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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경 – The Ballads – 서울음반, 2006

 

 

좋은 신파에 다가선

살다 보면 ‘쿨’한 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심지어 ‘쿨’한 게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은 때도 있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영화나 만화 속의 쿨한 장면들과는 달리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행동 관습이란 지극히 통속적이다. 언젠가 한 영화평론가는 박진표 감독의 영화 [너는 내 운명]에 대해 ‘진정한 통속극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요지의 호평을 던진 적이 있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와 같은 맥락에서 ‘진정한 통속성의 힘’에 대한 재고는 분명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정말로 ‘의미 있는 신파’란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성시경의 다섯 번째 정규작 [The Ballads](2006)에 그러한 관점이 무난히 적용될 수 있다고 확언하긴 아직 이를지 모른다. 허나 한편으로, 괜찮은 통속성과 현재 성시경의 음악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동시대 유행의 코드와는 별개로 성시경의 음향적 스타일은 꾸준히 국내 러브송의 한 계보, 그러니까 신승훈을 필두로 윤종신, 윤상, 유희열, 김동률 등의 1990년대 주류 가수들이 일궈온 한국팝의 한 경향에 그 누구보다 근접해있(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고, 바로 그러한 특성이 성시경의 여느 전작들보다 이번 앨범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The Ballads]를 올해, 나아가 2000년 이후 발매된 ‘발라드 스타일’의 주류 제품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음반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다. 성시경보다 한층 저자세로 자기만의 음악적 성격을 굳혀온 루시드 폴(Lucid Fall)이나 김연우 등의 발라드 메이커가 내놓은 작업물이 있기는 하지만, 주류 가요계 특유의 폭넓고 때론 추상적인 감수성을 포용하며 섬세한 곡조와 가사를 들려준 음반으로는 어쨌거나 성시경의 본 앨범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의 신보가 가지는 통속의 미덕은 선율과 노랫말 양 쪽 모두에 관여한다. 무엇보다 유명 프로듀서 김형석이 만든 세 곡을 비롯해(대표적으로 “그리운 날엔”) 윤종신(“거리에서”)과 하림(“바람, 그대”), 그리고 성시경(“사랑할 땐 몰랐던 것들”)이 각각 두 곡씩 작곡한 곡들의 멜로디는 일정 수준 이상의 탁월한 면을 지니고 있다. 전형적이긴 해도 촌스럽진 않고, 캐치(catchy, 멜로디를 외우기 쉬운)함이 짙지만 단조로운 것은 아니다. 비록 음반의 후반부로 갈수록 멜로디 라인의 광택은 바래지지만, 마지막 트랙에 루시드 폴의 “오, 사랑”을 리메이크해 배치한 점은 듣는 이를 코웃음 치게 하기보다 루시드 폴로 상징되는 아리따운 멜로디에의 지향성을 내비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부 언더 뮤지션들의 ‘어중간하게 멋 부린’ 노랫말들보다 훨씬 낫게 들리는 가사 부분 역시 [The Ballads]의 통속미를 높게 쳐줄 합당한 근거를 제공한다. 총 16개의 트랙 중 네 곡을 제외한 수록곡들의 전반적 주제는 ‘헤어진 사람에 대한 미련과 회한’ 정도이고 결국 그 내용조차 ‘상처 받았다 믿고 혼자 쓸쓸해지는 유치한 로맨스'(UMC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중에서)의 미화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처럼 ‘구린’ 일상의 모습들이 곧 우리네 삶의 여상한 진실이라는 점을 이 음반은 묵묵히 표현해내려 애쓰고 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나 지난 앨범 [다시 꿈꾸고 싶다](2005)에서 근 절반의 작사를 담당했던 심재희의 노랫말은, 적어도 ‘이별’을 가슴에 담고 있는 청자들에게 ‘신파적이지만 동시에 위안과 동정의 감정을 느끼게 해줄 만한’ 문장들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운 날엔”, “사랑할 땐 몰랐던 것들”, “그 길을 걷다가”)

2001년, 첫 싱글 “처음처럼”으로 방송계에 데뷔한 성시경 그 자신이 그간 얼마의 ‘음악적 발전’을 했는지를 따지는 일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그보다는, 걸핏하면 헛바람 불듯 넘실대는 관현악 세션(혹은 샘플)이나 부담스런 울먹임 창법으로 대중의 귀에 얄팍하게 호소하는 소위 ‘미디엄 템포 R&B’ 가요들보다 한결 울림이 깃든 감성 넘버들이 지금의 성시경 음악에 가깝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상업성과 대중성이 서로 언제나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점과 음역의 높이나 성량의 크기 따위가 가수의 자질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성시경의 [The Ballads]가 그 앨범명만큼이나 솔직하고 섬세한 통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 [너는 내 운명]과 같은 통속극이 관객의 눈물을 쏟게 만들 수 있었던 신파의 힘은 지나칠 만치 ‘극적’이다. 때문에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신파와는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남의 이야기로 흘린 눈물은 순식간에 말라버리는 법이기에, 극장을 나오며 소매로 한번 스윽 닦아버린 눈가에는 다시 ‘신파극보다 더 신파적인’ 자신의 현실들로 가득 차있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통속의 한계이자 예술의 한계이며 나아가 통속 예술의 한계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성시경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를 안다는 것은 곧 통속물의 제 몫과 맛을 알고 즐길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런 맥락에서 [The Ballads]는 즐길 만한 통속물인 것이다. ‘좋은 통속가요’에 대한 기대치가 갈수록 하향화하고 있는 요즘, 성시경이라는 주류가수의 이 음반으로부터 얻게 되는 만족감은 의외로 작지 않을 수 있다. 20061214 | 김영진 young_gean@hotmail.com

7/10

수록곡
1. 거리에서
2. 그리운 날엔
3. 사랑할 땐 몰랐던 것들
4. 그 길을 걷다가
5. 바람, 그대
6. 나 그리고 너야
7. Who Do You Love
8. 그 이름 모른다고
9. 비 개인 날
10. 새로운 버릇
11. 굿모닝
12. 기억을 나눔
13. 살콤한 상상
14. 지금의 사랑 (Feat. Ann)
15. 그 자리에 그 시간에
16. 오, 사랑

관련 사이트
성시경 공식 사이트
http://sikyung.mu2en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