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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 반성의 시간 – 씨앤엘 뮤직, 2008

 

 

짐승의 시간, 인간의 시간

‘어떡해야 만날 수 있나’ 반주도 없이 사내의 목소리가 흐른다. 이어지는 것은 기타의 아르페지오, 사내의 목소리는 텅 빈 동굴 같다.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나, 라고 읊조리는 사내의 목소리에는 삶의 무게만한 피로감이 주저앉아 있다. 백현진의 첫 솔로 앨범 [반성의 시간](2008)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어부프로젝트, 혹은 그 멤버인 장영규와 백현진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90년대 중반 홍대 앞 인디 씬에서 가장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낸 음악가’일 것이다. 그러나 백현진은 그렇게 짧은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얼핏 위악적이고 언뜻 서글픈 목소리와 멜로디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정체성은 소위 ‘홍대 앞 인디 씬’이라고 불리는 공간으로 수렴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속 아티스트(이상하게도 이 말은 한국에서 ‘예술가’라는 말보다 더 넓고 긍정적으로 들린다)이자, 홍상수와 박찬욱, 김지운 같은 감독들과 함께한 음악가이기도 하다. 장영규도 마찬가지다. 그는 방준석, 강기영(달파란) 등과 함께 ‘복숭아’라는 이름으로 [나쁜영화], [달콤한 인생], [얼굴없는 미녀] 등의 영화음악을 만들었고, 국악을 베이스로 하는 다양한 음악작업들을 해왔다. 그래서 어어부프로젝트와 장영규, 백현진이라는 이름은 지금 한국의 어떤 문화적 지표이기도 하다. 그들은 지금 한국대중문화의 한 지류를 가리키며, 이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그 지류에 근접해있다는 뜻이다.

그런 백현진의 솔로 앨범 [반성의 시간]은 처연하고 쓸쓸하다. 사실은 더 좋은 표현을 찾고 싶을 만큼 한없이 공허하다. 그 목소리에는 일종의 진정성이 존재한다. ‘진정성’이라는 말만큼 쓰기 위험한 단어도 없지만 이미 어떤 지점을 넘어선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대해서라면 괜찮을 것 같다. 날 것 같은 목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는 다소 동물적이다. 동물이라기보다는 짐승이라거나 수컷이라는 말을 쓰고 싶게 만드는 목소리다. 특히 “무릎베개”와 “학수고대했던 날”, “어떤 냄새”, “어른용 사탕” 같은 곡들은 앨범에 수록된 12곡의 사랑, 혹은 이별노래 중에서도 ‘징’하다. 피아노, 전기기타, 신서사이저가 지배하는 멜로디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도시의 어느 골목(뒷골목은 아니다, 그렇게 어둡고 축축한 정서는 아니라는 뜻이다)을 연상시킨다. 그 골목 어귀에 켜진 가로등,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한 선술집, 등이 굽은 노인들이 꽃처럼 모여 앉은 정자, 바닥에 함부로 버려진 담배꽁초, 전봇대 밑 얼룩 같은 토사물, 붉고 낮은 벽돌담, 쨍하게 차가운 새벽 공기 등이 어른거리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런 어스름한 이미지들이야말로 백현진이 지금 한국 대중음악 판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설명한다. ‘97년 초여름의 그 시간’, ‘딸린으로 가는 배의 2층 침대’, ‘막창 2인분에 맥주 13병’, ‘새벽 네 시 반’, ‘꽁치 통조림’, ‘서서울호텔 607호실’, ‘가스기기 기술교육원’, ‘새로 나온 12인치 노트북’, ‘건포도가 박힌 식빵’ 같은 너무나 구체적인 노랫말은 일상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고 그것이 만드는 것은 서사보다 이미지에 가깝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음악으로든 물감으로든 결국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고, 한국에서 이런 예술가들이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음악가로서 백현진은 그만큼 독보적이다.

그런데 이 앨범을 지배하는 것이 ‘실연의 경험’이고 그래서 지나치게 사적이지만, 그 때문에 백현진의 개인고백으로 이해하는 건 오해다. 그가 빚어내는 이미지는 모두 도시의 어느 구석들이기 때문이다. 버스, 골목, 술집, 호텔, 레스토랑이라는 도시적 공간이 앨범을 오롯이 관통한다. 강남의 거대한 빌딩숲 사이가 아니라 강북의 어느 지점을 관통하는 그 행적을 뒤쫓다보면 그의 발자국마다에는 도시에서 일어나고 잠을 자고 섹스를 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들이닥치는 그리움과 쓸쓸함과 공허함이 구정물처럼 고여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어부프로젝트에서 백현진의 목소리는 위악적이고 자학적이었다. 사운드는 가끔 공격적이기도 했지만 풍자적이었고 도대체 말도 안될 만큼 뒤죽박죽이기도 했지만 여기서 백현진의 목소리는 고독하다. 지쳐있고 쓸쓸하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수컷의 정서다. 마초라는 카테고리에 귀속되지 않는 남성성을 단호하게 지키고 있는 수컷. 그것은 처연하고 참 지랄맞은데 또 어찌 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를테면 추성훈이 내뿜는 성적 긴장감 같은 것이다. 그런 텐션은 성적 정체성을 초월해 작동한다.

[반성의 시간]은 그런 정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앨범이다. 어쩌면 30대 이상의 성인남자들이 꽤 좋아할 구석도 있어 보이지만 차라리 그런 정서에 매혹당하는 여성들에게 강렬할 것 같기도 하다. 꽤 멍청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백현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게 있다면) 진짜에 가까운 수컷이고 이 정도로 징한 사랑 노래를 부르는 수컷을 심지어 한국에서 발견하기란 징하게 어려운 일이다. 어깨를 움츠린 수컷 하나가 골목을 배회한다. 그의 뒷모습은 어딘지 주눅 든 것 같아서 쓸쓸하지만 견고하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아 왠지 안심이 된다. 그렇게 도시에서 살아남은 수컷의 이토록 징한 사랑노래모음집에는 신윤철, 방준석, 정재일, 박현준, 병준(고구마), 손경호, 김윤아, 그리고 창작모임 별이 함께했다. 6년간 사귀던 애인과 이별한 뒤 한 달을 떠돌며 만들었다는 노래들은 2003년과 2005년 사이에 녹음되었지만 이제야 앨범으로 공개되었다. 듣다보면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080705 | 차우진 nar75@naver.com

8/10

* [씨네 21]에 실렸음

수록곡
1. 무릎베개
2. 학수고대했던 날
3. 목구멍
4. 어머니 검도 교실
5. 닉의 고향
6. 깨진 코
7. 어떤 냄새
8. 여름 바람
9. 눈물 닦은 눈물
10. 보험 회사 대중탕
11. 어른용 사탕
12. 아구탕에서 나온 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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