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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혁 – Vol.2 – 루비살롱, 2008

 

 

큰 고통, 작은 노래

이장혁의 두 번째 솔로 음반은 2008년 말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던, 발매도 되기 전부터 ‘2009년의 음반’으로 꼽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던(시기상 2008년 결산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음반이었다. 전작인 [Vol.1](2004)은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고, 실제로 음반은 그에 값하는 내용물을 담고 있었다. 어두운 청춘에 대한 저릿거리는 회고와 지금 여기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딛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강렬하게 얽혀 있던 음악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본 그의 공연 역시 인상적이었는데, 기타 하나와 목소리만으로 좌중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당시 그는 새 음반에 실릴 곡이라면서 “그날”과 “오늘밤은”, 그리고 앙코르로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를 들려줬다. 음반 수록곡을 봤을 때 그 중에서 가장 먼저 기억난 것은, 당연하게도,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다. 제목도 내용도 워낙 특이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이 곡이 음반에서 제일 좋은 곡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장혁의 음반이 훌륭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Vol.2]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지/누구도 날 몰랐어”로 요약할 수 있는 정서다(“조”). 혹은, 간만에 멋부려 보자면, 내면의 풍경으로 치환된 종말론적 상상력이다. 그의 언어와 음악 속에서 세계는 망가졌거나, 망가져가는 중이거나, 망가지기 직전이다. 그래서 그는 어차피 없어질 풍경이니 뒤돌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백치들”). 그 세계의 범위는 좁다. 마음의 중심에서 힘껏 팔을 뻗어 빙그르르 돌며 그린 원의 넒이 정도? 그러나 그곳은 그의 세상이다. 거기서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세계 밖에서 강렬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음반을 통해서도 그게 전해질 정도라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음반에서는 거기까지다. [Vol.2]는 [Vol.1]이 도달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 음울한 비전과 상상력을 갖고 있는 뮤지션이 이장혁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음반에서 과연 적절히 표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회의적이다. 달리 말해, 그가 목표하는 것은 아마도 절망을 잉크삼아 써내려간 시(詩)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도달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음악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순간에는 그런 의심이 들지 않는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반복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백치들”, 허무한 낭만에 찌들어 비틀거리는 “오늘밤은”, 제목만큼이나 서늘한 “얼음강” 등을 지나가는 동안은 말이다. 그러나 그 주술이 풀리는 곳에서는 성긴 언어가 평면적인 아르페지오와 충돌한다. 그건 그의 목소리로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챔버 팝의 어법과 민요풍의 멜로디를 구사하는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의 가사와 음악은 감당하기 어렵다. 듣는 쪽에서도 그렇고 곡 자체도 그렇다. 이 곡은 ‘절실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듬어지지 않은 것’으로 들린다. 그래서 이질적이고, 불만족스럽다. 이를 단지 취향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똑같이 외부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조”가 어색하지 않은 까닭은(이 곡은 조승희에 대한 노래다) 그가 거기서 의도적으로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론이 효과적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조”에서 이장혁의 상상력은 충분히 작동한다.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는 그렇지 않다. 그의 언어가 드러내는 것은 ‘시청자의 눈’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인상이다. 그럼으로써 음악과의 괴리는 한층 벌어진다. 참혹한 내용과 서정적 선율 사이의, 원래 의도했을지 모를 간격과는 다른 식으로 말이다.

이장혁을 언급하는 매체의 기사들, 그리고 인터넷의 반응은 이장혁의 신보에 대해 크나큰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존중받을만한 뮤지션의 존중받을만한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이 음반은, 그리고 이 음반에 대한 반응은 이상할 정도로 ‘윤리적’이다. 마치 그가 겪는 고통이, 그리고 그에 대한 표현이 우리가 짐진 무언가를 대속하기라도 하듯이. 어쩌면 그것은 고통과 절망의 몸짓이 ‘정서적 반응’에서 ‘윤리적 행위’로 옮아가게 된 오늘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다시 한 번, 알고 있다. 절망적인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취하는 절망적인 자세는 윤리적으로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윤리가 옳다고 음악이 옳을 수는 없다. 20090108 | 최민우 daftsounds@gmail.com

덧. 리뷰의 제목은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김유동 역, 길, 2005)에서 따 온 것이다. 제목을 계속 날로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6/10

수록곡
1. 백치들
2. 그날
3. 오늘밤은
4. 봄
5.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6. 나비
7. 청춘
8. 길냥이 왈츠 (inst)
9. 거짓말
10. 얼음강
11. 조

관련 글
이장혁 [Vol.1] 리뷰 – vol.6/no.19 [20041001]

관련 사이트
이장혁 공식 홈페이지
www.leejanghyuk.com
루비살롱 공식 홈페이지
www.rubysal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