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1월 8월 24일 장소: 서울 창천동 디어 클라우드 연습실 질문: 호미(신현준) 정리: 정명희 사진 제공: 에스데로의 블로그 Dark Tranquillity 호미: 3집 발매를 축하드립니다. 앨범 녹음 과정을 말해줄래요? EP 활동 끝나고 시작한 건가요? 용린: 네, 1월부터 곡 작업 및 연습에 들어가 2월 말부터 드럼 녹음을 했고 곡 선별 작업에 들어갔어요. 데모를 따로 하진 않았고, 녹음을 해도 되겠다 싶은 순간까지 합주를 해서 전체적인 사운드를 먼저 완성시키고, 그 다음 전체적인 드럼 레코딩 후 거기에 베이스를 입히고 건반이나 기타 등 다른 악기들을 입힌 뒤 보컬을 얹히는 순으로 녹음했어요. 즉, 악기별로 녹음한 거죠. 나인: 생각해 보니 첫 번째 트랙은 EP 녹음할 때 이미 녹음이 다 되어 있었던 곡이에요. 이랑: EP에는 예고편을 보여주듯 노래 없이 연주곡을 내보냈고, 정규앨범인 3집에 완곡을 실었어요. 호미: 드럼 레코딩은 다른 곳에서 하고 나머지는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이 장소에서 한 것인가요? 나인: 드럼과 현악기만 서울 스튜디오(이촌동)에서 했어요. 이번에 많이 달랐던 점은 지난 앨범보다 현 녹음, 드럼 녹음에 굉장히 신경 썼다는 점이에요. 호미: 현 녹음 연주자들과의 조율은 어떻게 했나요? 편곡은 악보를 그려주는 식이었나요? 용린: 예전부터 보드카 레인이나 박지윤의 앨범 때 같이 작업했던 친구들이라 이야기가 잘 통했어요. 원래는 클래식하는 분들인데 모던 록 쪽으로도 작업하는 친구들이죠. 나인: 몇 곡은 현 편곡하는 분에게 맡겼고 몇 곡은 저와 용린이 작업했어요. 이랑: 세션 분들이 메조포르테로 갈 건지 포르테로 갈 건지 등 악보의 사소한 기호 하나에도 예민했어요. 호미: 이번 앨범에서 현의 사용이 중요했던 것 같은데 신디사이저로 작업할 때랑 많이 달랐나요? 나인: 2집 때 “비밀”이라는 곡이 신디사이저를 현처럼 작업했던 곡이었고, 용린의 곡 중 “너에겐 위로가 되지 않을” “넌 아름답기만 한 기억으로” 등에서도 현이 나왔지만 한 번도 리얼은 아니었죠. 리얼을 해보고 싶던 차에 이번 앨범에서 도전해보자 하면서 작정하고 현을 쓰게 된 것이죠. 그러다 보니 맴버 모두 현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전체적으로 현이 들어간 부분이 많아졌어요. 호미: 시시콜콜한 질문이지만, 녹음 작업 때는 현 파트를 비워 놓고 녹음하는 방식을 취한 것인가요? 이랑: 대략적인 사운드의 그림을 그려놓고 ‘현이 주인공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의 연주를 줄여놓았죠. 용린의 경우는 집에서 주로 작업하는 편이어서 현 작업을 해서 ‘리드(lead)’를 만들어 놓기도 했어요. 호미: 전체적으로 이번 앨범에서는 편곡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네요. 소리가 더 풍부해졌어요. 나인: 편곡 작업을 하면서 예전보다 노련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예전엔 리듬을 덧입히는 것에 주력했다면, 이번에는 비워도 찰 수 있는 사운드를 만들어 보고자 했어요. 호미: 1집, 2집, EP에 비해 이번 음반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강하네요. 1, 2, 3번 트랙에서 달리다가, 중반부터 무게를 주는 등 구성도 달리한 것 같고…. 나인: 그렇게 노력을 해봤어요. 예전에는 곡을 가져올 때 맴버 네 명의 곡들 중 좋은 곡을 선택하는 식이었다면, 이번엔 앨범 전체의 흐름에 더 많이 신경을 썼어요. 용린이 리더이다 보니 전체 그림을 잘 그렸어요. 예를 들어 5번 트랙 “아직도 그대가 익숙해” 같은 노래를 넣어 보자고 하는 등. 그 결과 앨범의 흐름이 예전보다 완성도가 있지 않았나 싶네요. 호미: 이전 앨범들보다 앨범으로서의 일관성이 높아 보여요. 이랑: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쁘죠. 왜냐하면 이번 앨범은 구성에 대한 신경을 많이 쓰고 낸 앨범이에요. EP까지는 전체의 구성보다 각 곡에서 어떤 느낌을 낼까를 더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전체적인 흐름을 많이 생각했어요. 그것을 알아주는 분들이 있으면 기쁘죠. 나인: 누군가 발라드를 한 곡 써오면 다른 멤버가 밝은 곡을 써오는 식으로 완급 조절을 했어요. 호미: 디어 클라우드는 아무래도 멜로디가 중요한 밴드인데, “스쳐 간다” 같은 곡에서는 리듬이 강해지고 저음이 더 풍부해진 것 같은데…. 이랑: EP에서 실험적으로 드럼, 베이스를 살짝 앞쪽으로 놓아볼까 하는 것을 “라스트 신”에서 해봤는데, 곡 반응도 좋았고 연주할 때도 즐거웠어요. 그때 한 작업을 이번 앨범에서 용기 내어 해본 것이죠. 용린: 사운드적인 변화를 주는 데 있어 예전에는 기타 더빙을 다양한 방식으로 하는 밴드였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기타의 역할을 줄이고 리듬 부분을 보강시켜서 사운드가 풍부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이랑: 뺀다고 수월해지는 것이 아니고 넣는다고 해서 힘들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빼서 더 힘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더 힘들고 더 수월하고는 딱히 없었어요. 나인: 리듬이 강조된 곡들 중에서 타이틀곡 “널 위해서라면”이나 “스쳐간다”가 드럼과 베이스가 잘 나온 곡인 것 같네요. 호미: 개인적으로는 1번, 2번, 9번 트랙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네요. 맞나요? 나인: 드럼 녹음에서 “널 위해서라면”보다는 “스쳐간다”가 더 잘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확실히 드럼 녹음이 잘되면 나머지 사운드는 쉽게 가는 것 같아요. 이랑: 곡이 먼저 있었는데, 합주를 계속하면서 맴버들끼리 조율을 하면서 리듬을 맞춰간 경우에요. 호미: 첫 곡은 ‘팝’으로서는 다소 이질적이네요. 버스와 코러스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브릿지가 오히려 코러스 느낌이 나요. 다른 스타일로 곡을 쓰려고 시도한 것인가요? 용린: 원래 우리의 성향은 브릿팝을 좋아하는데 좀 더 역동적인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호미: 그런데 들을 때는 에너지가 느껴졌는데, 같이 따라 부를 만한 부분은 모호하기도 했어요. 용린: 후렴구의 “말해도 모를 걸/죽어도 모를 걸” 정도가 따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웃음) 호미: “널 위해서라면”과 “지금은 알지 못해도”의 브릿지도 일반적인 의미의 브릿지는 아닌 것 같네요. 그런 점이 뭔가 공들인 것으로 들렸어요. 나인: 그 부분들이 처음 시도하는 거였는데, 합주하면서도 기분이 좋았어요. 브릿지를 확 줄이고 드럼이 주가 되어 간주가 브릿지 역할을 하는 것이었죠. “지금은 알지 못해도”도 연주 음악 같은데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풍이어서 재미있었어요. 호미: “지금은 알지 못해도”와 “기억에 흩어지다”의 브릿지에서 살짝 퓨전 재즈 느낌이 나네요. “기억에 흩어지다”에 나오는 증화음은 재즈를 공부한 영향인가요? 용린: 안 그래도 브릿지 작업을 하면서 ‘팻 메스니(Pat Metheny) 분위기인데….’ 하면서 작업했어요. 하지만 증화음 정도는 일반적으로 굉장히 많이 쓰이는 코드라서, 재즈나 화성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코드적으로는 간단한 것이에요. 나인: 그래도 다들 어렸을 때 팻 메스니의 음악을 많이 들어서 영향이 없진 않았을 거예요. 호미: 중반부의 4, 5, 6, 7번(“기억에 흩어지다(marcescent)”, “아직도 그대가 익숙해”, “행운을 빌어줘”, “작별”)은 ‘쉬어가는’ 곡들이네요. 그런데 발라드 곡에서도 한국형 ‘뽕 발라드’ 식의 싸비가 강하진 않네요. 디어 클라우드가 갖고 있는 작곡에 대한 철학 같은 게 있는 건가요? 나인: 후렴을 의식하고 곡을 쓰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멜로디가 너무 ‘뽕’일 때는 서로 얘기해주고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는 건 사실이에요. 용린: 한국에서 음악을 하고 있지만 너무 ‘가요스럽지’ 않게 멜로디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죠. 이랑: 이미 가요스러운 음악을 잘하는 분들이 인디 쪽에서도 너무 많아서, 우리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뽕끼 있는 싸비’는 너무 구태의연해지는 것 같아서…. 호미: “행운을 빌어줘”의 가사는 뭐랄까 디어 클라우드식 “싸구려 커피” 같은 느낌이었어요. 백수의 노래라고 할까…. 나인: 그렇게 느낄 수 있겠네요. (웃음) 호미: “작별”은 예전부터 라이브로 했던 곡이었다고 들었는데 언제 만들었던 곡인가요? 이랑: 2005년 멤버가 처음 다 모여 사흘 만에 합주를 하고 프리마켓 공연을 했는데, 다섯이 하니까 너무 재미있었어요. 2005년 당시에 있었던 클럽 앨리스(Alice)에서 첫 공연을 했었고 그 곡들 중 한 곡이 “작별”이었어요. “기억에 흩어지다”도 원래 EP로 준비했던 곡인데, 이번 정규 앨범에 넣게 되었어요. 호미: 이랑에게 질문. 4, 5, 6, 7번 곡들 경우는 베이스가 연주하기에는 심심할 것 같은데…. 이랑: 그런 심심한 곡을 무척 좋아해요. 연주하는 동안 우리 팀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볼 수 있고 관망하는 자세가 될 수 있어서 좋아요. 생각할 수 있잖아요? (웃음) 그런데 드러머 광석이는 조금 심심해하기는 해요! 호미: 촌스럽게 직설적으로 물어봐서 좀 그렇지만, “현실 5분 전”은 무슨 뜻인가요? 나인: 마지막 곡이기 때문에 ‘이 순간이 끝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고, 가사 내용은 ‘너의 슬픔으로 데려가다’라는 것이에요. 서로의 슬픔을 공감하는 시간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는 것에 빗댄 것이죠. 호미: 이번에는 통속적인 질문인데 “아직도 그대가 익숙해”의 ‘그대’는 누구인가요? 나인: 키보드를 치는 정아가 만든 곡이에요. ‘그대’에 대해 추측은 해볼 수 있으나 누군지는 모르겠네요. (웃음) 호미: 가사에 사랑이나 이별 이야기가 많지만 노골적이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디어 클라우드의 사랑에 대한 견해는? 이랑: 가사가 너무 직설적이면 촌스럽고 통속적이 되는 것 같아요. 듣는 사람이 한 가지 밖에 느끼지 못하는 가사는 재미가 떨어져요. 사랑 이야기일 수도, 친구나 가족에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고 느낄 만한 가사에 재미를 느껴요. 통속적인 가사는 ‘쏘는 것 같기는 하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을 들려주는 것’을 말해요. 나인: 저는 개인적으로 비극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예전에 디어 클라우드가 비극을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칭찬을 어느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는데 나중에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밴드가 되고 싶어요. 용린: 오늘 주시는 질문들이 다른 인터뷰에서 받았던 똑같은 질문보다 색다르네요. 호미: 똑같은 질문이라면, 예를 들어 ‘인디와 오버의 경계’ 같은 것들에 질문이겠죠? (웃음) 자, 그럼 지금부터는 재미없어집니다! 세 분이 전업으로 음악을 하기 전 어떻게 살았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나인: 서울 북부에서 자랐는데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꿈도 음악가였어요. 구체화된 것은 중학교 때 친구가 자우림을 굉장히 좋아해서 함께 곡을 듣고 공연장에 갔는데 그때 밴드 음악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어요. 패닉(이적) 등 1990년대 싱어송라이터들을 들으면서 실용음악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인터넷으로 개인 레슨을 받았는데 그분이 예대 실용음악과에 다니는 분이었어요. 포티쉐드(Portishead), 사라 맥래클런(Sarah Mclaclan), 샤데이(Sade), 장필순 등의 곡을 들으며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입시 레슨을 1년 정도 받다가 예대에 오게 되었네요. 인디에 대한 관심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크라잉 넛을 많이 들었어요. 이랑: 분당에서 자랐는데,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나를 클래식 쪽의 음악을 하는 아이로 키우려 했어요. 피아노도 치고 플루트도 배우고…. 심지어 부모님이 저를 김덕수 사물놀이패 캠프에도 보내셨어요. 다 재미없었는데, 중학교 때 라디오를 갖게 되었고 어느 날 문득 “Smells Like Teen Spirit”이 나온 거예요. 그 음악이 너무 강렬하고 충격적이어서 테이프를 사서 계속 들었어요. 그러다가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를 좋아하는 학교 친구와 통기타를 배우러 중3 때 악기 학원에 갔다가 베이스가 더 재미있고 멋있어 보여서 베이스를 치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밴드부를 했는데 그 선배가 이정 씨와 하동균 씨였어요. 예전에는 세븐 데이즈(Seven Days)하던 분들요. 그 분들이 그때는 굉장한 로커였는데, 데뷔하니까 R&B로 하더라고요. (웃음) 용린: 어렸을 때 삼촌이 음악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2~3학년 때 그 당시는 그리 흔치 않았던 CD를 테이프로 옮겨 담을 수 있는 기기가 있어서 삼촌이 음악을 많이 옮겨 담아주었고, 옮기는 동안 나는 옆에서 계속 음악을 들었어요. 그러면서 음악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들은 본 조비(Bon Jovi) 3집 앨범이 충격적이었어요. 그전까지는 팝에 빠져 있었는데 그 이후로 록에 빠지게 되었죠. 1992년에 너바나(Nirvana), 라디오헤드(Radiohead) 등 얼터너티브 록, 모던 락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쪽 장르를 접하게 되었구요. 아무래도 라디오헤드를 가장 좋아했는데, 밴드 기타리스트로 영향을 받은 것은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Johny Greenwood), 그리고 팻 메스니(Pat Metheny)엿어요. 중학교 때 기타를 시작하면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호미: 본인들이 조금 꺼리는 것도 같던데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아서 물어보면, 서울예대 다니던 시절 이야기해 줄래요? 용린: 사실 제가 서울예대에 지망한 이유는 음악을 계속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사실 서울예대는 밴드를 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스스로 모르면서 보이는 것에 더 집중하는 사람이 많아서 학교에서는 마음 맞는 사람을 그다지 만나지 못했어요. 나인: 그래서 지금 맴버들을 만나고 놀랐어요. 좋아하는 음악은 물론 영화 등 다른 면에서도 취향이 비슷했어요. 대학 생활은 세션을 하기 위한 준비기간 같았는데 서로를 만나고서부터 시너지가 발생했죠. 이랑: 재학 당시 학교에 ‘왕따 옥상’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웃음) 옥상 구석진 곳에 있는 담배 피우는 공간인데 주류들이 갈 일이 없는 곳이에요. 빵이랑 우유를 거기 가보면 항상 이 사람들이 있었죠. (웃음) 용린: 아, 나는 비주류는 아니었어! 선배고 복학생이다 보니 당당히 중앙에 있었어! (웃음) [이랑: 그때 주류의 ‘주’는 술 주(酒)자였어요!] 군대 다녀와서 2004년 복학해서 이들을 만났어요. 이랑: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평론가들이나 음악 종사자분들은 왜 실용음악과 출신을 꺼려하나요? 호미: ‘영혼이 없다, 크리에이티브하지 않다’ 등의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같네요. 나인: 학교에 갔을 때도 비주류라는 시선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나오니까 또 다른 시선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조금 괴로웠어요! 용린: 실용음악과에서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보다도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사실이에요. 그런 데서 오는 선입견이 우리 밴드에도 적용될 까봐 활동 초반에는 외부에 학교 얘기하기를 꺼렸고, 데뷔하고 몇 년 동안은 학교 이야기를 안했어요. 굳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말씀은 해드리되 기사에 쓰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그래도 다 알더라고요. (웃음) 지금은 3집까지 나온 상태라 굳이 숨기진 않아요. 호미: 예전에 홍대앞에서 지나가다가 용린 씨가 보드카 레인의 기타리스트 혜완 씨와 함께 있더군요.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용린: 그 당시 예대를 준비하려고 록과 재즈를 연습하던 입시생 시절에 고3 때 신사동에 있던 서울실용음악학원을 다녔어요. 그때는 전체를 통틀어서 거기밖에 없었고, 당시는 수강료도 쌌어요. 아무튼 그곳에서 혜완이를 처음 만났어요.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그때 학원에서 제일 잘 나가는 두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워낙 친하게 지냈고, 둘 다 음악적 취향이 비슷해서 친구로 지내게 되었죠. 호미: 당시 그 부근에서 음악하려고 했던 젊은 사람들에게 중요했던 곳들은 어디였어요? 이건 제 연구주제에요. (하하) ‘신사동 화이트’라든가, 강남역 ‘타워레코드’라든가…. 용린: 화이트는 비싸서 못 갔어요. [나인: 거기는 콘서트 연습하는데 아냐? 이랑: 그러면서 핑가스 존에 가고….] 어, 우리는 핑가스 존에도 못 갔는데. 우리는 고등학교 때 밴드할 때는 학원 옆에 옆에서 칸이라고 제일 싼 데 있었어요. 거기에 소주랑 오뎅 채 썰어가지고 하나씩 먹으면서…. [나인: 야! 강남의 강북이었구나!] 강남역 타워레코드도 많이는 가지 않고 신나라레코드를 많이 갔어요. 압구정역 맞은 편 교회 건물 1층에 있던 곳이었어요. 제가 단골이라서 CD 한번 사러오면 거기서 일하는 누나들이 ‘빵꾸’ 뚫려 있는 홍보용 CD들 무더기로 주곤 했어요. 저는 정말 단골이었거든요. 호미: 역시 10대 시절 이야기가 재밌네요. 그런데 10대 때부터 홍대앞에 들락날락했던 뮤지션들도 있는데 디어 클라우드는 조금 늦게 온 편이네요. 이쪽 씬에 오는 것을 누가 이끌어 주었나요? 용린: 피터팬 컴플렉스의 전지한 형이 학교 선배였는데 초기에 팀을 같이 했었어요. EP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대회도 함께 나갔었죠. EP는 내가 기타를 친 것을 그대로 카피해서 친 것이에요. 그 당시 홍대에서 공연을 많이 했었고 ‘이제 밴드를 시작했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호미: 피터팬 콤플렉스 때는 아직 홈스튜디오가 일반화되지 않고 홍대앞에 녹음시설이 많을 때가 아닌데 녹음은 어떻게 했나요? 그 뒤 디어 클라우드 결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해주세요. 용린: EP는 어디서 녹음했는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난장 스튜디오에서 제작해준다고 해서 노래와 레코딩을 해보다가 스트레스 받고 그만 둔 기억이 나네요. 우리 팀을 만난 것은 2004년이고, 공연은 2005년부터 시작했어요. 나인: 2004년에는 다른 팀을 했고 2005년에 지금 밴드의 팀원을 모으게 되었어요. 그때 곡이 EP에 수록된 “어떻게도”예요. 그때는 밴드가 아니었고 용린, 나인, 플라스틱걸이라는 일랙트로닉하는 친구 셋이서 일렉트로닉 모던락을 해보자고 해서 데모작업을 하다가 시간이 오래 걸려서 흐지부지되었고 지금의 멤버가 모인 후로 가속이 붙어서 활동했어요. 초기에는 콜드플레이(Coldplay)의 “Yellow”,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의 “Nothing compares to you”, 그리고 비틀스 곡들 몇 개 커버하면서 연습했어요. 호미: 이랑은 영국에 유학을 갔었다는 말이 있던데? 이랑: 런던에 1년 있었고 2005년에 한국에 왔어요. 그런데 학교(서울예대)에서 제적당한다고 해서 학교 졸업하고 런던으로 돌아가서 다른 코스를 밟기로 되어 있었어요. ‘졸업하고 다시 런던에 가야지’ 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들어온 다음 날 나인을 만나고 그 다음날 용린을 만났고, 며칠 뒤 공연을 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진지해졌고, 런던에서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밴드가 더 재미있어서 한국에 남게 된 거죠. 호미: 학교는 어디였나요? 이랑: 턴 햄그린의 ‘테크(Tech Music School)’라는 학교예요. 재미있었던 게, 한국에서는 베이스를 일주일에 한두 번 매고 가는 정도였는데 런던에서는 수업시간 거의 대부분 매고 갔어요. 이론적인 것보다 실전이 더 많았고, 록, 퓨전, 재즈, 팝 등 장르가 나뉘어져 있어서 자기가 듣고 싶은 수업을 들을 수 있었어요. 내가 들은 수업은 마이크 스턴(Mike Stern)이 가르치는 것이었고, 전공교수가 베이스먼트 잭스(Basement Jaxx)일 만큼 당시 대중음악과 깊이 연관 되어 있는 분들이었죠. 그때 배운 것을 디어 클라우드 음악에 의도적으로 불어넣지는 않지만, 어딘가에서 쓰이고 있을 거예요. 호미: 비즈니스 얘기로 들어가 보지요. 토이뮤직 → MA와일드독 엔터테인먼트 → 클라우드 레코드로 음반의 레이블이 바뀌는 데 그 과정이 험난했을 것 같네요. 용린: 1집 때부터 실 제작자는 따로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제작자 분은 서울예대 은사인 정원영 선생님이 소개해 주었어요. 그 제작자에 의해 토이뮤직과 연계가 됐다가 갑자기 MA와일드독으로 옮기게 된 건데, 2집 앨범부터 회사나 제작자와의 관계가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제작자로 인해 회사를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힘든 일이었고, 심지어 두 번째 회사에서는 계약서도 쓰지 않고 앨범을 냈었어요. 당시는 레이블이 뮤지션의 이미지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제작자는 밴드의 이미지를 잡아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사장이 두 명이라 우리가 갈팡질팡한 부분도 있었고…. 갈등이 계속된 끝에 용린이 결단을 내려서 독립하게 되었어요. 호미: 그 제작자 분이 원했던 활동의 방향은 어떤 것이었길래 갈등이 많았나요? 용린: 원래 회사와 계약하기 전까지는 클럽 공연을 많이 했었는데, 회사가 메이저 계열이다 보니 홍보 방식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어요. 페스티벌이나 공연을 많이 하고 싶었는데 그쪽과 제작자의 연계가 없었고, 회사에서도 그런 부분을 난감해 했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앨범을 내고 클럽공연을 포함한 공연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공연을 마음껏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점점 생겼죠. 결국 1, 2집 때는 앨범을 내고도 활동을 많이 못했어요. 이랑: 매 음반을 낼 때마다 단독 공연을 한 번씩 하긴 했지만 공연을 더 많이 하고 싶었는데 회사의 콧대가 너무 높았어요. 팬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도 앨범이 나오기 전에 공연 제의가 왔었는데 회사 측에서 ‘저녁 타임에 해야 한다’며 무리하게 주장하다가 무산된 적이 있었어요. 1, 2집 때 활동을 못해서 이번 앨범부터는 단독공연을 더 많이 해보고 싶어요. 호미: 지나고 나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인디 레이블들은 고려하지 않았나? 용린: 그땐 인디 레이블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지금처럼 힘도 없는 등 홍대앞이 전체적으로 침체기였어요. 예전에 프리버드에서 공연을 많이 했었는데 그 당시는 공연 팀이 모자라기 일쑤였고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았어요. 사실 소속사가 있을 당시 토이뮤직이나 MA와일드독과는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어요. 토이뮤직의 정동인 대표는 밴드를 컨트롤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어요. 다른 문제가 있었던 거죠. 이랑: MA와일드독 윤영록 이사님 등과는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조언도 종종 해주세요. 호미: 지금 클라우드 레코드, 뮤지커밸, 미러볼과의 관계는 정확히 어떤 건가요? 용린: 미러볼이 유통을 하고, 뮤지커밸이 매니지먼트를 맡아서 하고 있는 거죠. 호미: 그러면 클라우드 레코드로 독립을 한 뒤 멤버들의 일상은 어떻게 변했나요? 음악가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 모두 포함해서…. 용린: 우리 팀은 다섯 명이 모두 레슨을 해요. 실용음악과 출신의 좋은 점은 레슨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점이죠. 여기서 번 수익은 모두 밴드 활동에 붓고 있어요. 이곳도 공짜로 돌아가는 곳은 아니죠. (웃음) 페스티벌, 공연, 행사에서 얻는 수익은 예전에 음반제작을 위해 투자 받은 금액이 있어서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수익이 나면 갚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불행히도 1, 2집이 지금 다 절판되었어요. 1집 때 멜론에서 신인으로 뽑혀서 꽤 많은 돈을 지원받았고 그걸 다 갚을 때까지 앨범을 찍었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했어요. 지금 판권도 어디로 되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음원 다운로드도 1집 수익은 로엔으로 가고, 2집은 엠넷으로 가요. 저작권 수입은 들어오지만, 앨범(판권) 수입은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에요. 이랑: 그 앨범들이 중고 사이트에서 15만 원에 거래된다는 소문을 듣고 기분이 좋기도 하다가 씁쓸해지기도 해요. 호미: 3집 활동 재개 이후로는 생활이 많이 달라졌나? 용린: EP 후 독립적으로 하면서 공연 활동의 폭이 넓어져 기분 좋게 활동하고 있어요. 좋은 의미에서 일이 많아졌어요. 이랑: 1, 2집 때 앨범 반응은 괜찮았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일이 없었어요. 업계에 ‘비싸게 군다’는 소문이 돌아 인지도가 좋지 않았다고 하네요. 독립한 후로는 여러 곳에서 공연 제의 연락이 오고 있어요. 나인: 제작자의 압력으로 순위 프로그램에 나간 일도 있어요. MA와일드독이 MC몽이 소속된 회사라 순위 프로그램에 강했어요. 저희 앞에 승리가 나오고, 그 뒤에 소녀시대가 나오기도 했어요! 자괴감이 들었던 게, ‘핸드 싱크’를 하고 나면 피디나 감독들이 우리를 아이돌 대하듯이 대하고, 한 번은 카메라 감독이 “너, 그거 정말 칠 줄은 아냐?”라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한편 홍대 씬에서는 우리가 핸드 싱크를 한 것에 대해 비아냥거렸어요. 인디와 오버의 경계선에서 어정쩡하게 끼어서,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방송을 한 거죠. 방송국에는 심지어 앰프도 없어서 라이브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아, 좋았던 방송도 있었는데 2집 활동 때 KBS <이하나의 페퍼민트>의 이연 작가님을 만났는데 수준이 다르다고 느꼈어요. 순위 프로그램은 피디들이 지나가면 가수들이 일렬로 서서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우리는 일부러 인사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이하나의 페퍼민트>에 출연 했는데 그곳에서는 뮤지션을 뮤지션답게 대우하고 컨트롤해주더군요. 이랑: 순위 프로그램에 나간 모습으로 우리를 알게 되면 과연 우리 음악에 빠질 수 있을까 싶어요. 호미: 지금은 전반적으로 프레임이 달라졌고 페스티벌이나 행사가 많아졌으나 그때는 그런 것이 딱히 없었던 것 같네요. 그래도 그랜드민트 페스티벌(GMF)에는 자주 모습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용린: 아시다시피, 안테나뮤직의 대표가 그랜드민트 페스티벌 측과 친한 관계여서 그랜드민트 페스티벌에는 거의 매년 나갈 수 있었어요. 작년은 라인업이 끝나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작은 무대라도 마련해 줬어요. 고마운 일이죠. 호미: 예, 이제 마무리 질문들이에요. 디어 클라우드가 어떤 밴드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이랑: 고집 있는 밴드이고 싶어요. 용린: 한결같은 밴드로 기억되고 싶어요.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만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변화하는 밴드가 되고 싶고, 다음 앨범이 기대되는 밴드가 되고 싶네요. 진심으로 연주하고 노래하면 듣는 사람에게도 와 닿는 것 같아요. 뭔가를 꾸며서 연주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땐 음악을 쉬어야 하겠죠. 나인: 오래하는 밴드가 되었으면 해요. 어려움이 오겠지만, 그걸 다 이겨내고 오래 하면 더 멋있는 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호미: 참, “사라지지 말아요”는 어떤 노래인가요? 들국화 최성원 씨와 공연을 같이 볼 때 그분은 ‘저 노래는 노무현 추모식에서 부르면 어울릴 것 같다’는 말씀을 하더군요. 이랑: “사라지지 말아요”는 그냥 ‘사라지지 말아요’인 것 같아요. 그렇게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될 수 있는 점 때문에 직설적인 가사를 지양하는 것 같기도 해요. 나인: 그 당시 삶의 변화가 있었어요. 13년 만에 아버지를 뵙고 무대에 서서 객석에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2집에 수록된 곡 “Siam”도 사랑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요. 호미: 진짜 마지막으로 본인들이 이제까지 본 책, 영화, 음악 가운데 가장 감명 받았던 것들은? 용린: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좋았고 지금도 틈만 나면 다시 읽고 있어요.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나를 안정시켜 줘요. 나인: 시네이드 오코너가 제 인생을 바꾼 것 같아요. 김윤아 씨 책에 시네이드 오코너 이야기가 있어요. 그때 처음 찾아봤는데 너무 특이하고 전위적인 사람이라서, 따라해 보려고 머리를 밀기도 했어요. 그 시절에 용린도 머리를 밀었는데 그게 서로를 알아본 계기가 되었죠. 앞으로의 갈 길을 제시해 주는 뮤지션은 조니 미첼. “Both Side Now”가 있는 앨범에서 오케스트레이션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담배를 많이 피워서 목 쉰 저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중에 저런 멋진 뮤지션이 되어야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랑: 최근에 저를 많이 움직였던 것은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음악도 물론 좋지만, 다큐멘터리가 있어서 제천국제영화제에 가서 봤어요. 그걸 보고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해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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