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d-Orange-Cupid-DeluxeBlood Orange | Cupid Deluxe | Domino, 2013.11.18

 

뉴욕의 지하철역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찬가

음악이나 미술 작품에 지역성이 묻어나올 때 특별한 감흥을 느낀다. 그 지역성이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더 좋다. 그렇게 구체화된 지역성 안에서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한 작품들은 역설적으로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의 일반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시적인 아름다움의 위력은 이처럼 구체성 안에서 일반적인 담론을 이야기하는 능력에 기인하고 있다. 어느 동네에 사는 한 꼬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청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삶을 성찰하고, 이러한 개인적 경험의 공유와 확장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가 다수의 일반적인 이야기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지역성은 그처럼 미시적인 구체화 과정을 돕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영국에서 태어나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한 흑인 청년이 있다. 거친 환경에서 자라는 와중에 길거리 불량배들에게 너무 많이 맞아 병원 응급실에서 정신을 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정을 넘어 아침이 밝아오기까지의 시간, 뉴욕과 브루클린 일대에는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 청년은 그들 중 하나였거나 최소한 그들의 친구였을 것이다. 이들은 거리에서 섹스를 팔거나 마약을 하거나 골판지를 덧대어 잠자리를 만드는 식으로 그날 밤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이들 중 조금 더 현명한 일부는 지하철을 타고 종점과 종점 사이를 반복하며 보다 따뜻하고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다. 이들이 주로 탑승하는 A, C, E 라인을 합쳐서 ‘uncle ACE’라 부른다고 한다. 이 노선을 애용하던(혹은 애용하는 친구들을 쭉 지켜봐 왔던) 청년 드본테 하인즈(Devonté “Dev” Hynes)가 블러드 오렌지(Blood Orange)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두 번째 앨범 [Cupid Deluxe]에 수록된 곡 “uncle ACE”가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오늘 하룻밤을 지낼 곳을 찾아 떠도는 이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삶이 있고 사랑이 있을 것이다. 비록 온전히 아름다워 보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에게도 따뜻하고 두근거리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블러드 오렌지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름다운 팝 넘버로 재탄생시킨다.

이 곡뿐만이 아니다. [Cupid Deluxe] 앨범 전체가 뉴욕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뉴욕의 대표적인 이미지들은 아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윌리엄스버그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쉽게 가보지 못했던 뉴욕의 다른 부분, 즉 뉴욕의 변방을 떠도는 사람들이 사는 허름한 골목들이 앨범의 주된 배경이다. 중국인부터 유대인까지, 흑인부터 백인까지, 전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인종이 한데 뒤섞여 만들어내는 독특한 감수성이 녹아 있는 뉴욕 뒷골목을 무심한 듯 바라보는 뮤지션의 시선은 앨범 속지에도 잘 드러나 있다. 트랜스젠더나 거리의 부랑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부터 업타운의 허름한 차이나타운에 사는 중국계 미국인 소년이나 거리의 행위 예술가까지, 부클릿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가 앨범의 주인공이며 데브 하인즈의 친구들이다. 블러드 오렌지는 단지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삶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 뒤 뉴욕의 거리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세밀하게 음악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비로소 뉴욕의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 생겨난다.

그가 지역성을 음악으로 소환해 다루는 방식은 이미 라이트스피드 챔피언 (Lightspeed Champion)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그의 앨범 [Falling off the Lavender Bridge](2008)를 만든 과정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Omaha)에서 녹음된 이 앨범에서 그는 네브라스카의 로컬 뮤지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덕분에 네브라스카의 이미지를 음악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Cupid Deluxe]에서 어떠한 구체적 지명도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누구나 그의 음악을 통해 그가 더티 프로젝터스(Dirty Projectors)나 그리즐리 베어(Grizzly Bear)와 같이 뉴욕-브루클린 인디 신의 적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주 세련된 인디팝 넘버들의 감미로운 멜로디 라인이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 앨범에서 그 이상을 넘보고 있다. 뉴욕의 어두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뉴욕을 벗어나 보편적인 인생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뉴욕의 이미지는 제이 지(Jay-Z)를 위시한 여러 팝 뮤지션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위로 헬기를 띄운 뒤 뉴욕을 사랑한다고 외치거나 브루클린 네츠의 모자를 쓰고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외치는 뉴요커들의 모습을 봐오면서, 우리는 뉴욕에 대한 환상을 알게 모르게 갖게 되었을 것이다. 기름기 넘치는 이런 이미지가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전 세계 힙스터들의 성지인 윌리엄스버그에서 아마도 새로운 뉴욕의 이미지를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러드 오렌지는 이들 모두에게서 약간씩의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화려한 빌딩 아래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불러낸다. 마치 새벽녘에 일을 마친 서브웨이 알바 친구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수고했어, 이번 주말엔 신나게 놀자, 라고 이야기하듯 말이다.

그래서 뉴욕을 노래하는 많은 팝 넘버들을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절찬리에 상영 중인 대형 뮤지컬에 비유할 수 있다면, 블러드 오렌지의 음악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조촐하게 공연되는 작품들, 예컨대 <Hedwig and the Angry Inch>와 같은 느낌을 준다. 브로드웨이의 쇼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뉴욕의 일부지만, 뉴욕이라는 지역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뉴욕이 품고 있는 뉴욕 이야기이다. 우리가 ‘인디’라고 부르는 장르가 현대 대중음악에서, 혹은 사회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를 이 앨범이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림자처럼, 거울처럼, 혹은 메아리처럼, 상업화된 음악 산업이 놓치기 쉬운 지점을 찾아서 각인시켜 주고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는 것, 그것이 인디 신이 해야 할 일 중 하나이고 블러드 오렌지는 그 ‘인디’의 정체성에 ‘팝’이 가지는 미덕을 완벽하게 결합시킴으로써 너무나 아름다운 팝 넘버들을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울려 퍼지게 한다. 인디의 감성과 팝의 미학, 이 둘 사이의 균형점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찾아낸 앨범을 올해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 김종혁 jongheuk@gmail.com

Rating: 8/10
 
수록곡
01. Chamakay
02. You’re Not Good Enough
03. Uncle ACE
04. No Right Thing
05. It is What It is
06. Chosen
07. Clipped On
08. Always Let U Down
09. On the Line
10. High Street
11. Time Will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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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 Orange “Time Will T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