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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5, 2012. Olympic National Park, WA.

 

산의 밤은 추웠다. 맨땅에 등 대고 자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도시 촌것에게는 더더욱 가혹했다. 덕분에 주량이 어쨌건 술을 들이부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술기운이 사라지면 얼음 같은 공기 포자 하나하나가 뼛속까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보드카를 마시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여길 왜 온다고 했을까. 모닥불에 마시멜로우를 구워 스모어(S’more)나 배 터지게 만들어 먹자는 유치한 꼬임에 넘어간 내가 멍청했다. 절반은 ‘미국까지 왔는데’에서 비롯한 객기, 다른 절반은 무리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다는 사춘기 청소년의 오기 같은 거였다. 온수 콸콸 나오는 욕실 딸린 숙소가 없으면 평양이 아니라 베를린, 파리, 런던도 감사를 마다할 인간이, 어쩌겠다고 변변한 침낭이나 파카도 없이 이 산속으로 뛰어들었을까. 미국 최고의 원시 우림이라는 올림픽국립공원(Olympic National Park)의 아름다운 풍경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게다가 정작 같이 가자고 그렇게 나를 꼬셔대던 카밀로는 저녁 내내 같이 온 다른 무리의 친구들과 희희낙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지옥으로 날 끌고 들어온 네가 감히 나를 안 챙겨?

갑자기 울컥한 마음에 캠핑장 옆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멈추거나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크기의 나무와 바위로 둘러싸인 숲은 깊기도 깊고 어둡기도 어두웠다. 평생 내가 겪어온 모든 밤을 모아 하룻밤으로 엮으면 이런 어둠일 것 같았다. 작은 불빛 하나 없었다. 캠핑장 전체가 의무적으로 모든 불을 소등해야 하는 10시가 진작 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하긴 더 크게 부를 수도 없었다. 이미 이웃 야영객들에게 당장 닥치지 못하겠냐는 고함을 몇 번이나 들은 터였다. 더 소란을 피웠다가는 누가 경찰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렇게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처음엔 조금 무서웠지만 취한 팔다리로 서나서나 한참을 걷다 보니 이번 생 따위 아무래도 좋다 싶은 이상한 해방감에 휩싸인 참이었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좀 환한 기운이 들었던 것 같다. 가만히 선 채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숨 막히게 빽빽한 나무숲 사이, 마치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듯한 커다란 공터 한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아. 아아. ‘숨이 막힌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구나, 멋대가리 없게도 맨 처음 든 건 그런 생각이었다. 거인 같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높고 먹먹한 하늘에, 크고 작은 별들이 다투듯 박혀 있었다. 넋을 놓고 한참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 무서워졌다. 갑자기 술도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누우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에 입고 있던 얇은 코트는 어림도 없었다. 등부터 천천히 얼어가는 것 같았지만, 도무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치사량을 한참 넘긴 알코올이 온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주위는 새하얗게 고요했고, 가끔 코끝을 스쳐 가는 바람만이 지구가 부지런히 돌고 있다는 걸 알려줬다. 동공이 저절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이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순간을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인류가 되겠다는 심정으로,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꼴깍거리고 있던 내 무의식을 깨운 건, 아니나 다를까 ‘시애틀에서 제일 싼 놈들’이었다. 들릴 듯 말 듯하던 익숙한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저기 뭐가 있는데? 모니카, 보여?”
“응, 보여. 사람인 것 같은데? 윤하! 윤하 맞아? 윤하!”
“뭐야, 근데 왜 누워 있어. 죽었나? 드디어?!”

아 진짜 저것들이.

“나 맞아. 그러니까 조용히 해. 방해하지 마.”
“오 마이 갓. 야, 우리가 얼마나 오래 찾아다닌 줄 알아? 지금 다 난리 났어!”
“전화는 왜 안 가져가? 이 숲이 얼마나 큰 줄 알아? 길 잃어버리면 진짜 죽어!”
“안 돼. 이거 취했어. 모니카, 빨리 일으켜. 업게. 윤하. 일어나 빨리.”
“가만. 잠깐만.”

일어나겠다는 대답 대신, 날 일으키려는 모니카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 옆에 누워봐. 별이 정말 예뻐.”
“…… 취했어, 취했어. 빨리 일으켜서 업혀, 뭐해?”
“…… 오, 밀로.”
“마야 너까지 왜 이래. 아 빨리, 추워! 마야!”
“밀로, 하늘 좀 봐. 정말 예뻐.”
“나 이런 거 처음 봐. 대만에선 이런 하늘 절대 못 봐.”

모니카가 먼저 누웠다. 뒤이어 돌고래 같은 비명을 지르던 마야가 누웠고, 마지막은 너희까지 이러면 나 혼자 텐트로 돌아가겠다며 연신 투덜대던 카밀로였다. 보관소 시체들마냥 주루룩 열 맞춰 누운 모양새는 볼품없었지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우주선 없는 히치하이킹을 함께했다.

돌아오는 길,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던 나는 결국 카밀로의 등에 업혔다. 그렇게 업혀온 길은 혼자 무작정 걸었던 길보다 훨씬 짧고 따뜻했다. 돌아오는 내내 우린 술에 취해 별에 취해 말도 안 되는 노래들을 목청 높여 불렀다. 국적도 나이도 모두 다른 우리가 공통적으로 아는 노래라고는 비틀즈 아니면 애니메이션 주제곡뿐이었다. 맞은편 텐트의 중년 부부에게 지옥에나 가버리라는 악담을 들으며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가 ‘헤이 주드(Hey Jude)’였는지 ‘Hi 도라(Dora the explorer)’의 주제곡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note. ‘사운드스케이프 시애틀 편’의 게으른 연재를 기다리고 응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weiv]에서의 연재는 여기까지지만, 개인 블로그(romanflare.egloos.com)에서 느리게나마 뒷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 멍청이들의 한철이 궁금하신 분들은 앞으로 이쪽으로 놀러 와주세요. 그럼, 조만간 ‘사운드스케이프 서울 편’으로 다시 만나요!  😀 

 


Bibio – You won’t remem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