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3일부터 17일까지 영국 리버풀에서 개최된 국제대중음악학회(IASPM)의 제15차 학술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그 소회 몇 가지를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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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가 이 대회에 처음 참여한 것은 200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대회부터다. 이 대회는 격년제로 열리니 이번이 세번째 경험이었다. 그 전에 한국 학자들 가운데 누가 참여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두차례 그런 일이 있었다곤 해도 지속적으로 학회에 관여한 것 같지는 않다. 4년이라는 시간이 확연한 변화를 느끼기에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미묘한 변화를 관찰할 수는 있었다.

국제대중음악학회가 창설되어 첫 대회를 가진 것은 1981년이라고 한다. ‘…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그때 나는 대중음악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국제적’ 대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아직 10대(!)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대중음악을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상상의 범위 내에 있지 않았다. 지금 대중음악을 연구한다는 것에 대해 환대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걸 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의 인식은 존재하지만 그 당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서야 각자가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으니 이 점은 생략하기로 한다.

학회는 이제 30살의 나이를 먹은 셈이니, 젊은 시절을 지내 보낸 학회의 모습을 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사람이란 누구나 ’10년’에 민감한 때문인지 학회를 주최한 측이나 학회에 오랫 동안 참가했던 사람들은 남다른 소회를 가졌던 것 같다. 게다가 ‘영국 리버풀’이라는 지명이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지위 때문에 이번 대회는 최근의 여느 대회보다 성황을 이루었다. 유럽,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권역(region)에 속한 나라들 거의 대부분에서 참가자들이 왔고,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는 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나라들에서 참가자를 파견했다. 총 참가자 수가 300명에 가까웠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학계의 사정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주류 학계에 자리잡아 안정된 큰 기금을 받는 학회가 아니면서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리버풀의 ‘존 레논 공항’, 홍보 문구는 “above us, only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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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의 현재 학계의 분과별 구분에 의하면 각자 상이한 전공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인문학, 사회과학. 음악학, 지역학에 속하는 상이한 전공영역을 가지고 있는 참가자들이었지만 대중음악을 연구하는 시각이나 방법에 결정적인 차이가 보이지는 않았고, 대화나 소통에도 큰 장애물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 국제대중음악학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학제적(學際的; inter-disciplinary)이었다.

발표의 주제는 국제적 대중음악, 이른바 서양의 영어권 대중음악에 국한되지 않고 비서양이나 비영어권 대중음악도 폭넓게 포괄하고 있어서 ‘국제적 대중음악’을 연구하는 학회가 아니라 대중음악을 ‘국제적으로’ 연구하는 학회로 변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불가피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주최측에서는 몇 차례 공지를 통해서 “영어권에서 온 참가자들은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 천천히 또박또박 발표하고 토론해 주십시오,” “발표자들은 즉흥적으로 구어체로 발표하지 말고 작성해 온 문서를읽어 주십시오”라는 요구를 수 차례 했다. 이런 배려가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들을 흡족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주류 학회와는 다르다는 점을 느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이 학회의 플레너리 패널(plenary panel: 전원이 참석하는 패널)은 여느 학회와는 달리 저명한 학자, 이른바 빅 네임(big name)이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러 패널들 가운데 하나가 무작위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한번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석사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타이완계 학생이 200여 명을 앞에 두고 발표하기도 했다. 학회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른바 키 노트 스피커(key note speaker)는 비싼 돈을 주고 초대받고 주최측 스태프 한두명이 이것저것 다 챙겨준다. 그가 발표할 때는 참석자 전원이 ‘경배’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의례적인 질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는 것도 의례적인 일이다. 대중음악연구에서 중요한 서적을 저술하여 국제적으로 이름이 꽤 알려진 초로 혹은 중년의 학자들도 다수 참석했지만, 플레너리 패널이 아닌 패럴럴 패널(parallel panel: 동시에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여러 패널)의 하나에서 조용히 발표를 하는 데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중간에 쉬는 시간에 이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뉴질랜드의 대중음악연구자 로이 셔커(Roy Shuker)의 발표. ‘음반 컬렉션’에 대한 주제였다: 그의 저서 [대중음악사전]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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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한다면, 이번 학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학계의 변경에 위치하고 있지만 자신의 작업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 연구자들의 ‘쿨’한 태도, 그리고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지만 끈끈한 연대감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얼굴을 대하는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도 소통의 장벽을 느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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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좋은 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만 어떤 경우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주최측의 친절과 배려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제학회에서 영어가 유일한 언어라는 사실은 아직도 높은 장벽이다. 영어사용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장벽의 ‘높이’는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서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 우리가 느끼기에는 영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동유럽과 중남미의 경우도 아무래도 로마 문자나 치릴(cyrillic) 문자를 사용하는 언어권이다 보니 한국 및 아시아권보다는 영어 사용에 어려움이 덜 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국제대중음악학회에서의 지배적 조류는 ‘영미중심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서양’ 대중음악에 많은 비중이 할애되고 있다. 몇몇 ‘제3세계’의 대중음악을 다루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 경우 서양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동안의 식민주의의 역사를 통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 등 서양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의 비중이 높은 경우가 많다. 참고로 현재 대중음악학회의 권역별 분과에서 가장 많은 회원을 가진 곳은 라틴 아메리카 분과다. 대중음악 그 자체든,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든 ‘서양의 헤게모니’는 아무리 쇠퇴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강력하다.

그 결과 중동과 아시아의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 지역과 나라의 대중음악을 발표한 연구자들은 유럽, 미국, 오세아니아 등 서양의 학계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상당수였다. 이에 더해서 아시아의 대다수의 나라들에서 국제학계에 참가하는 데는 경제적 어려움이 많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언어문화적, 현실경제적 원인 두 가지 모두로 아시아에서 대중음악연구를 ‘국제화’하는 일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인도의 경우 언어문화적 어려움은 덜 하겠지만 경제적 문제가 만만치 않아 보이고, 일본의 경우 경제적 문제는 별로 없겠지만 언어장벽의 문제는 아직도 심각해 보인다.

한국의 경우는 두 가지 조건 모두 만만치가 않다. 최근까지 한국 연구자들 가운데 국제대중음악학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영어권(미국이나 영국)에서 유학한 경험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참가한 연구자들은 글쓴이를 포함하여 모두 네 명이었는데, 2005년 로마 대회와 2007년 멕시코 대회에서도 각각 세 명이 참가했으니 양적 규모 면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2005년에는 유학생 한 명과 서양 연구자 한 명, 2007년에는 유학생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던 반면 이번에는 세 명이 ‘토종 연구자’였다는 사실(다른 한 명은 한국 음악을 연구하는 캐나다인 음악학자였다)은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도 있다.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리버풀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 음악학자 한 명이 컨퍼런스 기간 내내 음양으로 도움을 준 점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를 국제학계에서 표상하는 데 다른 문제점이 있다면 양적으로 소수라는 점 외에도 한국의 대중음악 그 자체가 별달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웃 나라인 중국어권(중국, 홍콩, 타이완 등을 포함하는 권역)이나 일본의 대중음악과 비교해 보더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 점에서 이번 학회에서 중국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는 확연하게 부상해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 홍콩, 타이완에서 온 참가자들에 서양에서 중국 대중음악을 연구하는 참가자들을 더한다면 총 12명이 발표를 했고, 이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도 활발해 보였다. 단지 발표자의 수만 많았던 것이 아니라 청중들도 중국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주목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중국 대중음악이 한국 대중음악보다 별달리 나은 게 없다고 생각해 왔던 사람이라면(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약진에 놀라워 했을 것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2005년과 2007년 중국 대중음악에 대한 발표는 다섯 개 이하로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발표만큼이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중국의 부상’은 국제대중음악학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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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을 연구하는 작업이나 이를 국제적으로 공론화하는 작업이 대단한 일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음악을 듣고 즐기는 사람들에게 ‘연구’라는 작업이 그리 절실하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면,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주제라도 그것을 연구하는 일은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다.

이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작은 정보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비평’과 거리를 두고 ‘연구’로 방향을 바꾼 이유를 피력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고 어쩌면 실용적인 이유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나이가 들어가면 어느 순간 그 직업 종사자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감한다. 철 지난 표현을 쓰자면 평론가 역시 ‘사오정, 오륙도’ 신세를 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도 있다. 대중음악을 연구하는 실천은, 비평하는 실천에서는 찾기 힘든 무언가를 찾게 해 준다.

이번 에디터스 노트에 비평의 가치는 ‘동시성’에 있다는 말이 있고, 나는 그 말에 동감한다. 그런데 음악을 듣고 즐기는 비(非)동시성의 차원은 전혀 없는 것일까? 나아가 비동소성(非同所性)은 없는 것일까? 음악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 특히 ‘지금 여기’를 설명하는데 중요하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음악은 종종 그 시간과 장소를 위반한다. 한 예로, 지금 당신이 밥 말 리(Bob Marley)가 1970년대 레코딩한 음악을 듣고 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있겠지만, 그때 시점과 장소를 횡단하는 복잡한 매개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이 글에서 복잡한 논의를 전개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나는 지금 여기에서 거리를 두고 대중음악을 연구하는 작업이 비평의 실천에서 얻을 수 없었던 무언가를 발견하게 해 주는 작은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는 비평가가 ‘실패한 음악인’이고, 연구자가 ‘실패한 비평가’라는 사실에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직접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비평가가 채워줄 수 있듯, 연구자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감히 주장해 본다. 회고해 보건대 내가 [weiv]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한국 록의 역사’나 ‘제3세계 록’을 연재했던 것은 비평과 연구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는 실천이었던 것 같다.

2000년대도 종언을 고해가는 시점이지만 대중음악의 의미에 대해 논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이에 대해 또렷하게 글로 쓰인 주장은 찾기 힘들어도, 다양한 미학적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제출되고 있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음악에 특정한 의미를 주장하는 실천이 있다면, 이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게 분명하고 [weiv]와 연관된 사람들도 그 집단적 주체들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음악이 망해 간다’, ‘음악산업이 망해 간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이후에도 각종 집단적 주체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투쟁은 감소하지 않았다. 그 집단적 주체에는 음악인들 뿐만 아니라 팬, 평론가, DJ, 클럽 주인… 기타 음악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실천을 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포함된다. ‘대중음악 연구자’는 이들 주체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다시 리버풀 학회로 돌아가 보자. 거기 참가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다양하다. 학계에 자리잡아서 아카데믹한 실천 외에는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학계나 평단을 오가면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학계는 부업이고 음악 관련 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한국에 사는 연구자로서 다소 ‘거리가 멀다’라고 생각했던 점이 있다면, 공공기관에서의 음악 교육, 박물관에서의 음악 전시, 음악 시상식에서의 심사, 페스티벌 등 행사의 조직 등에 대한 당사자들의 참여도나 가치부여가 매우 높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런 활동들은 날이 갈수록 국경을 넘어 전개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이 관심 있는 나라나 지역에 가서 교육, 전시, 공연의 조직을 하는 경험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행사 기간 중 리버풀 박물관에서 개최된 전시회, The beat Goes On. 리버풀 밴드 가운데 1960년 1위를 기록한 싱글들을 모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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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연구자가 개입을 해서 그런 행사가 잘 치러졌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런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 대중음악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고 이 지식은 사적으로 소장되기보다는 공적(public)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점이 내가 ‘한국에서도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내가 자신을 정당화한 근거들이다. 그래서 비평과 연구 사이에 더많은 점점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20090901 | 신현준 homey@orgio.net

추신:
리버풀의 ‘밤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그건 학회가 아니라도 여행을 가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고, “캐번 클럽(Cavern Club) 다녀왔다”는 말이 흥미로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