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 | Insatiable Curiosity | 미러볼뮤직, 2011

지옥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히치하이커(The Hitchhiker)를 처음 접한 건 유튜브에 올라온 “The Giant Part 1. Hexameron”의 뮤직비디오를 통해서였다. 괴물이 나타났구나 싶었다. 이제껏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지옥 밑바닥의 소리’를 생생하게 재현해낸 경우를 본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이런 음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평가를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실험적인 음악에 대한 평가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류의 거품이 끼기 마련이니 말이다.

히치하이커의 음악을 한 장르로 규정하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드론, 다크 앰비언트, 현대 클래식, 둠 메탈, 포스트록 등의 장르적 요소가 녹아 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장르로도 함부로 규정지을 수 없는 다양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섣부른 비교의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존 한국 노이즈/익스페리멘탈 씬과의 차이점을 알아보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실험적 음악이라고 해도, 히치하이커에게서는 클래식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피아노 사운드의 활용이나 성악곡을 떠올리게 하는 보컬,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컨셉들은 다분히 클래식적이다. 이런 점에서 히치하이커는 아스트로노이즈, 불길한 저음(Master Musik), 랑쥐(L’ange) 등의 기존 노이즈/익스페리멘탈 뮤지션들, 즉 노이즈 그 자체나 사운드 아트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는 뮤지션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앨범의 첫 곡 “The Giant Part 1. Hexameron”은 거인의 발걸음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노이즈로 시작한다. 그러한 발걸음 소리는 러닝타임 내내 울려 퍼진다. 울부짖는 듯한 심벌 소리가 발걸음 사이사이의 정적을 깬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은 정체불명의 관악기 소리와 섞여 녹아든다. “The Giant Part 2. Gigantes”로 넘어오면, 발걸음 소리는 전장의 북소리와도 같은 야만적인 드럼 비트로 대체된다. 북소리의 공백 사이로는 오르간 소리가 들락날락하면서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앨범의 포문을 여는 이 두 곡은 그야말로 올해의 원-투 펀치라 해도 무방하다. 강렬하고 무자비하다.

정신을 사납게 만드는 고음이 쏟아진 첫 번째 막간을 지나면, 처음으로 목소리와 마주하게 된다. ‘Dies Irae’, 분노의 날. 죽은 이를 기리며 불리는 레퀴엠의 부속가다. 진혼곡에 어울리는 장중한 목소리, 그러한 소리를 뒷받침하는 음울한 피아노와 앰비언트 사운드가 8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다. 다시 정신이 산란해지는 드론 사운드로 넘실거리는 막간을 통과하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록의 외형’을 갖춘 “The Giant Part 4. Holiest Grail”이 등장한다. 불안한 기타 리프와 오페라틱한 보컬,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멋지게 어우러지며 ‘거인 4부작’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4부작은 히치하이커가 현재로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뚜렷한 이미지들을 실험적이고 난해한 형식으로 야심차고 장중하게 그려내는 능력, 그것이다.

그러나 ‘거인 4부작’이 너무 거대했던 탓일까? 후반부의 “Oblivion”과 “The Divine Comedy”는 전반부에 비해 처지는 모습이다. “Oblivion”은 수록곡 중 가장 멜로딕하고 기승전결이 뚜렷하지만, 전반부 트랙들의 강렬한 인상에 비하면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노(Mono)를 비롯한 여타 포스트록 밴드들의 음악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한편 “The Divine Comedy”는 이 거대한 앨범의 마무리 트랙으로 놓기에는 소품에 가깝다. 다행스럽게도 (원래 “요리왕 비룡”이란 제목이 붙을 예정이었던) 히든 트랙은 ‘거인 4부작’의 감각을 되살려낸다. 곡 초반부에는 아래로 내리꽂히는 낮은 피아노와 부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구름 속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전자음이 들려온다. 그러다 곧 먹구름 같은 드론 사운드에 뒤덮인다. 그리고 다시 높은 톤의 신스 사운드가 등장한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음향을 풍긴다. 그렇게 앨범은 마무리된다.

지금까지의 묘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이들의 음악은 (표면의 실험적 형식을 걷어내고 나면) 다분히 이미지적이다. 마치 사운드가 어떤 광경을 그려내기 위해 봉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면 ‘거인 4부작’에서처럼 매우 흥미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자칫 그와는 반대로 애초에 의도한 이미지에 의해 음악이 잡아먹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실패한 컨셉 앨범들은 모두 그런 식의 실수로부터 만들어진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내가 이들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서 가지게 된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히치하이커의 데뷔 앨범은 국내/국외를 통틀어 최근 발표된 비슷한 분야의 작품들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 정도의 역량이라면 몇몇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무한한 호기심’으로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생긴다. 그러니 일단은, 이 네 명의 히치하이커들이 그려내는 지옥의 풍광을 즐겨야겠다. | 글 정구원 lacelet@gmail.com

ratings: 4/5

 

수록곡
1. The Giant Part 1. Hexameron
2. The Giant Part 2. Gigantes
3. Interlude 1.
4. The Giant Part 3. Burial Of William Blake
5. Interlude 2.
6. The Giant Part 4. Holiest Grailx
7. Oblivion
8. The Divine Comedy (Paraphrase Of ‘Dante Symphony’ & Chant Gregorian ‘Dies Irae’)
9. Hidden Track

멀티미디어

히치하이커 – The Giant Part 2. Gigantes

관련 링크
미러볼뮤직 싸이월드 클럽: http://music.cyworld.com/label/mirrorball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