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에 대한 설명을 여기서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한국 인디’에서 가장 높이 올랐고, 가장 넓게 나아갔다. 그 비결은? [2010 지산 록 페스티벌]에서 그의 공연을 본 [weiv]의 필자 이수연은 “영리한 데다 성실하기까지 하면 당할 사람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은 일이 있다. 작년 말 운 좋게 도쿄에서 그의 공연을 본 내가 든 생각도 비슷했다. “말이 통해야 같이 살지”라고 갑갑해 할 환경에서 그는 몇 개월 동안 ‘열공’한 일본어로 어떻게든 청자들과 소통하려고 성실히 노력했다.

2011년 6월 9일 2년 만에 그가 정규 2집 앨범을 내놓는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와 검정치마도 곧 2집을 준비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흥미로운 승부가 펼쳐지는 와중에, 작년 여름 그를 만나 나눴던 이야기를 뒤늦게 풀어놓는다. 한동안 뜸할 때가 아니라면 접하기 힘든 얘기를 들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이다. 이 세상이 영리하고 성실한 사람들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별 일 없이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도 때로 필요한 법이니까….

일시: 2010년 7월 8일
장소: 상수동 카페 괴르츠
질문: 신현준
정리: 정구원, 신현준

은둔의 시간에 해 보는 2년의 회고

[weiv]: 별일 없이 살고 있는 건가요? 은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혹시 붕가붕가레코드의 전략인가요? (웃음)
장기하: 네, 뭐… 은둔은 아니고요 (웃음), 그냥 2010년 들어서 지금까지 공연을 한 번도 안 한 거죠. 무슨 전략은 아니고 지난 해 연말까지 살아보니까 물리적으로 안 되는 상황이더라고요. [KBS 가요대전]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러니까 물리적이라는 게 뭐, 진짜 물리적이라는 게 아니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시점이 오더군요.

[weiv]: 주위에서 많이 물어볼 텐데 2집 준비는 어떤지요?
장기하: 만날 공연하고 다니면 뭘 이렇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가만히 멍 때려야 음악이 나오는데 그럴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은 쉬면서 음악 만들고 있고, 들어갈 곡으로 따지면 대략 절반 정도는 만든 것 같네요. 아직 녹음을 한 건 전혀 없고, 이번에 합주를 재개하면서 신곡 한 곡 정도 해보고 있습니다.

[weiv]: 이미 시간이 꽤 시간이 지났지만 1집에 대해 물어볼게요. 재미없는 질문일지 모르지만, 어떤 곡이 먼저 만든 거고 어떤 곡들이 나중에 만든 건지 알고 싶네요. <싸구려 커피>는 군대 있을 때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장기하: 순서를 정리해보는 건 제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재미없지 않은데요. 제일 처음 만든 건 “달이 차오른다, 가자” 아니면 “느리게 걷자” 둘 중 하나인 것 같고요. “싸구려 커피”와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이 그 다음 비슷한 시기에 만든 것 같아요. 이렇게 네 개가 군대에서 만든 거고, “오늘도 무사히”도 멜로디는 군대에서 만들었어요. 제대하고 나서 “나와”와 “별일 없이 산다”를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고, 그 다음에 “나를 받아주오”를 만들었어요. 나머지는 그 다음이죠. “아무 것도 없잖어”는 싱글 내기 전부터 있었고, “말하러 가는 길”이랑 “그 남자 왜’는 싱글 만들고 나서 만든 거예요. 그 외는 거의 다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weiv]: 군대에 있을 때 작곡을 어떻게 했어요? 악보를 그리기는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든 기록을 해 놓아야 되었을 텐데….
장기하: 저는 악보를 그리면서 작곡을 안 해요. 군대 있을 때는 작곡의 수단이 통기타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만들면서 동시에 외웠어요. 그 다음 부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그 이전 부분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해보기 때문에, 안 외워질 수가 없었어요. 멜로디는 다 머릿속에 있고 가사 정도만 일기장에다 적어놓는 식으로 했지요. 제대하고 나서 곧바로 미디(MIDI)를 배운 뒤부터는 오히려 자동으로 외워지지 않게 되었죠. 기록이 되니까 만들어 놓고 연습을 하는 식이 되었어요. “나와”, “아무것도 없잖어”, “멱살 한번 잡히십시다”, “별일 없이 산다”, “말하러 가는 길”, “그 남자 왜”, “나를 받아주오” 모두 기록을 하면서 만들었죠.

[weiv]: 가사 먼저 써놓고 곡을 만들었나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요? 몇 개 예를 들어줄래요?
장기하: 그때그때 달라요. 가사가 먼저 나올 때도 있고, 멜로디가 먼저 나올 때도 있고. 혹은 그냥 같이 나올 때도 있고. 같이 나오는 경우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경우인데, 뭔가를 끼워 맞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는 것도, 또 가사에 멜로디를 붙이는 것도 뭔가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뜻대로 되지는 않으니까. “달이 차오른다, 가자”는 가사와 멜로디가 같이 나왔고, “아무 것도 없잖어”는 리프가 먼저 나왔어요. 아무 주제 없이 그냥 리프가 나오고, 후렴 부분에서 “다-다-단-”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뭐가 어울릴까 하다가 “없-잖-어-“이렇게 하면 어울릴 것 같았아요. 이렇게 리프에 맞추고 그 다음 주제와 내용이 나왔죠. ‘없잖어’라는 세 글자부터 나오고 그 다음이 나오는 식이었죠.

[weiv]: 군대에서 음악을 들을 환경이 되었나요?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장기하: 사실 군대에서 몇몇 곡을 만든 거하고 군대에서 어떤 음악을 들었느냐 하고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군대에서 만든 곡이든 그 후에 만든 곡이든 간에 제가 노래를 만들 때,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이 아이디어가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든지 ‘스타일을 어떻게 가져가야 되겠다’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눈뜨고코베인을 하면서 형성됐다고 봐야 하겠고요. 군대에서도 전반기에는 딱히 음악을 많이 안 들었죠. 일병 되었을 때부터는 들었던 것 같고 나중에 더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수적으로 많이 들을 수는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MP3 플레이어 반입이 안됐고 정규 CD만 반입이 허용됐기 때문에 몇 개만을 가져와서 [집중적으로] 많이 들었어요. 그게 오히려 좋았죠. 왜냐하면 MP3를 막 들으면 한 개를 여러 번 듣게 되지 않는데, 거기서는 들은 것 계속 들으니까 깊이 들을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때 들은 음악들 가운데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라든지 플레이밍 립스(The Flaming Lips) 등 몇몇 음악들이 인상이 깊이 남았어요.

[weiv]: 정규 1집의 음반 녹음 과정에 대한 기본 정보를 물어볼게요. 어디서 했고, 누가 참여했는지?
장기하: 이 음반은 거의 모든 작업이 술탄 오브 더 디스코 멤버인 나잠수의 쑥고개에 있는 방에서 했어요. 쑥고개 213스튜디오라는 이름은 그 친구의 원룸 방호수가 213호예요. 톤 스튜디오는 홍대앞에 있는 곳인데 드럼 소스와 일부 보컬 소스 몇 곡을 했어요. ‘한 프로당 얼마’해서 이 동네에서 많이들 녹음하는 스튜디오예요. 거기서 몇 개를 받았고, 나머진 다 나잠수 군의 방에서 한 거죠. 본인이 장비를 다 들여놓고 홈 스튜디오를 꾸려 놨어요. 토마토에서는 “아무 것도 없잖어” 뒷부분에 성악같이 나오는 부분을 위해 성악 하는 친구들이 참여한 거죠.

[weiv]: 싱글을 내고 바빠졌을 텐데, 정규 앨범 녹음을 며칠에 걸쳐 했는지 궁금하군요.
장기하: 녹음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다만 싱글을 내고 나서 공연을 또 많이 하면서 드문드문 했던 거죠. 싱글 내기 전부터 1집 작업을 시작을 했거든요. 2008년 5월에 싱글이 나왔고 2009년 2월에 앨범이 나왔으니까, 대략 반년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드문드문 했지만 후반부에 가서 ‘빡세게’ 했죠.

[weiv]: 컴퓨터를 이용한 홈 레코딩의 비중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장기하: 홈 레코딩의 비중이 거의 다죠. 일단은 PC를 기반으로 해서요. 근데 이제 중요한 장비들, 컴프레서라든지 몇 개는 갖다놨어요. 실제 일반 스튜디오에서 쓰는 장비들 일부를 도입하고 나머지 소프트웨어를 대체하는 그런 부분도 있고, 복합적이었죠. 엔지니어와 제가 함께 프로듀싱을 했다고 볼 수도 있고요. 저는 기술적인 부분은 아는 게 별로 없지만요.

[weiv]: 홈 레코딩이었다면, 제작비는 얼마 들지 않았겠네요? (웃음)
장기하: 제작비는 정확한 액수를 말할 수는 없고 많이 들지 않았어요. (웃음). 나잠수의 집이기 때문에 렌탈 개념도 아닌 거죠.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누가 누구한테 투자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팀으로, 그냥 무자본으로 시작을 해서 같이 뭔가를 해보자’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한테 돈을 준다는 개념은 아닌 거죠.

[weiv]: 싱글 발매 당시에는 밴드(얼굴들)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녹음과 공연을 어떻게 병행했나요? 녹음된 사운드를 라이브에서 구현하기가 특별히 어려웠던 적은 없었나요?
장기하: 기본적으로 합주를 하면서 편곡을 완성하고요. 녹음은 합주하면서 한 건 없고 파트별, 트랙별로 녹음한 다음에 해요. 연습은 다 되어 있으니까…. 그 다음에는 뭘 연습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으니까, 연습만 열심히 해서 공연하는 순서가 되는 거죠. 코러스 같은 경우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죠. 한 사람이 코러스 녹음을 한다고 해도 여러 트랙을 덧입혀서 풍성한 한 느낌을 내는 게 일반적인데, 라이브에서는 멤버 수가 두 명, 세 명 이렇게 정해져 있으니까요. “아무 것도 없잖어” 같은 경우에는 성악 4부 멤버들을 불러서 녹음을 하고, 녹음한 것을 다시 여러 번 녹음을 해서 덧입힌 것이기 때문에 열 명 이상이 부르는 효과가 나죠. 그런데 막상 라이브에서 저희 멤버들끼리 하려고 하면 베이스 치는 친구, 기타 치는 친구, 이렇게 두 명이서 하면 전혀 느낌이 다르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저희가 큰 페스티벌에 나간다든가 아니면 단독 콘서트를 할 때는 같이 녹음한 친구들도 와서 협연을 한 적이 있고, 아카펠라 팀과도 한 번 했었고, 보컬 전공한 학생들과도 같이 했었죠.

[weiv]: 그런 점은 있겠지만, 그래도 장기하와 얼굴들의 경우는 레코드와 라이브 양쪽의 차이가 비교적 없는 편인 것 같아요. 몇몇 인디 음반들의 경우, 음반의 사운드는 꽤 잘 나오는데 라이브가 잘 구현되지 못하는 경우를 몇 번 봤거든요.
장기하: 네, 기본적으로 라이브에서 합주할 편곡 형태로 녹음하려 했어요. 그러니까 녹음 기반으로 활동하는 밴드들은 그런 애로사항이 좀 많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자기가 생각하는 음악이 [라이브에서] 구현이 안 되면 신나지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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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을 하고 있네

[weiv]: 앨범 수록곡들 가운데 저같이 나이든 사람은 몇몇 곡들의 경우 레퍼런스가 명백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나를 받아주오”는 송창식, “아무 것도 없잖어”는 배철수,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은 신중현 이런 식으로… 이건 오마주일까요, 패러디일까요?
장기하: 그게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이 음반을 만들 당시에는 ‘한국말로 노래하려면 이런 게 정답이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이 정답을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3대 인물이 송창식, 배철수, 김창완이었죠. 일단 가사 전달이 잘되고, 한국말, 말을 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억양 있잖아요? ‘어떤 의미로 어떤 단어를 말하느냐 했을 때,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에도 드러나는 그런 억양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것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한 보컬리스트들이 그 사람들이다’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갔던 것 같아요.

[weiv]: 한 곡 한 곡에 레퍼런스가 명확해서 앨범 전체의 일관성은 조금 떨어진다는 견해도 있어요.
장기하: 사실 저는 똑같은 이유로 너무 일관적이라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어요. 일관성이 없다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앨범이란 게 일관성이 조금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고 생각을 하는 편이에요. 딱히 너무 일관적인 것 같지는 않아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저것 해 본 것이죠. 아까 ‘정답을 제시했다’라고 말한 생각은 거의 변함이 없는데, 지금은 뭐랄까 영향을 받고 계승을 하되 더 ‘나’다울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weiv]: 본인이 가사 쓸 때 어느 정도 의식을 많이 한 거라고 봐도 되겠네요? 그러니까 일상적인 어법, 말하는 방법이 음악에 담기도록 의식을 많이 했다는 것이 포인트인데 그게 홍대앞에서는 일반적이지는 않아 보입니다.
장기하: 지금 한국에서는 홍대 앞이나 메이저 씬이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지금 영미권 음악이 세계적인 주류고 우리가 그걸 좇아 하려는 입장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영어로 노래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영어권의 뮤지션들을 보면은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배철수 선배님이나 김창완 선배님이 한국말을 대하는 방식이나 미국이나 영국의 모든 가수들이 영어를 대하는 방식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런 면에서 ‘뭘 특이하게 해 봐야 되겠다’는 게 아니라 ‘뭔가를 좀 자연스럽게 해보고 싶다’, ‘상식적으로 해 보고 싶다’는 것이에요.

[weiv]: 맞는 말이네요. 제가 미국에 놀러갔을 때 가게에 무얼 사러 들어갔는데 아프리칸-아메리칸이 말을 하면 어떨 때는 랩으로 들렸어요. (웃음)
장기하: (웃음) 그렇죠, 그러니까 그 말투가 그대로 랩으로 나온 것이겠죠.

[weiv]: 랩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얘길 하자면, ‘싸구려 커피’에 대해 많이들 물어봤을 텐데, 그 랩이라고 한 부분은 영향이 다소 불분명해요.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영감이 떠올랐다든가 그런 게 있나요?
장기하: 그것도 따지고 보면 아까 말한 점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예요. ‘한국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억양이나 음의 장단, 뉘앙스 등을 작사 및 작곡시 최대한 반영시켜 그 자체를 음악적으로 가져간다’는 게 제 모토였으니까요. 그것을 좀 더 노래보다 말에 가깝게 하면 그렇게 표현되는 거죠. 그러니까 랩이라는 게 보통 음정이 불분명하고 리듬이 있는 거잖아요. 전 그것을 한 것이죠.

[weiv]: 근데 랩은 한 곡에서만 했잖아요. 그렇죠?
장기하: 아, 저는 그 경계선을 명확하게 두지는 않아요. 예를 들면 “아무것도 없잖어” 같은 것도 제가 생각한 음정은 정확하게 있어요. 그러니까 “터벅터벅 느릿느릿 황소를 타고 왔다네”에서는 3도에서 1도로 진행하는 건 있죠. 그런데 ‘아―’하고 이렇게 [명확한 음정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이 음정인 것은 분명한데 ‘아으’ 같이 [불명확한 음정으로] 낸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음가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다른 노래에도 많아요. “싸구려 커피”의 중간 부분이 다른 노래들에 비해서 약간 극단적인 것일 뿐이지, 제가 다른 노래를 만들 때 가졌던 생각하고 크게 다른 생각에서 나온 건 아니라는 거죠.

[weiv]: 이건 재미로 하는 질문인데, 랩을 하다가 다시 “싸구려 커피를…”로 돌아가는 걸 딱 맞추기 어렵지 않나요? (웃음) 들으면서 박자를 생각하나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박자가 맞아떨어지는 건가요?
장기하: 아, 그거는 제가 정확하게 ‘이 박자다’라는 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렵진 않습니다. 들으면서 박자를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박자를 맞추는 것 둘 다예요. 그래서 박자를 틀린 적은 없고 순간적으로 가사를 까먹은 적은 있어요. 그럴 때는 그냥 웃음으로 때워야죠 뭐. (웃음) 웃음으로 때우면 박수가 나오고 이제 그 다음 부분 부르면 되죠. 밴드가 지켜야 될 박자는 명확하니까 그 위에서 제가 잘하면 되는 거예요.

[weiv]: 기타 애드립같은 것을 입으로 한다고 봐도 되나요?
장기하: 예, 정해진 기타 솔로 같은 거죠. 원래는 이 부분에 악기 솔로를 할 생각이었어요. ‘그 앞뒤만 만들어 놓고 여기에 무슨 연주를 넣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다가 ‘뭔가 중간에 기타 솔로가 나오면 식상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를 만들고 나서 한 1년 정도 있다가 랩이 들어간 거죠.

1970-80년대의 의미

[weiv]: 앨범 수록곡들 가운데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곡이라던가, 본인이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데 대중은 외면했다든가, 혹은 ‘숨겨진 명곡’이 있다든가 하는 게 있나요?
장기하: 저는 대중이 외면했다고 생각하는 곡은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전 이 음반이 제가 생각하기보다 훨씬 더 많이 팔렸기 때문에, (웃음) 그리고 다 명곡이고요. (웃음) 굳이 꼽으라면 “별일없이 산다” 정도? 애착은 [각 곡들이] 거의 오차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비슷한데, “별일 없이 산다”가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곡이에요. 디지털 음원 순위는 “싸구려 커피”, “달이 차오른다, 가자”, “별일없이 산다” 순이 아닐까 싶고, “나를 받아주오”도 상위권 50%에는 들 것 같은데요. 미미 시스터즈가 나오는 곡은 상위권에 들죠. (웃음)

[weiv]: 작사 문제에 대한 질문이 조금 더 있는데, 음악적 영향 이외에 문학적 영향 같은 게 있었나요? 송골매의 작사가인 이응수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청구영언]을 읽었다고 하던데….
장기하: 책이 작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미친 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의식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요. 송골매라는 밴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렇게 영향을 받았겠죠. 그리고 이미 이제 송골매, 산울림 이런 음악에 뻑이 간 상태에서, 그게 제 머릿속에 상식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지 한참 뒤에 판소리 음반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자람이 누나가 심청가 완창 CD를 제가 군대 있을 때 보내줬어요. 그걸 듣고 ‘내가 1970-80년대 한국 음악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들의 바이블이 여기 있구나’라고 생각한 거죠.

[weiv]: 그런데 한 인터뷰에서는 1970-80년대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게 뭥미’ 그랬다면서요? (웃음)
장기하: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죠. 그 관심은 전적으로 깜악귀와 눈뜨고코베인 때문에 갖게 되었어요. 그 전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나 린킨 파크(Linkin Park)처럼 1970-80년대 한국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어요. 훵키한 걸 좋아했죠.

[weiv]: 당시 캠퍼스에 훵크 밴드가 잇었나요?
장기하: [제가 멤버는 아니었지만] 장난양이라는 이름의 밴드가 있었죠. 아마도 갖고 계실 [밴드 밴드 짠짠]에 수록된 두 곡들[참고: “당돌”과 “넌 너무 재미 없어”]이 있어요. 목말라(조병진), 슬프니(안승현) 등이 멤버였고, (이)자람 누나가 거기서 노래를 불렀죠.

[weiv]: 아, 이자람이 윤시내처럼 부르던 그 곡들이군요!
장기하: 네, 그 뒤에 안승현이 저한테 와서 ‘밴드를 하자’고 해서 ‘아, 나도 이제 훵크 밴드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해서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때 이미 이 사람들은 훵크가 아니라 산울림을 추종하는 스타일로 완전히 변질되어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약간 실망을 하다가 ‘그래도 이 사람들은 나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이니까 열심히 해보자’라고 생각하면서 있다 보니 제가 전혀 몰랐던 음악들을 계속 들려주더라고요.

[weiv]: 눈뜨고 코베인 이야기는 조금 뒤에 물어볼게요. 앞에서 말한 ‘정답 3개’는 이해할 수 있는데, 훵크 밴드를 했다면 이장희나 사랑과 평화의 영향은 없었나요? “한동안 뜸했었지”나 “장미” 같은 사랑과 평화의 곡들은 이장희가 만든 건데…. 아시다시피 이장희의 가사는 ‘구어체’를 활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도 하죠.
장기하: 사랑과 평화의 노래를 이장희가 작곡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사랑과 평화도 눈뜨고코베인 하면서 많이 들었어요. 제가 아까 ‘세 명’이라고 말했지만 이장희 선배님도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건 너”는 [음악여행 라라라][참고: 2009년 7월 29일 밤 12:35에 방송되었다]에서 저희가 연주했어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와 같이 한대수 선배님의 “물 좀 주소”도 같이 연주했고요.

[weiv]: 신중현이나 김민기처럼 ‘큰’ 이름들은 어땠나요? 장기하와 비슷한 세대의 대학생들이 이런 음악들을 어떻게 수용했는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장기하: 김민기 선배님의 음악은 다른 대학생들에게는 영향이 많았지만 저는 많이 안 들었어요. 신중현 선배님의 경우는, 저는 사실 “‘우리 지금 만나” 같은 경우 완전히 신중현과 엽전들의 오마주나 마찬가지고, 그래서 만들어놓고 ‘너무 오마주인가?’ 싶어서 조금 망설인 측면도 있어요. 저는 신중현과 엽전들을 들으면서 ‘이런 것에다 힙합을 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리쌍에서 연락이 와서 ‘이번이 내가 해볼 기회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랩을 꼭 하진 않아도, 개리의 랩을 워낙에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절호의 기회다’라고 생각해서 마음먹고 했던 거죠. 신중현 선배님의 음악이 훵키하게 가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랩에 굉장히 잘 어울려요. 특히 엽전들 시절의 음악이 그렇죠. 제 머릿속에서는 거의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과 비슷하게 분류를 해요. 펜타토닉으로 유니즌을 가는 것도 비슷하고.

눈뜨고코베인과 사회학과 3학년생

[weiv]: 그럼 대학시절 이야기 몇 개 더 물어봐도 좋을까요? 메아리나 축하사는 송재경과 윤덕원이 잘 이야기해주었는데, 사회학과 학생 장기하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장기하: 저는 메아리도 아니고 축하사도 아니고 3학년 1학기까지 사회학과에서만 놀았죠. 관악에서 과로 치면 제일 삭막한 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근데 저희끼리는 삭막하다고 생각 안 했어요. 외부에서 보기에는 꼴통 운동권이었고요. 너무 하드코어 같은 개념이 있었겠지만요. 그런데 저는 그런 문화를 전혀 몰랐는데, 신선하고 좋았어요. 술도 많이 먹으니까 거기에 빠져서 2년을 거기에 올인을 했어요. 그때까지는 밴드 관련된 건 아무것도 안 했고 민중가요만 불렀죠. 저는 민중가요 하는 분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민중가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관련된 건 아무것도 안 했다고 생각을 하죠. (웃음) 왜냐하면 별로 음악적이라기보다는 메시지적이기 때문에. 노래패는 민중가요를 합주도 하고 음악적으로 접근을 했겠지만, 저는 노래패도 아니었고 그냥 과방에서 기타를 친 게 전부였고요.

[weiv]: 2000년대 초 관악에서 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홍대앞에 와서 기획력이나 전략이 좋아 보이네요. 그게 캠퍼스 문화에서 기획력을 키웠기 때문일까요? 장기하의 경우 본인이 기획가/전략가라고 생각하세요?
장기하: 저는 ‘쓱쓱쓱쓱 재밌게 짜가지고 짠!’하는 것을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 맞고요. 그러니까 음악적인 가치를 벗어나는 기획가/전략가는 아니지만, 그 내부에서는 기획가/전략가가 맞아요. 어떤 차이인지 아시겠죠? 음악적으로 양보해가면서까지 전략을 짜고 싶은 경우는 없고 그런 사람도 안 좋아하는데, 음악을 잘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는 재미있게, 쓱쓱쓱 머리를 써서 많이 하는 스타일이죠. 음악이 나올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제 경우는 그게 당시 대학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학예회에 나가서 연극하는 것도 좋아했고, 교회 다닐 때도 연극하고 프로그램 짜서 하는 일을 좋아했어요. 사회학과에서도 문화제 같은 걸 하면 뭔가를 재미있게, 웃기게 하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이게 조금 재미가 없어질 때 눈을 돌려 보니 깜악귀가 있었던 거죠. 메아리도 그때 민중가요 벗어나서 재미있게 해보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고요. 제가 3학년 때니까 2002년이네요.

[weiv]: 눈을 돌린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주신다면…?
장기하: 아, 눈을 돌렸다기보다는, 제가 사회학과에서는 잘 없을 만한 걸 했어요. 아무래 밴드라는 게 있었는데 음반은 없는데 떠도는 음원이 있고 그때 했던 곡들 중 하나가 여성주의 노래책에 실렸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는 애들이 과 애들밖에 없었는데, 밴드는 무조건 시작을 해야 되겠고 하니까 애들한테 악기를 가르치고 제가 드럼을 치고 노래 만들고 작사를 같이 해서 춤추는 애들 세 명이랑 이상한 춤 추고 공연했거든요. 관객도 과 애들만 모아놓고 하는 공연에 게스트로 붕가붕가 중창단을 초청했어요. 붕가붕가 중창단이 한창 때 학내 집회에서 재밌는 것을 한 거죠. 그때 거기 멤버가 고건혁(곰사장), 안승현(슬프니), 이기타(이정수)였어요. 그때 그쪽에서 저희를 보고 ‘사회학과는 다 꼴통 분위긴 줄 알았더니 애들이 춤도 추고 이상한 걸 하는구나’라고 생각해서 손을 뻗은 거죠. 사실 저는 음악을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쪽에선 오히려 ‘골 때리는 걸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렇게 만난 게 시작이 된 거죠.

[weiv]: 그 뒤에 홍대앞으로 와서 느꼈던 점은 어땠나요?
장기하: 눈뜨고코베인을 하기 전에 2002년 초에는 홍대앞에 대해 굉장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어요.

[weiv]: ‘와 보니까 실망스럽다’라고 이야기해주면 글쓰기 좋은데…. (웃음)
장기하: 실망스럽진 않았고요. 그때 저는 아예 프로 드러머, 연주를 진짜 잘하는 사람이 꿈이었어요. 그 때문에 ‘아, 참 잘하는 사람들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죠. 드럼을 잘 치는 밴드와 드럼 못 치는 밴드로 구분하고 다녔어요. 사실 컨텐츠에 있어서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드럼을 더 잘 쳐야 되는 것이었지만, 눈뜨고코베인이 정말 독보적이고 창의적인 음악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어요. 그 점에 있어서 따라 올 밴드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좋아하는 밴드들이 있었죠. 그 당시에 위스키리버, 피터팬 컴플렉스, 아마츄어증폭기 등등.

[weiv]: 근데 그때 눈뜨고코베인은 홍대앞에서 활동을 하기는 하는데 인디의 주류는 아닌 것 같은 인상이 있었어요.
장기하: 2002년부터 2004년까지 2년 내내 재머스에서 연주를 했는데, 홍대앞에서 주류였던 적은 없었죠. 간단히 말하면 사교성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어요. 저는 되게 교류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깜악귀나 이런 사람들은 ‘정말 좋은 음악 하는 사람 아니면 술 마셔봐야 뭐하겠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웃음) 그리고 성에 차는 음악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이런 얘기를 하면 또 눈뜨고코베인의 이미지에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웃음)

[weiv]: 그 뒤 군에 입대했고 거기서 칼을 갈고 노래를 만들어서 제대하자마자 싱글을 낸 셈이군요…. 앞으로 활동 계획은 어떤가요?
장기하: 일단 작년에 이어서 지산 밸리 페스티벌에 나갈 거고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도 연주할 계획이 있어요. 나머지는 계획 중이고. 앨범은 아무래도 내년이 되어야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weiv]: 2집에 대한 컨셉이 어떤 건지 추상적으로라도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장기하: 이미 얘기한 것도 있는데, 아마 ‘포크 록’이라기보다는 ‘그냥 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1집 활동을 하면서부터 계속 했던 얘긴데, 딱히 통기타란 악기에 굉장한 애착이 있다거나 포크라는 장르 자체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 저 혼자 음반을 다 만들 생각으로 방에서 연주하기 수운 게 통기타였던 거였죠. 우리의 장르가 포크 록이라고 말하고 다닌 것도, 만들다 보니까 그리고 종합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포크 록이] 되었던 거죠. 1집 활동을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제는 나보다 훨씬 더 연주를 잘하는 멤버들도 있고, 더 로킹한 밴드 사운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weiv]: 2010년 하반기에는 다시 무대에 선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그럼 2집이 나올 때가지 기다리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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