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산다. 살면서 무언가를 포기하기도 하고, 포기해야만 할 것 같지만 그냥 계속 하기도 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도 하고, 선택할 겨를도 없이 휩쓸려가기고 한다. 결국, 인생은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인생에서 ‘선택’이라는 말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에게 선택이란 고작, 같은 수능 점수대에서 어느 대학을 갈 것인가, 이름있는 대학의 나쁜 과를 갈까 약간 떨어지는 대학의 좋은 과를 갈까, 비슷한 연봉대의 직장 중 어느 곳이 보너스를 많이 주는가, 정도의 의미다. 물론 100% 주체적인 선택이란 있을 수 없고, 반대로 100% 타의에 의한 선택도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대부분 사회적인 압박에 휩쓸리는 와중에 아주 조그마한 선택들을 하며 사는 것 같다. 돌아보자. 과연 당신은 얼마나 많은 갈림길에서 주체적으로 선택을 하며 살아왔는가? 드디어 사운즈 오브 뉴욕의 첫번째 인터뷰다. 인터뷰의 주인공은 올리버 액크만(Oliver Ackmann)이다. 그는 뉴욕의 노이즈 락 밴드 어 플레이스 투 베리 스트레인저스(A Place To Bury Strangers)의 기타/보컬을 맡고 있다. 인터뷰 기사를 뜬구름 잡는 듯한 인생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이 인터뷰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선택의 문제에 할애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걸 직접적으로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인터뷰를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인터뷰를 하면서 계속 궁금해서 파고들었던 것이 그 부분이었다. 올리버는 대부분의 한국인 보다 훨씬 더 주체적인 선택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분명, 성공적인 뉴욕 인디밴드이자 수공예 기타 이펙터 메이커라는 직업은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그도 똑같이 선택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도 똑같은 인간일진대, 어떻게 대부분의 우리가 할 선택과는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왔는가? 원래 성격이 그런가, 아니면 사회적인 환경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의지인가. 그냥 궁금했다. 왜 그런지. 특히나 밴드를 하자마자 스타덤에 오른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밴드를 해온 후에 자리를 잡았기에 더욱 그랬다. 어떻게 그걸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당연히, 음악 이야기도 있다. 그에게는 인생이 음악이고, 음악이 인생이기에 둘을 따로 구분한다는 것도 웃기다. 인터뷰를 보면, 그에 대해서, 그의 인생에 대해서, 그의 음악에 대해서 좀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터뷰가 좀 길지만, 읽다보면 분명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보자. — 인터뷰는 올리버의 집안 내부를 탐방했던 집구경 기사 <http://www.scatterbrain.co.kr/headline/1932> 에서 나왔던 그의 집 겸 공연장 겸 이펙터 회사 겸 녹음실 겸, 하여튼 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집 구경을 하고 뉴욕에 언제왔는지, 왜 왔는지,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 처음인지(처음이란다),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는 해봤는지(여러번 해봤단다, 쳇)에 대한 수다를 꽤나 오랫동안 떤 후에 준비해 온 첫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로그스(이하 로):이미 수백번 정도 이야기를 했겠지만, 어 플레이스 투 베르 스트레인저스(이하 APTBS)를 하기 전에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짧게 나마 말해달라. 올리버(이하 올): 음악적 인생? 아니면… 로: 뭐, 개인적인 인생이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다다르게 됐는지가 궁금한거다. 올: 좋다. 이야기는 버지니아의 프레드릭버그라는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다. 난 그 거기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스카이웨이브(Skywave)라는 밴드를 했었다. 지금의 APTBS와 상당히 비슷한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종류의 밴드가 전혀 인기를 끌지 못했고, 이런 밴드를 한다는 게 멍청한 생각이었다. 특히나 남부지역인 버지니아에서는 사람들이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 커버곡 같은 것만 듣고 싶어하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로드 아일랜드에 있는 대학에 갔는데, 그 곳에는 정말로 멋진 노이즈 음악씬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음악적으로 흥미로운 게 많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스카이웨이브를 계속 하기 위해 버지니아로 다시 돌아갔는데, 밴드가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전부터 계속 뉴욕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그 때가 그걸 실현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뉴욕으로 이사를 왔다.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슬로우다이브(Slowdive)류의 밴드를 위해 드러머를 구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래서 “나 슬로우다이브 좋아해. 드럼 칠 줄도 알고”라고 했다. (웃음) 로: 근데 지금 밴드에서 드럼을 안 치지 않나? 올: 맞다. 스카이웨이브에서도 드럼 친 적 없다. (웃음) 로: 그럼 왜 드럼 치겠다고 했나? (웃음) 올: 모르겠다. 그 당시에 드럼치는 일에 푹 빠져있었다. 그래서 연습을 조금만 더 하면, 잘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한 번 합주했을 땐가? 바로 드러머에서 잘리고 기타를 치게 되었다.(웃음) 로: 그게 드럼을 못 쳐서 그런건가, 아니면 기타를 잘 쳐서 그런건가? 올: 내 생각에는 그 친구들이 내가 드럼을 친다고 한 이후에 스카이웨이브를 한 번 찾아봤던 것 같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기타를 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솔직히 내가 드럼을 못 쳤으니까.. (폭소) 그게 APTBS의 시작이었다. 비록 그 때 나를 드러머로 영입했던 친구들은 예전에 밴드를 나갔지만 말이다. 올리버가 저렇게 얘기하니까 스카이웨이브가 아무것도 아닌 밴드였던 것 같지만, 노이즈씬에서는 소수의 매니아가 있었던 밴드였다. 지난 번에 스카이웨이브 시디를 구할 수 없냐고 물어보신 걸 보면, 스캐터브레인 필진이신 ENTClic님도 팬으로 추정된다. 로: 그럼 스카이웨이브를 몇 년 동안 했던건가? 올: 대충 1994년부터 2003년까지였던 것 같다. 로: 와우. 거의 10년이네. 올: 거의 그렇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있을 때 4년 정도 쉬었으니까… 잘 모르겠다. 우리는 밴드의 마지막쯤에 되서야 좀 밴드를 진지하게 했던 것 같다. 진지하게 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줄은 몰랐던 거다. 우리는 고등학교 친구들이었고 젊었으니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뭘 해야하는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웃음) 한번은 전화번호부에서 공연장과 라디오 방송국 주소를 다 찾아서 카세트를 보낸적이 있었다. 그걸 하기 위해 돈도 많이 모아야 했고, 테이프 복사를 하기 위해 시간도 많이 들였었다. 그 때 아마 한 몇 백달러쯤 들였을거다. 그래서 몇백개의 카세트를 모두 다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가 카세트를 들고 와서 이상하다고 말하길래 한 번 틀어봤더니, 테이프에 아무것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폭소) 그래서 다른 테이프도 확인해봤는데 거긴 음악이 좀 들어가 있긴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린 수백개의 빈 카세트를 ‘우리 밴드 음악을 들어보세요’라고 말하면서 사람들한테 보낸 셈이 되어버렸다. (웃음) 그만큼 우린 개념이 없었던 거다. 수 개월간 알바를 해서 번 돈이 저렇게 날아갔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로: (웃음) 그러니까 정말 힘든 시기였구나… 올: 아, 정말 힘든 시기였다. 확실히. (웃음) 로: 버지니아는 뉴욕과 완전히 다른 환경이지 않나? 난 이번에 미국에 처음 와본 것이기 때문에, 미국하면 뉴욕밖에 모른다. 올: 와우… 버지니아와 뉴욕은 정말 완전히 다른 곳이다. 다른 도시들도 좋은 사람들, 맛있는 음식들 같은 공통점은 있겠지만 중요한 차이는 삶이 훨씬 더 느리다는 거다. 하루가 정말로 느리게 지나간다. (웃음) 그러니까 거의 항상 심심하다. 그래서 처음에 음악을 시작하거나, 기타 이펙터에 빠지는 것 같이 혼자 하는 일을 하기에는 최적에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 물가가 싸다. 난 버지니아에서 한 창고를 빌려서 살았는데, 거긴 이 집보다 두세배는 넓었다. 그 월세가 50만원이었다. 그리고 그 곳을 연습실로 사용하는 밴드가 두세개 있었는데 그 연습비만 받아도 월세를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난 그 넓은 공간에서 공짜로 산 셈이다. (웃음) 그 곳에서 난 밤이면 내가 하고싶은 걸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밖에서 쓰레기를 모아서 그걸 이리저리 만져서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든지… (웃음) 정말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실험을 해보고 내가 정말 뭘 해보고 싶은지 알아보는 시간을 보냈다. 일단 싸게 살 수 있으니까 (웃음) 한국에서 저런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은, 특히 요즘에는, 거의 없을 거다. 학원가야지 무슨 쓸 데 없는 호작질을 하고 자빠졌나. 로: 왜 서부지역으로 가지 않고 뉴욕으로 이사를 왔나? 올: 물론 난 서부지역의 도시듣로 좋아하지만, 뉴욕에서는 음악적으로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로스 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만 봐도 뉴욕과는 다른 분위기다. 더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다. 뉴욕은 정말 거칠고, 사람들한테 까이기 십상이며,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정말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곳이다. 대중교통이 정말 잘 되어 있고. 그래서 뭔가를 시작하거나, 창조적인 일을 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멋진 도시다. 로: 뉴욕에 온 이후로 주변의 밴드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나? 올: 어떤 영향이냐에 따라 다르다. 음악적인 측면의 영향이라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에너지나 분위기의 측면이라면 분명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주변에서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지니까. 음악적으로도 물론 영향을 받았을 거다. 당연히 주위의 밴드들과 교류를 하면 영향을 받게 되니까. 난 내 집이 공연장이기도 해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집에 있다가 멋진 음악소리가 들리면, 바로 가서 볼 수 있다. 게다가 공연이 거의 매일 열린다. 여기 공연 부킹을 맡은 친구는 항상 멋진 공연을 만들어낸다. 언제나 환상적이다. 또한 뉴욕에는 엄청난 언더그라운드 씬이 형성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냥 만든 쿨한 불법 공연장도 정말 많다. 길거리에서 뭘 하다가 경찰한테 걸렸을 때 그냥 학생증 한 번 보여주면 그냥 봐준다. 그럼 그냥 ‘그래. 다음부턴 하지마’ 하고 넘어간다.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라는 거다. 원하면 그냥 돌을 집어다가 남에 집 창문에 던져버릴 수도 있다. (웃음) 그래도 뭔가 큰 문제는 일어나진 않을거다. 다양한 일을 하는 많은 아이들이 있고, 예술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많고, 쉽게 싸게 빌릴 수 있다. 시장이 바뀌고 나서부터 도시를 정비한다면서 좀 없어지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정말 멋진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경찰들만봐도 뭘 규제하려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존중하고 서포트하는 방식으로 일한다. 어쩌면 뉴욕에 너무 범죄가 많아서 시끄러운 하우스 파티에 간섭할 시간이 없는 것일수도 있겠다. (웃음) 올리버에 따르면 저게 뉴욕에서 멋진 밴드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바탕이란다. 근데 우리는 1인 시위해도 불법이란다. 아, 어쩔거냐. 로: 뉴욕에 대해서는 이따가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 밴드 이름은 어떻게 정했나? 올: 그냥 장난으로 만든거다. (웃음) 예전 드러머가 어떤 시에서 이 말을 봤고, 쿨하다고 생각해서 이름으로 정했다. 로: 이름이 좀 길다. 올: 맞다. 근데 뭐 신경 안 쓴다. (웃음) 베이스 치는 친구가 그걸 전단지에 그냥 넣는 바람에 그걸로 가기로 했다. 그 당시에 나는 밴드를 만든다기 보다는 그저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름 따위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뭐 어때’라는 심정이다. (웃음) 로: 근데 진짜 좀 멍청해 보이는 밴드 이름도 있지 않나? 올: 아 물론 그렇다. (웃음) 근데 그건 음악이 좋으면 다 멋져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스투지스(The Stooges)같은 이름도 얼마나 웃기나? 그래도 음악이 멋지니까 이름도 멋져보이지 않나. 로: APTBS는 종종 ‘뉴욕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 심지어는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어떤 글에서 너무 시끄러워서 일어난 에피소드도 읽었는데, 그게 CMJ 공연이었던가? 그 공연이 너무 시끄러워서 경찰이 오고 그랬다는… 올: CMJ 맞다. (웃음) 신고를 받고 경찰이 왔었는데, 난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경찰은 공연을 중단시키려고 했던 모양인데, 경찰 중 한 명이 “이 밴드 골 때리니까, 한 곡만 더 연주하게 해주자”라고 해서 한 곡 더 연주하고 공연을 끝냈다. (웃음) 로: 난 공연에 못 가봐서 정말로 APTBS가 “가장 시끄러운 밴드”인지 모르겠다. 정말 그런가? 올: 아마 아닐거다. 소리를 크게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앰프를 많이 갖다놓으면 된다. 어쩌면 소리가 큰 것처럼 느끼는 걸 수도 있다. 실제로 가장 시끄럽지는 않을거다. (웃음) 로: 그러니까 실제로 그렇게 시끄러운 게 아니라, 느낌이 그렇다? 올: 그런 것 같다. 솔직히 좀 시끄럽긴 하다. (웃음) 그렇지만 가장 시끄러운 밴드는 아닐거라는 거다. 잘 모르겠다. 내가 공연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웃음) 내가 정말로 시끄러운 밴드의 공연을 볼때면, 속으로 ‘우리가 저 정도로 시끄럽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긴 한다. (웃음) 어떨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걸 좋아한다. 전에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을 귀마개 없이 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귀마개 없으면 보기 어렵다고 그러던데 나한테는 그 정도는 아니더라. 물론 시끄러웠지만, 좋은 의미의 시끄러움이었다. 로: 그래도 그런 별명을 가지고 있는게 사람들한테 밴드를 소개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나? 올: 오히려 꺼리게 만드는 거 아닌가? (웃음)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겠지. 별로 신경 안 쓴다. 원래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을 한다. 음악이 마음에 든다느니, 안 든다느니… 난 별로 신경 안쓴다. 싫어하고 싶으면 마음껏 싫어하고, 좋아하고 싶으면 마음껏 좋아해라. 물론 친구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기쁘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음악을 만드는 것도 멋지다고 생각한다. 로: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확실히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의 영향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그런 사운드에 빠지게 되었나? 올: 가장 큰 건 능력의 부족이었던 것 같다. 기타나 베이스 같은 악기를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노이즈로 음악을 만드는 쪽으로 이끌었다. 처음에 디스토션이 달린 싸구려 콤보 앰프를 받았는데, 부모님이 집을 비우면 볼륨을 끝까지 키운 후에 혼자서 미친 짓을 많이 했다. 앰프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음파가 날 흥분하게 만들었다. 앰프가 망가지든, 소리가 흔들리든 상관 없었다. 그냥 그 느낌이 좋았다. 아름다운 소리다. (웃음) 그냥 그 사운드가 나와 매우 잘 맞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을 것 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런 노이즈가 의도를 가지고 연주하는 것 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올리버의 노이즈에 대한 사랑은 앰프로 부터 나오는 노이즈라는 걸 처음 들었던 순간에 이미 생겼던 거다. 말하자면 첫눈에 반한거다. 비록 상대가 노이즈이긴 하지만. 로: 지금 3인조 밴든데, 곡에 좀 더 레이어를 넣기 위해 멤버가 하나 더 필요하지 않나? 올: 그럼 음악이 너무 지나치게 커질거다. 지금 상태로도 우린 종종 너무 막나가서 스스로를 억제할 필요성을 느낀다. (웃음) 이미 음악이 상당히 빡빡하게 짜여있어서, 오히려 미니멀한 방향으로 나아가 보려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인식하기도 전에 사운드의 회오리에 빠져버린다. (회오리 소리 같은 노이즈 냄) 로: 처음에 APTBS의 음악을 들었을 때 음악이 너무 빡빡해서 3인조라고 생각 안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3인조더라. 라이브 때 불편한 점은 없나? 올: 레코딩과 라이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연주한다. 레코딩을 할 때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어떤 곡은 10개의 기타트랙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차피 디지털 레코딩이니까 상관없다. 라이브 레코딩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난 음악을 어느 누구보다도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기 때문에 디지털 레코딩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만족스러운 음악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어를 많이 입히고, 다른 사운드를 시험해보고 그러는 것이다. 로: 그럼 그런 곡들을 라이브에서 어떻게 재현하나? 올: 전혀 다른 방식이다. 라이브에서는 사람들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컨트롤할 수 있다. 스피커도 여러개고, 공간도 다양하다. 그래서 볼륨이나 다이나믹으로 순간순간을 지배할 수 있다. 기타소리를 이 쪽 스피커에서 나왔다가 다른 스피커에서 나오게 하거나, 고요한 노이즈에서 미친듯이 시끄러운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많은 것들을 통해서 순간을 흥미롭게 만들 수 있다. 시디에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지만, 라이브 만큼의 충격은 담기가 어렵다. 마치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자신의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직접 만든 음식을 먹게 하고, 직접 고른 음료수만 마시게 하는 느낌이랄까. 그는 라이브를 사운드 환경 컨트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아주 독특한 시각이다. 로: 작은 클럽에서 부터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 투어에서 처럼 스타디움에서도 공연을 해봤는데, 어디가 더 마음에 드나? 어떤 장소가 밴드의 사운드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나? 올: 난 좀 특이한 장소를 선호하는 편이다. 창고나 좀 더러운 장소들… (웃음) 애들이 좀 재밌게 놀 수 있는 곳들이 좋다. 스타디움 같은 곳도 재밌지만, 너무 크다는 느낌도 든다. 스타디움에서 공연하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든다. 농구 경기장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하는 건 음악의 본래 목적에 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웃음) 재밌으면서도 이상하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재밌어하면 좋은 거 아닌가. (웃음) 공연장에서 같이 공연하는 밴드들끼리 이야기도 나누고, 관객들과도 얘기하고 그런 걸 좋아한다. 최근에는 그런 문화가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로: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면서, 작은 동네에 어떻게 그렇게 오랬동안 살았나? 올: 잘 모르겠다. (웃음) 그 때는 그게 전부인줄 알았다. 내가 대학을 위해 다른 곳에 갔다가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갔을 떄, 비로소 그 곳이 내가 별로 내가 좋아할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친구들 만나서 놀고, 혼자 재밌게 논다. 너무 심심해서, 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그 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들이다. 살면서 이런 걸 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로: 피치포크 같은 매체에서 밴드에 호의적인 관심을 보인 후에 인지도가 급상승했는데 어떤 기분이었나? 피치포크는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변화를 느꼈나? 올: 피치포크의 영향력은 정말 크다. 우리의 음악을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피치포크가 앨범에 좋은 점수를 주고 나서 부킹 에이전트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전에는 우리가 직접 공연장을 알아보고 예약을 해야했지만, 이제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해서 그 일을 해주게 된거다. 클럽에 전화를 한다던가, 신경 날카로운 로드 매니저와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너무 인생이 편해졌다. 그만큼 많은 가능성이 열린 거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훨씬 더 쉬워졌다. 정말로 급작스러운 변화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돈을 많이 벌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밴드에서 재미없는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더 이상 밴드에서 비즈니스적인 측면을 직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뻤다. 로: 그 때 그런 일이 벌어질거라고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는 말인가? 올: 전혀 아니었다. 로: 그럼 진짜 좀 어안이 벙벙했겠다. 올: 그랬다. 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난 비슷한 음악을 정말 오랫동안 해왔는데, 그 전에는 그렇게까지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래서 심지어 나는 음악을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 밴드로써 그걸 성공이라고 규정하든 뭐든 간에 하여튼 뭐가를 해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특히 2000년, 2001년 무렵에 그랬었다. 우리가 버지니아에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에 2년 내내 마지막 스카이웨이브 앨범에 몰두했다. 그 앨범은 정말로 할 수 있는한 모든 힘을 다해서 작업한 앨범이다. 그러다보니 마지막 무렵에는 앨범을 내고 싶은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더라. 작업을 끝내고 나서 8개월 후에야 앨범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는 내가 음악을 직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재밌으니까 하는 거라고 받아들였었다. 누구든 공연을 제안하면 항상 하겠다고 말하고 그냥 즐기려고 한 거였다. 그래서 뉴욕에서 공연할 때는 일주일에 6번 공연하기도 하고 그랬다. (웃음) 로: 그럼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올: 정말로 그렇다. 이런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내 운명을 결정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노력을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음악을 찾아보고 들어주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이 알려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밴드를 해왔는데 비로소 사람들이 그의 밴드를 알아주기 시작했을 때, 분명히 기분이 좋았을 거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경험을 하는 아티스트들이 몇이나 있을까? 요즘에는 사람들이 피치포크 욕도 많이 하고 그러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거의 없는 아티스트를 음악으로 먹고 살게 해줄 수 있는 매체로서 실제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정말 부럽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게 음악매체가 할 일이다. 로: 작년에 2번째 앨범 [Exploding Head]를 발매했는데, 데뷔 앨범을 내기 전에도 많은 EP를 냈었다. 올: 그랬다. 하지만 그 EP에 있는 곡들이 대부분 데뷔 앨범에 들어가 있었다. 데뷔 앨범은 EP에 있던 곡들을 모아놓은 셈이다. 로: 데뷔 앨범을 내기 전에는 EP도 많이 내고 그랬는데, 데뷔앨범을 낸 2007년과 2번째 앨범을 낸 2009년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곡을 내는 게 뜸했다. 그게 소포모어 징크스 같은 압박 때문이었나? 올: 모르겠다. 사람들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이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웃음) 별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신경 안쓴다. 로: 어쩌면 당신은 오랫동안 밴드 생활을 해왔고, 따지자면 이게 2번째 앨범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올: 정말 그렇다. 나에게는 어쩌면 2번째 앨범이 더 데뷔 앨범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이 앨범을 작업하는데 있어서 특정한 목표와 접근방법이 있었다. 우리는 과거에 어떤 앨범보다도 더 라이브스러운 느낌을 내고자 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앨범을 만들었고, 유명해지거나 하는 여타의 문제에 있어서는 관심이 없었다. 소포모어 징크스 같은 건 전혀 신경 안썼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는 그랬다는 얘기다. 두 앨범 사이에 뭐가 없었던 이유는 그야말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데뷔 앨범이 나오고 나서 바로 투어를 시작했고, 피치포크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이후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공연 할 기회가 훨씬 더 많아졌다. 나는 다른 곳에서 공연하자는 제안에 대해 거절하질 못한다. 공연하는 건 항상 즐겁다. 로: 첫번째 앨범과 두번째 앨범의 가장 큰 차이는 뭔가? 올: 첫번째 앨범은 거의 나혼자 작업한 거였다. 트랙 중 많은 부분에서 드럼머신을 사용했고,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꽤 오랜시간 동안 내가 작업해온 결과물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곡을 연주하게 할 수 있도록 데모로 녹음 해온 곡들이었다. 그런 곡들을 모아서 앨범을 만든 거다. 그 때는 별로 특별히 앨범을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기타를 녹음하기도 했고. (웃음) 2번째 앨범은 비록 작업기간은 수개월밖에 안됐지만, 제대로 앉아서 앨범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시간적인 제약이 있었지만 사운드를 제대로 잡으려고 노력했고, 사운드의 레이어들도 가능하면 최소화하려고 했다. 그래서 녹음하는 과정에 노력과 시간을 많이 들였다. 모든 요소들을 어울리게 만들어보려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 앨범이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로: 그 동안 많은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자랑스럽다거나 애정이 가는 앨범이 있나? 물론 다 마음에 들긴 하겠지만. 올: 아, 이 질문 너무 별로다. (웃음) 음.. 아마 스카이웨이브의 [Synthstatic]일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앨범은 항상 내 마음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게 마지막 스카이웨이브 앨범이기도 하고, 2년간 공들여 만들었던 앨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이후에 6개월인가 있다가 밴드가 해체했고, 그 앨범을 냈던 레이블도 완전히 망했다. 좀 무섭다. (웃음) 그 앨범 전까지는 어떤 프로젝트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였던 적이 없었다. 비로소 그 앨범이 되서야 좀 더 진지하게 접근을 했다. 나에게는 그게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 엄청나게 집중했었고, 앨범을 만들면서 많은 걸 배웠다. 지금 애용하는 사운드 기술이나 영감을 그 때 많이 얻었다. 참고로 스카이웨이브의 나머지 두 멤버는 세레모니(Ceremony)(http://www.myspace.com/ceremony)라는 밴드를 하고 있다. 로: 그렇게 공을 많이 들인 앨범이 대중들한테 관심을 받지 못해서 우울했겠다. 올: 잘 모르겠다. 별로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난 뉴욕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다. 뭐, 우울했을 수도 있고. 어떨때는 난 지금이 더 우울한 것 같기도 하다. (웃음) 당연히 우울하긴 했겠지. 그렇지만 별로 기억은 안난다. 난 옛날 일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런게 뉴욕에 가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는 동기가 되었고, 기쁘게도 난 실제로 그렇게 했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우울한 거 아닌가? (웃음) 좋은 지적이다. 로: 맞다. (웃음) 기타 이펙터 메이커인 데스 바이 오디오(Death By Audio)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보자. 이 메이커에 대한 글을 좀 찾아서 읽어봤다. 전기나 이쪽계통으로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있나? 올: 없다. 로: 그럼 어떻게 이런 걸 만들기 시작했나? 분명 쉽지 않은 일인데. 올: 버지니아에 있을 때 워낙 심심하니까 음악을 만들기 위해 사운드 이펙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내가 앰프를 분해해보고 조립해보고 이리저리 맞춰보는 걸 반복하는 바람에 우리 집에는 항상 쓰레기 더미가 있었다. 1, 2년 동안 그렇게 한 다음에 전기계통의 책을 사서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 이후 실패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가장 기본적인 이펙터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보고 하라고 한다면 페달을 어떻게 만드는지 15분만에 설명해 줄 수 있는데, 그 때는 아무도 나한테 그걸 가르쳐 주지 않았다. (웃음) 그래서 그거 만드는데 수년이 걸렸다. 난 그 때 내가 뭘 하는지도 몰랐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웃음) 하지만 아예 아무것도 없는데서부터 스스로 터득해나갔기 때문에 훨씬 더 이펙터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다. 로: 정말 완전 DIY다. 제대로 레슨을 받은 것도 아닌데… 올: 맞다. 전기에 대한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도서관에서 가서 전기에 대한 책들을 읽기도 했다. 처음에 몇년간 내가 그런 책들을 읽었을 때는 수없이 반복해서 책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웃음) 그래도 뭔가 알아낼 수 있을까 해서 계속 읽었던 거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친구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로: 밴드를 하는 만큼이나 이펙터 만드는 게 재밌나? 올: 그 정도는 아니다. 물론 난 이펙터 만드는 일을 사랑한다. 그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난 음악을 만드는 게 좋다. 그게 아니면 내가 이펙터 페달을 뭐하러 만들겠나. (웃음) 하지만 이펙터를 만드는 건 하루에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정말 재밌는 일들 중 하나다. 그런 일을 내가 직업으로 돈을 벌면서 할 수 있다는게 좋다.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사람들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뭔가가 있다면 다른 일을 해야한다고 해도, 가능하다면 그 일을 계속 이어나가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그 일이 잘돼서 그게 당신의 커리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식탁을 닦는 일을 하거나 해야할 수도 있지만, 그 일을 하면서 느끼는 사랑을 포기하지는 말아라. 그 일을 하는데 가능한 많은 시간을 쏟는 걸 그만두지 마라. 그게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예전에 부모님은 날 실패한 인생으로 여겼을 거다. (웃음) 왜냐하면 대학에 보내서 멋진 곳에 취직할 줄 알았더니… (웃음) 내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 잠깐 장난감을 디자인하는 일을 했었다. 그 때는 부모님이 내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근데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밴드를 하겠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너 대체 뭐하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폭소) 그래서 난 부모님한테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렇게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는 부끄럽고 죄송하고 그랬지만, 지금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하고 노력했던 음악과 이펙터 만드는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세계 어디서든 똑같나 보다. 아닐 것 같지만 나도, 당신도 아마 그렇게 될거다. 그런데 어떻게 이 친구는 그러한 부모님의 무서운 잔소리를 이기고 이런 선택을 했으며, 우리는 그러한 부모님의 무서운 잔소리에 못이겨 저런 선택을 했는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말이다. 그런건 대체 어떻게 하는건가? 로: 하지만 아까 당신도 포기할까 생각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뭔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걸 지속하는 건 정말 어렵지 않나? 다른 애들은 다 취직하고 그러는데… 올: 물론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펙터를 만드는 일이 많이 도와줬다. 예전에는 별로 생각이 없었던 이펙터 회사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분명히 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리를 들어보고 만들어보고 탐험해보는 정말 흥미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뮤지션들이 머릿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사운드로 실제로 구현시켜주는 커스텀 이펙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다른 뮤지션들이 그들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도 재밌었다. 그게 설령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지만, 꽤나 거기에 가까운 2위였던 셈이다. 그렇게 삶에서 내가 사랑하는 2위, 3위, 4위의 일을 하는 것도 괜찮다. 또한 그게 밴드가 자리를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니까 흥미를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 필요하다. 지금은 제품 사진 찍는 일을 하지만, 계속 짬을 내서 찍고 싶은 사진을 찍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갑자기 누가 “보니까 사진 잘 찍는데 나랑 같이 정글에 가 볼래?”라고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당신 인생의 1, 2, 3위는 무엇인가? 로: 만약 평행 우주가 존재하고, 그곳의 올리버 액커맨은 밴드와 이펙터를 만드는 일에 실패했다면 그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올: 잘 모르겠다. (웃음) 아마 영화를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걸 했다면 뭔가 이룰 가능성은 더 적어 보인다. (웃음) 하여튼 뭔가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하겠지만, 정말 우울할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좀 아깝기도 한 게, 난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는데 이걸 전혀 안 써먹고 있다. 어쩌면 그 친구는 누군가의 인공심장을 디자인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웃음) 로: 오, 그거 멋지다. 올: 맞다. 완전 쿨하다. 한 번 해볼까? (웃음) 로: 새로운 이펙터는 어떻게 만드나? 머릿 속으로 사운드를 상상한 후 그걸 재현하는 과정인가? 올: 때마다 다르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새로운 기술이나 칩이 나오면 그걸 가지고와서 이리저리 만져보다고 멋진 사운드를 찾기도 한다. 로: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들어봐야할 뉴욕 밴드들이 있나? 올: 정말 많다. 코인 언더 통(Coin Under Tongue), 그룸스(Grooms), 시스터스(Sisters), 디즈 아 파워스(These Are Powers) 등등… 엄청나게 많다. 사람들은 뉴욕에와서 인디 쇼페이퍼를 받은 다음에 여기저기 공연을 가봐야 된다. 아마 새로운 멋진 밴드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거다. 꼭 뉴욕 밴드들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세상엔 멋진 밴드들이 많다. 난 오랫동안 다른 곳에 있다가 오랜만에 뉴욕에 왔을 때, ‘예! 뉴욕이다!’는 느낌을 받는 것 이외에는 지역주의같은 건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걸 수도 있는데 저기서 디즈 아 파워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데스 바이 오디오 레코드 소속이다. 자신의 레이블 소속 밴드라서 좋다고 하는게 아니고, 좋은 밴드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레이블에 넣었다는 게 맞겠다. 아래는 위에서 올리버가 언급한 쇼페이퍼: [뉴욕 인디 쇼페이퍼] 로: 뉴욕에 사는 것의 장점과 단점이 뭔가? 올: 장점은 언제든 길거리에서 강도를 당할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이 별로 친절하지 않다는 것, 물가가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 도시가 전체적으로 더럽고 공해가 심하다는 것 등이고, 단점은 없다. (웃음)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서울,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막을 내렸다. 어떤가? 재밌었나? 무슨 생각이 들었나?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다. 앞으로도 사운즈 오브 뉴욕은 계속된다. 기대하시라. — [관련 링크] * Death by Audio 기타 이펙터: http://www.deathbyaudio.net <http://www.deathbyaudio.net/> * Death by Audio 공연장: http://www.myspace.com/deathbyaudioshows * Death by Audio 레코즈: http://deathbyaudiorecords.blogspot.com/ * A Place To Bury Strangers 공식 홈페이지: http://www.aplacetoburystrangers.com/ * A Place To Bury Strangers 마이 스페이스: http://www.myspace.com/aplacetoburystrang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