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트레벨야르(Valerie Trebeljahr) 혹은 랄리 푸나: In-between, try harder

랄리 푸나는 독일 뮌헨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4인조 (포스트?)일렉트로닉 팝 밴드다. 한국에 이들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3집 Faking the Books (2004)가 라이센스 발매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그 전에 2집 Scary World Theory (2001)가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가 극찬했다’는 입소문과 더불어 수입 음반 등을 통해 찾아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밴드의 중심인 발레리 트레벨야르(Valerie Trebeljahr)가 한국계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관심을 증폭시켰음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랄리 푸나의 활동은 편집 음반 I Thought I Was Over That(2005)를 발표한 직후 발레리의 임신, 출산, 육아와 더불어 꽤 긴 휴지기에 들어 갔다 (참고로 발레리의 남편이자 아기의 아버지는 랄리 푸나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고 또 하나의 밴드 노트위스트(The Notwist)를 이끄는 마르쿠스 아허(Markus Acher)다). 한국을 찾을 기회도 있었지만 아쉽게 무산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2년 전 베를린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페스티벌에서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는 발레리를 만날 수 있었고, 이하는 그 기록이다. 하지만 이 인터뷰는 웹진 [weiv]를 위한 음악인 인터뷰라기보다는 나의 ‘생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초점은 음악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녀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것이어서 이 지면(웹면?)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은 대폭 압축, 생략했다. 또한 인터뷰를 하던 시점에서는 아직 신보가 나오기 이전 시점이라서 새 앨범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이전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는 점도 양해를 드린다.

일시: 2008. 5. 11
장소: 베를린 Volksbuhne
질문: 신현준 | 사진: 미샤엘 푸어(Micahel Fuhr), 송화숙(Song Hwasook)
정리: 신현준
영문 인터뷰
: Valerie Trebeljahr (Lai Puna): In-between, we try ha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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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v]: 딸이 태어난 이후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A: 너무 많이 변했죠. 아이(딸)가 있고 지금 저는 아직 활동을 중단한 셈이죠. 겨우 몇 달 전 다시 음악을 시작했을 뿐이에요. 음악 만들 시간이 너무 적은 게 사실이구요. 이번 공연은 아이가 태어난 지 두번째 하는 공연인데, 작년 10월 아이슬랜드에서 열린 한 페스티벌에서 공연했을 때는 아이를 데리고 갔어요. 좀 우스꽝스러웠어요(웃음).

[weiv]: 새 앨범 작업이 어떻게 진행 중인지 궁금하네요.
A: 새 앨범을 위해 작업 중인 곡들 가운데 두 곡은 오늘 연주할 거에요. 첫 곡은 “Our Inventions”이고 다른 한 곡은 “Page”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곡은 새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다].

[weiv]: 새 앨범의 방향은 대략 어떤 것인가요? 제 생각으로는 Faking Books 에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본 것 같은데요…
A: 아마도 새 앨범은 다시금 축소된(reduced) 전자 음악이 될 것 같네요. “Our Inventions”이 새 앨범의 음악적 방향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 앨범이 나오려면 1년 혹은 2년이 걸릴 거에요.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은 다른 멤버들의 스케쥴 때문이기도 해요. 마르쿠스는 노트위스트(The Notwist)와 타이드 앤 티클드 트리오(Tied & Tickled Trio)를 이끌고 있고, 지난 주에 밴드의 새 앨범이 나왔어요. 드럼 치는 크리스토프도 타이드 앤 티클드 트리오에서 연주하고 있구요.

[weiv]: 그렇다면 모르 뮤직(Morr Music)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뮤지션들은 마치 가족처럼 보입니다. 그런가요?
A:: 맞아요. 우리는 정말 친구들이었어요. 토마스 모르(Thomas Morr)가 처음 레이블을 시작했을 때는우리 모두 친구들이었고, 서로 밴드에 가입하라고 물어보기도 했었어요. 지금 모르 뮤직이 대단하게 커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다른 밴드들을 잘 모르겠어요. 심지어 독일 밖의 나라들의 밴드들도 모르 뮤직에 속해 있으니까요.

[weiv]: 현재 음악산업은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모르 뮤직의 아티스트들에게 특별한 전략이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A: 그건 전세계적 현상이죠. 인터넷 때문에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고 변화를 따라 잡기 정신이 없죠. 음악인들은 음악으로 먹고 살고 싶어하지만, 그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죠. 모르 뮤직의 경우 한편으로는 CD를 계속 발매하려고 하고 커버 아트워크에 신경을 써서 특별한 매력을 부여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튠스 같은 곳과 거래를 시작하고 있죠. 그렇지만 나는 판매에 대해서는 그닥 개의치 않아요. 토마스가 더 많은 걸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거에요. 랄리 푸나가 상업적으로 중요한 밴드도 아니구요… (웃음).

[weiv]: 모르 뮤직과는 조금 달리 로컬 음악 씬으로서 ‘봐일하임 씬’에 대해 알고 싶네요.
A: 봐일하임은 뮌헨에서 50km 떨어진 작은 도시에요. 저는 봐일하임도 아니고 그 옆에 있는 도시에서 살았구요. 그래서 봐일하임이라는 이름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에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벗어나서 뮌헨이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하죠. 그렇지만 노트위스트가 이름이 꽤 알려지면서 사정이 바뀐 것도 사실이에요. 노트위스트가 등장하면서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봐일하임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거죠. 그 전까지는 독일 사람들 가운데서도 봐일하임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거에요. 하지만 우리가 봐일하임의 로컬 레퍼런스를 가사에 담거나 하는 것은 아니네요. 그곳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요 (웃음).

[weiv]: 마르쿠스 아허를 만난 건 언젠가요?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노트위스트가 독일 얼터너티브 씬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설명 부탁합니다. (Michael Fuhr) 노트위스트는 독일의 많은 밴드에게 큰 영향을 주었죠. 그리고 쾰른에서 랄리 푸나가 노트위스트의 서포트 밴드로 무대에 선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A: 마르쿠스를 만난 건 독일로 이주한 때니까 1993년경이에요. LB 페이지를 시작하기 전이고 그를 오랫 동안 만났죠. 쾰른에서 노트위스트와 함께 연주한 것은 기억나는데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웃음). 왜냐하면 보통 랄리 푸나와 노트위스트가 한 무대에 서는 일은 없거든요. 마르쿠스가 두 밴드 모두에서 연주를 해야 하니까 보통 그렇게 하지 않는데… 어쨌든 노트위스트는 독일 얼터너티브 씬에서 중요한 밴드에요. 1990년대에 독일의 주요 음악 도시들로 베를린, 함부르크 다음에 봐일하임이 꼽힐 정도였으니까요. 노트위스가 얼터너티브 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명백해요.

[weiv]: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물어보기 전에 개인사에 대한 질문을 짧게만 하겠습니다. 여러 자료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조금 불명확한 것들이 있어서요. ‘푸나’가’부산’의 오기라고 어디선가 읽었고 랄리 푸나는 ‘부산에서 온 랄리(발레리의 애칭)’이라는 뜻인데 사실인가요? 밴드에 출생지명을 사용했다면, ‘한국’이 당신의 정체성과 어떻게 얼마나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A: 한살 반 때 독일인 가정에 입양되었어요. 내가 6살인가 7살 때 부부가 이혼을 했고 엄마를 따라 포르투갈로 이사해서 살다가 17살 되던 해 독일로 돌아왔어요. 그래서 내 모국어는 독일어고, 포르투갈어도 할 수 있지만 한국어는 못 해요. 그리고 부산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국제입양기관이 모든 자료를 엄마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한국에 관심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반(半)한국인 친구 하나를 만났는데 그녀는 한국에 친척이 있어서 한국을 방문하곤 했어요. 그녀가 나에게는 일종의 출발점이었어요. 그렇다고 한국에 관한 책을 사서 읽은 건 아니지만… 나는 물론 독일에서 자랐고 내 모국어는 독일어지만, 요즘은 ‘어디서 자랐는가(where you grew up)’도 중요하지만 ‘어디 출신인가(where you came from)’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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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v]: 당신의 ‘한국인 배경’ 및 ‘입양인 배경’은 뒤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의 ‘포르투갈 배경’이 더 흥미롭네요. 초기의 곡들 가운데 몇 곡, 예를 들어 “Rapariga da Banheira”는 포르투갈어 가사로 쓰여졌네요. 사전을 찾아보니 ‘욕조 속의 소녀’라는 뜻이네요. 그런데 그 곡의 가사는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지 않습니다.
A: 그 곡의 포르투갈어 가사를 쓸 때 당시에는 그런 가사가 마음 속에 떠올라서 쓴 것이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그 가사를 웹사이트에 게시하는 게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이유는 흠… ‘틀린’ 포르투갈어라서(웃음). 아마도 포르투갈 사람은 내가 포르투갈 출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 뒤 포르투갈어 가사를 쓰는 것을 중단했죠. 나는 그 곡을 참 좋아해요. 모든 언어마다 각각의 느낌이 있는데 포르투갈어나 독일어로 노래하는 것은 쉽지가 않아요. 참, 포르투갈에서 저는 ‘독일인’으로 취급받지 않고 ‘중국애’라고 취급받았어요.

[weiv]: 영어로 노래부르기 시작했을 때 어떤 아티스트들(가수들)의 영향이 있었나요? 한 인터뷰에서는 니나 시몬(Nina Simone)을 언급했는데, 제 귀에는 니나 사이몬보다는 제인 버킨(Jane Birkin)이나 (스테레오랩의) 래티샤 사디에(Laetitia Sadier)에 가깝게 들렸네요.
A: 니나 사이먼은 제게 중요한 인물이에요. 정확한 이유를 말하기는 힘든데, 그녀의 창법은매우 특별하고 비범해요. 그리고 나는 카디건스(The Cardigans)의 니나 페르손(Nina Persson)을 참 좋아했어요. 그녀는 참 좋은 가수고 자연스럽게 목소리의 무드를 바꿀 줄 알아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게 더 어려운 일이거든요. 말씀하신 제인 버킨이나 래티샤 사디에도 좋아하기는 해요. 단, 프랑스어 악센트로 부르지 않는 한에서… (웃음)

[weiv]: 이제 초기의 음악경력으로 넘어갈까요? LB 페이지(LB page)라는 밴드 이야기를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걸 펑크 밴드라고 소개되었고 당신은 키보드를 연주했다고 들었습니다. 펑크 밴드에 키보드가 있는 건 조금 이례적이네요.
A: 아, 그 밴드는 진짜 펑크는 아니었어요. 그건 팝… ‘트래쉬 팝(trash pop)’ 밴드였어요. 1990년대 중반 경 내가 살던 동네에서 결성한 밴드였죠. 그 밴드들은 악기도 연주할 줄 모르는 여자애들이 재미로 만든 것이었죠. 여자들이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할 때는 굉장히 달라요.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는데 관심 있는 남자들은 아무도 없는 반면 여자들은 다르죠. 그때는 정말 재밌었는데 마지막은 아주 나빴어요. 그 이야기는 정말 드라마틱했어요. 우리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그냥 재미로만 밴드를 했는데 나와 스테피(미스 존 소다Ms. Jon Soda의 프론트우먼)은 무언가 더 해보려고 했어요. 그 무렵 몇 곡을 작곡했지만 그때는 그걸 연주하거나 녹음하지는 않았어요.

[weiv]: 공식적으로 발표된 랄리 푸나의 첫번째 레코딩은 “Everywhere & Allover” 등이 수록된 Safe Side 같습니다. 그 음반의 사운드는 매우 ‘노이지’하고 ‘트래쉬’같습니다. 또한 초기 곡들 가운데 하나인 “Antenna Trash”도 마찬가지인데, 이 곡의 제목이 당신이 말한 ‘트래쉬 팝’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또한 이 무렵 이런 ‘노이지’한 음악을 ‘슈게이저’라고 부르지는 않았나요?
A: 그게 언제 녹음된 건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네요. Safe Side 는 7인치 바이닐 레코드로 발표되었는데, 4트랙 레코더로 녹음한 것이었어요. 4트랙 레코더니까 믹싱을 할 때마다 ‘노이지’해지는 것이었겠죠! 한편 “Antenna Trash”는 ‘라디오 3’라고 불리는 포르투갈의 한 라디오 방송국 이름이었어요. 마우스 온 마스(Mouse on Mars)가 인터뷰를 위해 거기 초대되었는데, 나는 그냥 그 이름만 따 온 것이었어요. 여기 독일에서 슈게이징 씬은 미국, 영국, 프랑스처럼 그리 크지는 않았어요.

[weiv]: 매우 실례되는 말이지만 유튜브에 올라온 “Scary World Theory”의 모스크바 라이브 공연을 보면 당신의 노래가 스튜디오 앨범만큼 훌륭하지는 않았습니다. 추측컨대 공연에서 랄리 푸나의 노래를 다른 복잡한 사운드들과 믹싱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당신 노래에는 노래 말고 나레이션도 있어서
A: 아뇨. 라이브에서 노래 부르는데 특별한 문제는 없어요. 저 곡을 불렀을 때는 그냥 멜로디가 너무 높아서 그렇게 들렸을 것 같네요. 나는 가창 레슨을 받는 걸 좋아해요. 목소리를 더 크게 하는 방법이라든가… 레슨을 받지 않으면 라이브에서 노래 부르는 게 문제가 될 때가 있어요.

[weiv]: 단지 노래만이 아니라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것이 어렵지 않나요? 어떤 일렉트로닉 아티스트들은 라이브를 싫어하고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하던데…
A: 그렇지는 않아요. 라이브 연주와 스튜디오 레코딩은 서로 다르고 나는 둘 다 좋아해요. 라이브 연주를 위해서는 어떤 파트는 길게 만들고 다른 파트는 생략하는 등의 준비가 필요하죠. 그건 스튜디오에서 레코딩하는 것과는 반대 순서의 작업이죠. 물론 드럼과 기타만 있으면 연주할 수 있는 밴드들과는 달리 랄리 푸나는 이런 저런 기술적 장비들이 많이 필요하죠. 하지만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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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v]: 랄리 푸나의 음악이 상이한 지역에서 어떻게 수용되는지요? 먼저, 미국 순회공연(투어)은 어땠나요? 한 인터뷰를 보니 샌프란시스코에서인가 당신은 매우 피곤해 보이던데요.
A: 그게 랄리 푸나의 첫번째 투어였고, 정말 정말 피곤했어요. 공연에서 연주한 뒤에 장비들을 싸서 멀리 있는 다른 도시로 운전을 해서 이동하고… 아, 진짜 진이 빠졌어요. 두번째 미국 투어는 훨씬 나았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공연을 보러 왔고 잠을 잘 수 있는 코우치(coach)를 임대했거든요. 그런데 너무 비싸더군요.

[weiv]: 어떤 나라가 공연을 하기 좋았고, 또 어떤 나라가 좋지 않았나요?
A: 공연을 가장 하기 좋은 곳은 동유럽이에요. 여기 베를린 같은 도시에는 세계 각지에서 밴드들이 와서 공연을 하지만, 동유럽, 예를 들어 폴란드 같은 곳에는 많은 밴드가 가질 않잖아요. 선택이 많지 않다 보니 사람들은 정말 콘서트에 기대를 하더군요. 또 상당한 비용도 제출해야 하다 보니 콘서트를 정말 학수고대해요. 가장 나쁜 곳요? 독일의 작은 도시들이죠. 그들은 우리 음악과 전혀 접속하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건 다른 음악이에요. 다른 이유지만 암스테르담도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weiv]: 일본 공연은 어땠나요?
A: 2, 3년 전 일본에 갔었는데 일본 팬들은 참 열성적이었어요. 매우 겸손하면서도! 아마 그해가 일본과 독일 관계를 기념하는 해여서 마우스 온 마스와 우리가 초청되었어요. 우리가 공연을 한 곳은 도쿄와 오사카의 400석 규모의 공연장이었죠. 무대에서 공연을 한 것 외에도 그건 정말 좋은 여행이었어요. 근데 이상한 것도 있었는데 거리를 걸어가면 일본 사람들이 저는 쳐다보니 않고 이 독일 사내들만 쳐다 보더군요.

[weiv]: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A: 뮌헨에는 일본인 커뮤니티가 있고 일본 인디 밴드들이 공연을 많이 해요. 유명한 밴드들이 아니라 그냥 재미로 이곳에서 와서 공연을 하는 거에요. 그들은 참 창의적이고 혁신적이에요. 나는 우연찮게 그 커뮤니티이 일원이 되었어요. 이것도 우스운데 그들이 내게 개방적이었던 것은 내 생김새 때문이었어요.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는 저도 조금 알지만 뮌헨에서는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뮌헨의 일본인 공동체에서 좋은 것은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많고 커뮤니티가 인디펜던트하다는 점이에요. 그들 대부분은 일본어와 영어로 이야기하고 독일어는 되게 못하지만…

[weiv]: 그렇다면 뮌헨에 ‘한국’과 연관된 것은 없나요?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건가요?
A: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앞서 말했듯 내 출발점은 반(半)한국인 친구에요. 우리는 오랫 동안 친구였고 그녀도 밴드를 했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지만 나는 그녀가 한국계인줄은 몰랐는데 8년 전 어느 날 “오, 발레리, 너도 코리안이야. 한국에 방문해야 돼”라고 말하더군요. 그녀가 아니었으면 나는 뮌헨에 한인 커뮤니티가 있는 것도 몰랐을 거에요. 하지만 한인 커뮤니티는 완전히 달라요. 대부분은 나이든 분들이고 제 또래는 없었죠. 또한 종교 기반의 커뮤니티더군요.

[weiv]: 한인 커뮤니티와 관계를 맺기 힘들었다면 다른 계기가 있었나요?
A: 두번째 계기가 있었죠. 공연이 끝나면 언제나 저를 찾아와서 “그 역사[입양의 역사]에 대해 읽은 게 있다. 나도 한국계다. 나도 입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와 같은 케이스들이고 나의 스토리 때문에 랄리 푸나의 음악과 관계를 맺는 것이죠. 랄리 푸나의 청중 가운데 한국계 입양인의 비중이 큰 건 아니지만요. 그들은 태어난 곳과 자라난 곳 사이에서 교섭할 일이 있는 것이죠. 명백히, 행동 중 많은 것들은 ‘어디서 자랐는가’뿐만 아니라 ‘어디서 태어났는가’에서 나와요. 그 와중에 나 역시 ‘니가 어떻게 생겼는가(how you look)’, ‘니가 어디 출신인가(where you are from)’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weiv]: 그들 한국계 입양인들은 어떤 커뮤니티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인가요?
A: 그들은 ‘한인 커뮤니티’가 아니라 ‘입양인 커뮤니티’와 접속하고 있이요. 양자는 전혀다른 것이죠.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입양인 예술가 커뮤니티를 조직하고 있어요.

[weiv]: 유럽에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아시안 팝 문화, 예를 들어 일본 망가와애니메이션, 중국(홍콩) 영화,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 등이 유럽에서도 조금 알려지고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A: 나로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아시아의 문화를 찾기가 힘들었는데요. 일본의 코넬리어스(Cornelius)와 미네가와 다카고(Takako Minekawa) 정도 빼고는 잘 몰랐어요. 한국이나 다른 아시아에서 온 얼터너티브 음악은 들어본 일이 없어요.

[weiv]: 마지막으로 한국에 온다면, 어떤 반응을 기대하나요? 혹은 어떤 반응은 기대하지 않나요?
A: 한국에 갈 때 기대하는 건 많지 않아요. 한 명의 여행자로 가는 것이지 귀향 같은 것은 절대 아니에요. 한국에 가는 것은 조금 이해와 감정이 있지만 여전히 여행자일 것이고 사람들이 나를 더 친절하게 대할 것이라는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글쎄, 나는 부산과 서울에 관심이 있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싶기는 해요. 그렇지만 나는 이제 나의 개인사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오랫 동안 나는 한국에 밴드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한국에 가는 것은 거대한 감정적인 일일 것이라고 알고 있었죠. 그렇지만 지금은, 음 정확하게 말하기 힘드네요… 나는 이제 나의 과거와 한국에 대한 생각을 다룰 수 있게 되었어요. 한때는 한국에 가서 울음을 터뜨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죠. 그때는 밴드와 함께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일종의 거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weiv]: 멀지 않은 장래에 밴드와 함께 한국에 오기를 바랍니다. 장시간 인터뷰를 해 줘서 고맙습니다!
A: 아녜요. 감사합니다. 201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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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랄리 푸나 홈페이지
http://www.lalipun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