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진 – 풍각쟁이 은진 – 비트볼, 2010 날렵하고 가볍게 [풍각쟁이 은진]은 연극배우이자 가수인 최은진이 근대 가요를 새로 부른 음반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은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이야 여기 수록된 곡들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아무튼 쉽게 말해 뮤지션과 음악 모두 ‘수비 범위’ 밖이다. 그럼에도 듣다 보면 뭔가 한두 마디쯤은 하고 넘어가고 싶어진다. ‘설명’하고 ‘평가’하기보다는 ‘홍보’하고픈 심산인 셈이다. 근대 가요, 즉 일제 강점기의 대중음악에 대한 장유정의 연구서 [오빠는 풍각쟁이야](민음인, 2006)에 따르면 당시의 대중가요는 트로트, 신민요, 만요(漫謠), 재즈송으로 구분된다. 책의 설명을 간략하게 옮기자면 트로트는 ‘엔카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곡 중에서 주로 애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곡’을 일컫는다. 신민요는 ‘기존의 민요 형식을 빌어 새롭게 출현한 대중가요’를, 만요는 ‘일종의 코믹 송으로 희극에 해당하는 만담 등의 내용을 노래로 만든 대중가요’다. 끝으로 재즈송은 ‘서양 대중음악의 영향으로 출현한 일련의 가요’를 지칭한다. 여기에서는 샹송이나 팝송, 라틴 음악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설명을 염두에 두고 음반을 들어 보면 “신접살이 풍경”이나 “화류춘몽”, “연락선은 떠난다”는 트로트 계열이다. 신민요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리랑 낭낭”, “아리랑 그리운 나라”, 만요는 (이 음반의 대표곡일) “오빠는 풍각쟁이야”와 “신접살이 풍경”, “엉터리 대학생”, “활동사진 강짜” 등이다. 재즈송으로는 “다방의 푸른 꿈”과 “이태리의 정원” 등이 있겠다. 물론 이난영의 “고향”처럼 한 번 들어서는 감이 바로 오지 않는 곡도 있다. 또한 만요 같은 경우는 음악적 스타일이 아니라 가사의 내용으로 결정되는 만큼 음악적 장르라는 게 큰 의미가 없다. 어쨌거나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의 음률과 무드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국인의 음악적 DNA라는 게 있다면 이 곡들은 AGCT쯤 될 게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익숙한지를 따지기 시작하면 사정이 복잡해진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걸 ‘음악’으로서 익숙하게 여기는 것인지 ‘역사’로서 익숙하게 여기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고, 음악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복각’인지 ‘복고’인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박찬욱의 영화 [박쥐](2009)에서 들리던 유성기 음악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 영화가 평행우주 어딘가의 치정극 혹은 우화 같았을 때 음악의 영향이 없었을까? 거기다가 이 음반은 한영애의 [Behind Time: A Memory Left At An Alley](2003)가 야심차게 보여주었던 시도, 즉 ‘해체와 재구성’도 아니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이 음반에 있는 곡들이 과연 ‘우리 시대’의 것인가? 곡들과 작곡가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거의 문고판 책자 수준으로) 첨부한 것 역시 그런 고민의 일부가 아닐까? [풍각쟁이 은진]은 이 난관을 날렵하고 가볍게 받아넘긴다. 이를테면 첫 곡 “고향”의 경우, 편곡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최은진의 버전은 음정을 살짝 높이고 템포도 다소 빠르게 잡고 있다. 악기도 적어서 전자가 ‘오케스트라’라면 후자는 ‘체임버 오케스트라’다(그건 음악적인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다). 보통 음정을 높이고 템포가 빨라지면 ‘더 좋고 세련되게’ 들리는 경향이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바이브레이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뚜렷한 발음과 개성적인 가창으로 곡을 소화하는 최은진의 목소리는 그런 편곡방식이 그저 잔재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는 원곡의 간드러진 ‘앙탈’을 보다 ‘연극적’으로 소화하고 있다. 이 경우는 ‘거리두기’다. 난관을 받아넘기는 또 다른 방식이겠다. 다만 “연락선은 떠난다” 같은 곡에서의 나레이션은 (좀 지나치게 받아넘기는 바람에) ‘우습게’ 들린다는 평가가 있다는 것도 덧붙여 두는 게 좋겠다. 더불어 음반은 중간 중간 ‘모던’한 손길을 가한다. 큰 뒤집기는 없지만 소소하게 감칠맛 나는 부분들이 귀에 잡힌다. 개인적으로는 찰랑거리는 바이올린이 인상적인 “고향”의 도입부나 “화류춘몽”과 “활동사진 강짜”, 쓸쓸한 여운이 스며 있는 “이태리의 정원” 등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활동사진 강짜”는 아예 새로운 노래(“우주의 한 구석에”)를 삽입하고 있다. 이런 감각은 프로듀싱을 담당한 하찌의 공일 것이다. 최은진의 음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긴 했지만 정확히 말해 최은진과 하찌의 음반이라고 말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다. 프로듀서의 감각이 보컬의 매력만큼이나,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음반이다. 미리 밑밥을 깔아뒀지만, 나로서는 [풍각쟁이 은진]의 가치를 적절히 평가할 만한 재간이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음반의 수록곡 중 절반 이상이 김해송의 작품이라는 것(김송규는 김해송의 본명이다). 김해송에 대한 관심은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두드러진다(그건 창작자들도 마찬가지라서, 이를테면 성기완은 김해송을 ‘한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하나로 종종 언급한다). 이걸 ‘김해송 신드롬’이라 일컫는 건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그가 갖고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 많은 언급이 필요하리라 본다.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찌를 프로듀서로 기용함으로써 생기는 음악 외적인 맥락과 효과다. 당장에 ‘이식론’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혹은 반대로 근대 가요의 문제를 ‘새로운 문명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매혹’에서 접근할 수도 있겠다. 시인 이상이 평생 도쿄에 가고 싶어 했듯이. 이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건 내 능력 밖의 문제다. 어쨌거나 어떤 이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늘의 음악팬들은 이 음반에서 [라디오 데이즈]나 [경성스캔들], 혹은 [모던 보이]나 그도 아니면 [기담]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절을 다룬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어떤 분위기, ‘때를 벗겨낸 것 같은 그 시절 풍경’에 더 근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내지에 적힌 다음과 같은 구절들, “눈물겹고 사랑스러운 문화 유산은 다시 먼지를 털어 우리 삶의 중심에서 되살려 가야 한다”나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사람들이 일제의 강압으로 정처 없이 떠나갔던 것인가?” 등이 어쩐지 초점을 벗어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고. 그렇다면 최은진은 질문에 대답한 것일까? 그녀가 부르고 있는 ‘가요’와 내가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가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사이의 거리는 아무래도 좀 멀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이 음반이 내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우리 시대’의 음악처럼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최은진과 하찌의 탓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음반에는 생생한 활력과 반짝이는 재기가 있다. 하여 [풍각쟁이 은진]이 지금 이곳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며 향유되는 음악의 일부처럼 느껴진다면, 그러니까 단지 발표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최은진과 하찌의 공이다. 20100518 | 최민우 daftsounds@gmail.com 덧1. 장유정이 [오빠는 풍각쟁이야]에서 사용하고 있는 ‘트로트’라는 용어는 1945년 이후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트로트’와는 다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 바란다. 덧2. 크레딧에는 “이태리의 정원”의 작곡가가 ‘에르윈’이라 적혀 있다. 이는 독일의 탱고 작곡가 랄프 에르윈(Ralph Erwin)을 가리킨다. 이 곡은 음반의 유일한 번안곡이다. 8/10 수록곡 1. 고향 2. 오빠는 풍각쟁이 3. 신접살이 풍경 4. 님 전 상서 5. 화류춘몽 6. 다방의 푸른 꿈 7. 엉터리 대학생 8. 연락선은 떠난다 9. 아리랑 낭낭 10. 구십춘광 11. 아리랑 그리운 나라 (원제: 가벼운 인조견을) 12. 활동사진 강짜 13. 이태리의 정원 관련 글 아시아를 월경(越境)하는 풍각쟁이 악사의 ‘비빔밥’과 ‘짬뽕’: 하찌와의 인터뷰’- vol.12/no.12 [20100616] 한영애 [Behind Time: A Memory Left At An Alley] 리뷰 – vol.5/no.14 [20030716] 관련 사이트 비트볼 공식 홈페이지 http://www.beatballrecord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