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방학 | 가을방학 | 루오바 팩토리, 2010 정바비와 계피의 젠더 게임 가을방학 1집의 첫인상은 거리두기와 모호함이다. 토이(혹은 야니)가 연상되는 첫 곡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부터 분주한 템포가 블록처럼 연결되는 “호흡과다”에 이르기까지, 메인 테마는 몇 번씩 반복되고 악기는 빼곡하게 여백을 채운다. 이 넘치는 사운드 덕분에 대부분의 곡들이 감정과잉 상태를 유지하는데, 한편 가사는 강박적으로 여겨질 만큼 어느 정도의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다. 첫인상과는 달리 들을수록 모호한 인상을 받는 까닭은 관습적 멜로디와 애매한 감정의 반복 때문인데, 그래서 이 앨범은 듣는 이에 따라 심심하게(혹은 시시하게도)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가을방학은 미묘한 지점을 건드린다. 일단 ‘거리두기’의 맥락에서 이 음악은 일종의 모순을 겨냥한다. 모든 노래의 화자는 자기감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색깔도, 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것의 편리함과 불편함도,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또 이별의 순간에 첫 만남의 미소를 보여주고 있는 연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감정의 실체는 과거의 단편적 에피소드나 현재의 상황 묘사로 대체되고, 주인공은 그럴듯하게 그려진 풍경 뒤로 숨는다. 이때 그 감정의 거리두기가 애잔함과 쓸쓸함으로 전환되는 음악적 성취를 정바비(정대욱)의 역량으로만 돌린다면, 계피는 단지 전달자에 머물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브로콜리 너마저에 있던 때, 덕원의 송라이팅(작사/작곡)을 독특한 질감으로 재현하며 아마추어리즘의 진정성을 음악에 부여했고 팀의 대중적 성공을 견인한 바 있다. 그 점에서 계피의 목소리는 힘이 세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을 두리번거리고 머뭇거리고 망설이며 엉거주춤하는 순간에 얼핏 짠하고 문득 슬픈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의 조합은 시시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곡들에 특정한 긴장을 부여하고 균형을 유지한다. 한편 이 균형은 또한 계피 때문에 흐트러진다. 알려졌다시피 정바비는 줄리아 하트의 감수성 가득한(다른 말로 오그라드는) 곡을 만든 장본인이다. 주로 소년소녀의 애매하고 모호한 감정과 경험을 묘사하는 데 주력한 그는 사진작가 샐리 만의 [이미디트 패밀리(Immediate Family)]처럼 특히 ‘소녀’의 모호한 경계(아이도 어른도 아닌)를 포착하려는 욕망을 종종 드러내 왔고, 그것은 가을방학에서도 마찬가지다(“동거”와 “인기 있는 남자애”가 단적인 예다). 이때 문제는 그 감정묘사가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또 필연적으로 남성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가리거나 삭제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여기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이 전지적 작가주의의 욕망이 종종 ‘소녀’에 대한 관습적 오해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을방학에서는 그 욕망이 감춰지기보단 오히려 드러난다. 우연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인데, 바로 이 점이 가을방학을 비로소 재미있게 만든다. 곡의 화자는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기도 하며 때론 모호한 채로 방치된다. 대상 역시 성별이 불분명한 ‘너’란 호칭으로 통일된다. 그로 인해 가을방학은, 대개 그렇듯 수용자들이 여성 보컬의 노래를 그녀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맥락으로부터 벗어난다.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청자는 각 노래마다 애매하게 머뭇거리는 화자 대신 가사 뒤에 분리된 채 숨어 있는 진짜 주인공, 계피와 정바비의 뒤를 추적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취미는 사랑”에 나오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건 계피인가 정바비인가, 혹은 다른 누군가인가. 또 “인기 있는 남자애”의 ‘너’를 보고 있는 건 대체 누구인가.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는 과연 누구의 욕망인가. “나비가 앉은 자리”에서 ‘어린 소년 시절’이라고 노래하는 계피는 대체 누구의 목소리를 내는 건가. 요컨대 가을방학은 주체와 대상의 성별을 교란시키며 일종의 젠더 게임을 수행한다. 이것이 단지 ‘재미’로 시작한 놀이라 해도(마침 아는 기자가 모 잡지 인터뷰를 진행해서 이 질문을 부탁했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란 대답을 전해 들었다.) 가을방학의 음악적 실천이 퀴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이때 진정 흥미로운 존재는 정바비보다는 계피여야 한다. 가을방학에서 그녀는 ‘노래 부르는 여자’가 아니라 ‘브로콜리 너마저의 바로 그 계피’로 존재한다. 이런 존재감은 계피를 정바비와 대등한(혹은 더 우월한) 위치로 만들어 가창자와 작곡자의 파워를 분산시킨다. 따라서 이 도발적 놀이엔 근본적인 질문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음악적 완성도란 거의 전적으로 송라이팅에 있다고 믿는 ‘비평의 규칙’에 대한 것이다. 과연 음악비평은 ‘작가의 신화’로부터 어떻게,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차우진 nar75@naver.com 수록곡 1.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2. 동거 3. 곳에 따라 비 4. 속아도 꿈결 5. 취미는 사랑 6.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7. 이브나 8. 3×4 9. 인기 있는 남자애 10. 나비가 앉은 자리 11. 가을방학 12. 호흡과다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