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0312265148_1_rstaryhj_59_20131204174102들국화 | 들국화 | 들국화컴퍼니 제작, 로엔 엔터테인먼트 배급, 2013

 

전설은 자주 귀환하지 않는다

27년 만에 주축 멤버 3명이 재결합하여 만든 들국화의 앨범에는 타이틀이 없다. 1995년에 발표된 들국화의 3집 앨범을 고려한다면 4집 앨범이겠지만, 이미 ‘몇 집’이라는 개념은 없다. 그래서 앨범 타이틀이 없다. 몇 달 전 주찬권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들국화의 주축 멤버들이 다시 모이는 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블CD 포맷으로 발표된 이 앨범에서 첫 번째 CD는 새롭게 창작한 다섯 곡과 함께 국내 음악(가요)과 외국 음악(팝)의 고전을 각각 두 곡씩 수록하고 있고, 두 번째 CD는 들국화의 고전을 재해석하여 다시 녹음한 ‘리메이크’를 수록하고 있다. 신곡이 양적으로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음반이 단지 ‘새 앨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잠시 평가를 유보해보자.

먼저 CD 1. 다섯 곡의 창작곡은 한편으로는 지속되는 삶에 대한 축복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삶에서 겪는 슬픔을 담고 있다. 물론 두 정서는 때로 섞인다. 앨범을 여는 “걷고 걷고”(전인권 작사·작곡)은 여러 면에서 들국화의 선포였던 1985년의 “행진”과 대비된다. 결연한 의지로 가득찬 20여 년 전 ‘진격’의 들국화의 걸음은, 여유로워졌지만 여전히 당당하다. 이는 젊은 시절의 까칠하고 날카로운 톤이 되살아나면서도 풍성하고 넓게 변환된 전인권의 목소리로도 확인된다. “노래여 잠에서 깨라”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는 절규로 ‘로킹(rocking)’한다. 최성원이 작곡한 곡(작사는 전인권) 가운데 가장 거칠고, 강력하고, 묵직한 곡이다.

앞의 두 곡이 ‘건재’와 ‘재출발’을 알린다면, 중반에 배치된 “재채기”와 “하나둘씩 떨어져”는 앨범의 정수다. 술병을 든 사람이 휘청거리면서 부르는 듯한 “재채기”는 톰 웨이츠(Tom Waits)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가 소주에 취해서 부르는 듯 진하고 격한 감정을 토한다. 고(故) 주찬권이 작곡한(작사는 전인권) 에픽 발라드(epic ballad) “하나둘씩 떨어져’에서의 절창은 ‘떠나 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보편적 테마를 끝까지 밀어붙여 그 의미를 넓게 확장시킨다. 주찬권의 죽음이라는 컨텍스트로 인해 슬픔과 그리움은 배가된다. 앨범 틈새에 배치된 조동진의 “겨울비”와 김민기의 ‘친구”가 들국화의 뿌리인 두 선배에 대한 오마주인 것은 당연하지만, 이 노래 역시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 곡들에서 전인권의 목소리가 젊은 시절 까칠한 고음의 질감을 찾은 것은 자연스러우면서 흥미롭다. 보너스 트랙을 제외한다면 첫 번째 CD는 최성원의 나긋한 독백 “들국화로 필래”로 끝난다. 어쿠스틱 기타가 이끄는 아름다운 선율은 ‘제주도의 푸른 밤’이 그저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음을, 그리고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선배가 후배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를 담고 있다.

CD 2에서는 들국화의 명곡들이 시간의 풍상을 거친 뒤 새롭게 재탄생한다. 들국화의 이름을 달고 나온 곡들로는 1집 앨범(1985)에 수록된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사랑일 뿐이야”, “매일 그대와”, 2집 앨범(1986)에 수록된 ‘또다시 크리스마스”, “제발”이 선곡되었다. 젊은 시절에 녹음한 곡들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탓에, 노병(老兵)이 다시 녹음한 결과를 듣기 전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는 청자가 있었을까.

그렇지만 음반을 들으면 이런 불안감은 사라질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의 패기와 열정은 4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거기에 원숙과 여유를 더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전인권의 목소리는 젊은 시절의 까칠함과 날카로움을 되찾음과 동시에 그때는 미처 확보하지 못했던 넉넉함과 풍성함을 갖추고 있다. 감전(感電)되는 듯한 느낌을 안겨주는 몇몇 대목에서의 절창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선 그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명창(名唱)’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인권의 노래가 들국화의 트레이드마크이긴 하지만 그 전부는 아니다. 2012년 재결성한 이후, 공연을 계속하면서 다듬어진 원작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번의 레코딩에 녹아 있다. 여기에 하찌, 함춘호, 한상원(이상 기타), 정원영, 김광민(이상 키보드), 송형진(플루겔혼, 트럼펫) 등 일급의 세션이 가세하여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 오리지널 버전의 긴장감과는 또 다른 맛을 풍긴다. 전반적으로 템포가 조금씩 느려졌지만, 더욱 풍부하게 표현된 소리가 건축되고 있는 것이다.

전인권과 최성원이 솔로로 발표한 음반들에 수록된 곡들이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녹음되었다는 것도 깊은 의미를 갖는다. 전인권의 곡으로는 1집 앨범(1988)에 수록된 “사랑한 후에”, 전인권의 3집 앨범(2003)에 수록된 “다시 이제부터”, 전인권의 4집 앨범(2004)에 수록된 “걱정 말아요 그대”가 선곡되었고, 최성원의 곡으로는 1집 앨범(1988)에 수록된 “제주도의 푸른 밤”, “이별이란 말은 없는 거야”가 선곡되었다. 각각 솔로로 발표한 곡들이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연주될 때 만들어지는 의미와 감흥은 남다르다. 그동안 이들 각자가 거쳐온 인생의 굴곡,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이들 앞에 모여선 오랜 팬들의 삶의 편린이 만났을 때, 이 곡들은 단순한 노래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들국화가 짧은 커리어를 마감하고 솔로 아티스트들로 활동하던 당시, 많은 팬들은 그들의 솔로곡들이 들국화의 노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바람이 드디어 이루어졌고, 음악적 완성도를 따지기에 앞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음악을 들어보면 확실히 혼자 노래했을 때의 고독한 느낌과 다른 든든한 케미스트리를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들국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신비로운 시너지에 있을 것이다.

이 앨범을 통해 들국화는 단지 건재할 뿐만 아니라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찬권의 허망한 죽음으로 원년의 주역들이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는 시점에 만들어진 이 음원들은 문자 그대로 소중한 기록(recording)이다. 작금의 유행이나 기호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외부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부르는 것은 들국화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최고의 전성기를 지나보낸 아티스트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음악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이 글을 쓰는 사람만의 몫은 아니다. | 신현준 hyunjoon.shin@gmail.com

* 이 글의 다른 버전은 들국화 앨범의 ‘보도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수록곡

Disc 1
1. 걷고 걷고
2. 노래여 잠에서 깨라
3. 겨울비
4. 재채기
5. 하나둘씩 떨어져
6. 친구
7. 들국화로 필래
8.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Bonus Track] 9. As Tears Go By [Bonus Track]

Disc 2
1. 행진
2. 그것만이 내세상
3.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4. 사랑한 후에
5. 제주도의 푸른 밤
6. 또다시 크리스마스
7. 사랑일 뿐이야
8. 매일 그대와
9. 다시 이제부터
10. 이별이란 말은 없는거야
11. 제발
12. 걱정말아요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