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 대중음악 비평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

보통 1990년대 중반에 본격화되었다고 보는 한국 대중음악 비평의 형성 과정과 맥락에 대해, 학계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는지 궁금했을 법 하다. 물론 그런 연구 자체가 드문데, 다음은 거의 불모지에 가까운 이 분야의 연구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두완의 글이다.  | 정리 차우진 nar75@naver.com

 

얼마 전 [한국 대중음악 평론계의 역사적 형성과 변화]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의 논문을 완성했다. 과연 어떤 사람이 평론가가 되고, 어떤 방식으로 평론계가 구성되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글쓰기의 기본 동인이었다. 자료 수집을 위해 대중음악 평론가로 활동한 12인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녹취록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구성했다. 그 논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국 대중음악 평론의 역사 

한국의 대중음악 평론은 한국 대중음악의 탄생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에 대중음악이 처음으로 형성된 것은 일제 강점기 시절이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음악 평론가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남한에 주둔한 미군의 영향으로 한국 대중음악이 발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다. 단, 당시에 활동한 평론가들은 대부분 언론 매체나 음반 제작사에서 일한, 이른바 ‘실무자’였기 때문에 평론의 콘텐츠가 설득력을 갖기는 어려웠다.

이런 흐름에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무크지 [노래]였다. 1980년대 중반에 일부 대학원생들이 노래운동의 일환으로 발간한 무크지 [노래]는 한국의 대중음악을 연구와 비평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본격적인 시도로 평가받는다. 이 활동에 참여한 김창남과 이영미는 ‘전업’ 대중음악 평론가의 존립 가능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활성화한 대중문화 담론은 대중음악을 포괄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강헌, 신현준, 임진모 등 소위 ‘명문대 출신’ 평론가들은 대중음악을 사회학적·미학적으로 다루며 기존의 평론 장을 넓혔다. 대중음악 평론가가 전문 지식인의 이미지로 구체화한 것도 이즈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PC통신 동호회는 비평과 담론을 생산하는 주요 매체로 부상했다.

이후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초고속 인터넷이 대중화하면서 평론의 장은 급격히 재편되었다. 특히 1980년대의 [월간 팝송]과 [음악 세계], 1990년대의 [핫뮤직]과 [GMV]로 대표되던 오프라인 대중음악 잡지 시장은 급속히 몰락했다. 대신 [weiv], [가슴], [IZM], [리드머] 등 19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대중음악 웹진이 유료정기간행물의 역할을 대체했다. 웹진은 기사가 아닌 리뷰를 통해 적극적인 평론 매체로 자리한 것은 물론 기성 평론가와 신진 평론가를 한데 묶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 정보의 증대는 웹진의 수익 창출과 운영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웹진에 기반을 둔 현재의 대중음악 평론계는 전업 평론가를 제대로 낳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처럼 한국 대중음악 평론계의 역사는 그리 긴 편은 아니다. 전업 평론가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를 1990년대라고 가정했을 때 더더욱 그렇다. 그동안 평론가들은 대중음악 전문 매체의 기자나 필자로 활동하거나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행본을 발간하면서 타 매체로부터 ‘대중음악 평론가’라는 직함을 부여받곤 했다. 그리고 이들의 평론 활동은 개인이나 매체 단위로 이어졌을 뿐 ‘평론계’라는 큰 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다시 말해 평론가라는 직함이나 평론계라는 구획이 평론 주체의 자발적인 의도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대중음악 평론계 내외부적 갈등

이러한 한국 대중음악 평론계를 움직이는 주요소는 경제 자본과 상징 자본이다. 여러 평론가가 한정된 자본을 얻기 위해 서로 암묵적인 경쟁을 펼치면서 평론 장은 변화하고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장에 내재한 자본의 총량이 비교적 적은 탓에 자본 획득에 실패한 행위자가 장을 이탈하는 경우는 빈번했다. 그 결과 현재 전업 평론가보다 부업 평론가의 수가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다. 평론계의 구조적 취약성과 평론가의 직업적 불안정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실제로 평론가들은 확실한 미래 설계가 바탕이 되었을 때 평론 활동을 오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슈의 배경에는 평론가와 외부 매체 사이의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평론가에 대한 외부 매체의 인식과 처우는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지 오래다. 평론가가 지향하는 평론과 매체가 기대하는 평론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갈등을 봉합하는 것은 경제 자본과 평론가라는 상징 자본이다. 평론 활동은 평론가의 경제 자본과 상징 자본 축적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평론가가 평론의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은 왜, 이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현실을 거의 방기하다시피 하고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평론가의 미약한 정체성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인터뷰한 여러 평론가들이 자신을 평론가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대중음악 마니아 사이에서 유명한 일부 평론가들조차 그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평론가라는 직함이 갖는 절대적 위상과 평론가 배출을 위한 공인된 창구가 부재하는 현실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즉 평론계 전체를 아우르는 단체나 대중음악 평론을 대표할 만한 매체가 없는 상황은 평론가의 정체성 형성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역으로 평론가의 미약한 정체성이 단체 설립을 막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소통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사실 평론은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다. 원고 의뢰를 받은 주체가 홀로 글을 쓰고 송고를 하면 그만이지만 이와 동시에 목적은 뚜렷하다. 긴 시간과 여러 공간을 통해 축적된 다양한 평론이 서로 어우러질 때, ‘대중음악 발전’과 ‘가이드라인 제시’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현실화할 수 있다. 필자의 조사 결과, 한국의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매체 단위로 교류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무엇보다 동의든 비판이든 피드백이 없기 때문에 ‘평론계 전반의 시각’이란 게 부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매체 간의 교류가 적기에, 평론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자본에 관한 문제도 공론화되기 힘든 실정이다.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대중음악 평론가 협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은 몇 차례 가시화되었다. 평론가의 처우 개선, 공론장 마련, 평론계의 결속력 강화 등 협회 설립의 목적도 뚜렷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유야무야로 끝났고, 지금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는다. 평론계 전체가 아닌 개개인이 협회를 통해 얻는 이득이 비가시적이고 즉각적이지 않은 탓에 평론계의 건강한 욕망은 과거 시제로 점철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실이 대중의 무관심과 무시로 이어졌다고 한다면, 누군가 바로 코웃음은 치겠지만 ‘절대부정’까지 하지는 못할 것이다. 평론계에는 정말 교류라는 게 필요 없을까? 각자 글 쓰고 그럭저럭 생활하면 끝일까? 한국 대중음악 평론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진작부터 갖고 있었을 것이다. 예부터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대중음악 평론계의 과제는 ‘이기(利己)를 이긴 만남’, 그 뿐일 것이다. | 글 김두완_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diydw@naver.com

info. 김두완은 2012년 1월, [한국 대중음악 평론계의 역사적 형성과 변화: 198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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