급한 것은 이런 것이다. 음악에 충실한 글을 쓰면서 언젠가 스스로 잃어버린 신뢰나 권위를 되찾을 수 있는 평론가들이 몇 정도는 더 있어야겠다는 것. 한 때 한국 음악 평론의 결어로 자주 등장하던 말을 잠시 인용하자면 이 역시 ‘두고 볼 일’이리라. 류형규 | 음악 데이터베이스 [maniadb.com] 운영 비평의 사전적 의미를 따지자면,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미추, 선악, 장단, 시비, 우열 등을 평가하여 논함(출처:다음 국어사전)”이지만, 개인적으로 비평은 좀 더 광의로 해석되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수많은 음악 중에 내가 어떤 것을 소비해야할지를 알려주는 미디어의 역할 2) 특정 음악을 잘 소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가이드의 역할. 데이터베이스는 해당 음악에 대한 상세한 사실 정보를 제공하고, 비평은 그것을 소화하기 위한 가이드를 제공하는 상호 보완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며, 그것을 손쉽게 소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상업서비스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아가 시장에서의 역할 관계를 보자면, 1) 생산자가 음악을 생산하고 해당 음악에 대한 사실 정보를 제공하면, 2) 데이터베이스 구축자는 그 사실 정보를 잘 정돈하여 기존의 음악과의 사실 관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해당 음악의 검색을 용이하게 해야 할 것이고, 3) 비평가는 해당 음악을 잘 소비할 수 있도록 미디어와 가이드의 역할을 제시해주며, 4) 상업서비스는 해당 음악을 판매하고 생산자로부터 분배 정산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양질의 음악의 재생산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2)와 3)에 대한 중요성이 조금 간과되고, 1)에서 바로 4)로 넘어가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박정용 | cafe VELOSO, Studio Lovo([네이버 뮤직 온스테이지] 기획제작) 대표 음악 평론의 위기는 창작자와 소비자들이 갖는 평론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평론의 운명이니까요. 오히려 평론’가’의 부재가 위기라면 위기의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취향의 차이를 떠나 수긍하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평론’가’의 부재 말이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결국 성실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 평론은 죽었다는 신생 음악잡지의 선언도, 음악가들과의 유별난 친분이나 상당수의 트위터 팔로워 숫자도, 정작 시효를 다했다고 무시당하는 앨범 리뷰 하나를 대신하진 못합니다(앨범 리뷰나 열심히 쓰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10년 이상 한 장르 혹은 한 음악가에 대해 집중해온 평론가를 찾기 어렵다는 점. 예를 들어 관련 도서만으로도 수백 권이 넘는 밥 딜런 만큼은 아니라도, 우리에게 제대로 된 조용필 평론서 한권 없다는 건, 시장의 규모를 떠나 한국 음악 평론의 현재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방식의 소통이나 남다른 기획보다 중요한건 결국 ‘기본’입니다. 창작의 고통이 음악가의 몫이라면 성실함이라는 짐은 평론가의 몫입니다. 열심히 찾고 꼼꼼히 듣고 꾸준히 쓰는 것.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바로 여기가 시작일 겁니다. Anna | a.k.a. helikoppter, Indieful ROK 사이트 운영자 일반적인 음악비평에 대해 청취자(listener)의 입장에서 엄밀히 말한다면, 음악이 다양해질 수록 음악을 고르는 방법을 찾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는 것입니다. 음악비평은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 보고 지나칠 지도 모를 앨범을 조명해줄 수 있습니다. 이점이 중요하며 어쩌면 비평에 부여된 모든 의미(site) 중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 타이틀을 리뷰하여 많은 구매와 청취(traffic)를 이끌거나, 덜 유명한 타이틀을 리뷰하여 관심을 증가시키는 것이지요. 또한, 호소력 있는(engaging) 리뷰는 독자가 어떤 앨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첫인상을 재고해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그 리뷰의 비평가를 신뢰하고 그 리뷰가 유용하다는 평가를 내린다면, 이전에 그 앨범을 듣고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다시 한 번 들어볼 수 있고 그 결과로 그게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앨범을 좋아하는/하게 된 독자들에게는 필력있는 비평가가 그 음악의 뉘앙스와 여러 부분들에 관한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역할이 없다면, 독자들은 그 음악의 평범한 청취자로 남을 것이고, 다른 음악을 계속 찾아다닐 것입니다. 리뷰 사이트가 어떤 음악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의 리뷰(positive review)만을 제공하는 것이 완벽하게 바람직하겠으나, 음악 청취자들에게는 부정적인 관점의 리뷰(negative review) 또한 유용한 정보를 줍니다. 어느 음악을 들을지 선택지가 너무 많은 때에는, 듣지 않을 음악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 위의 내용이 질문에 적절한 답변이기를 바랍니다. [weiv] 리뷰의 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해외의 독자로서, 어쩌면 별점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말씀을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점수를 주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점을 알고 있고, 저 스스로도 비평가로서 점수 매기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리뷰의 독자로서 ([weiv]의 경우 언어 이해의 문제 때문에) 글 전체를 읽을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때에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Best Regards, Anna ———원 문——— Regarding music criticism in general, writing strictly from a listener’s perspective: The more music there is, the more important it is to find a way to navigate. When it comes to music reviews it is obvious that it can be used to highlight albums that would otherwise have gone overlooked by most. I think this is important and perhaps should even be the primary focus of any site dedicated to reviews–review big titles to drive traffic, review small names to increase the interest in music. An engaging review may also convince the reader to re-evaluate his or her initial impression on an album. If the readers trusts the reviewer and the reader expresses a positive opinion, even if the reader had previously dismissed the album he or she may well give it another listen and with that find another favorite. Even to the already convinced, an eloquent reviewer may serve to enlighten readers about nuances and movements of music otherwise lost on the casual listener, prompting further exploration. Although it’s perfectly acceptable for a review site to feature only positive reviews, to the music listener a negative review is just as informative. When there is already too much to chose from a pointer as to what is best avoided may sometimes be even more valuable than the opposite. — I hope the above is along the lines of what you were asking for! Perhaps I should add that as an occasional international reader that cannot get into the actual text of the reviews on weiv I appreciate the ratings in stars. I know many reviewers disapprove of giving a review scores and I could never do it myself as a review writer, but as a review reader I find it very efficient for times when there’s not enough time (or in this case knowledge of language) to read the full review. Best Regards, Anna 관련글 [special] 아오, 이 음악 비~평_1 | 비평은 늘 실패할 것이다 [special] 아오, 이 음악 비~평_2 | 한국 대중음악 비평의 역사와 과제 [special] 아오, 이 음악 비~평_3 | 음악 비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Responses dreamer05 2012.03.07 재미있는 이야기. 그나저나 weiv가 개편으로 확실히 예뻐졌다. 이제 방문할 맛이 난다. 굿! 응답 weiv 2012.03.08 꾸준히 쓰겠습니다. 😀 응답 Iamloserbaby 2012.03.17 아티스트 집단의 자기방어가 실로 역겨울 정도… 저런 인간들이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음악이 듣기 싫어진다 응답 Woohooo 2012.03.27 다 읽었다! a.k.a < 이런 외국에서 쓰는 수식 좀 안쓰면 안되나? 필명 닉네임 등등 한국어로도 찾으면 표현 방법이 있을텐데 굳이 as known as? why? 근데 웨이브 개편돼서 볼만해졋다 예전에 진짜 이상했는데 만세 응답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
Woohooo 2012.03.27 다 읽었다! a.k.a < 이런 외국에서 쓰는 수식 좀 안쓰면 안되나? 필명 닉네임 등등 한국어로도 찾으면 표현 방법이 있을텐데 굳이 as known as? why? 근데 웨이브 개편돼서 볼만해졋다 예전에 진짜 이상했는데 만세 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