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Dilla – Donuts – Stones Throw, 2006 작별의 브리꼴라주 지난 2월 10일 사망한 제이 딜라(J Dilla, 본명 James Yancey)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뮤지션으로 기억될 가능성은 굳이 언급하기에 새삼스러울 정도다. 그의 출발점은 1988년 결성되어 현재까지도 미국 언더그라운드 힙합퍼의 주요 계보에 당당히 속해있는 슬럼 빌리지(Slum Village)였다. 그 곳에서 프로듀싱과 엠씽을 겸하며 크게 성장한 제이 딜라는, 이후 소울-훵크-알앤비를 아우르는 창작력으로 많은 음악인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 트라이브 컬트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의 프로듀싱 팀 우마(The Ummah)에서의 활동을 비롯해 드 라 소울(De La Soul), 커먼(Common), 디안젤로(D’Angelo), 파사이드(The Pharcyde), 버스타 라임즈(Busta Rhymes) 등 다양한 주류 뮤지션들과의 작업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근 수년 간 제이 디(Jay Dee, 제이 딜라의 애칭)의 병치레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2003년 LA의 힙합 프로듀서 매들립(Madlib)과의 프로젝트 제이립(Jaylib)을 통해 [Champion Sound](2003)라는 다소 실험적인 합작물을 선보인 즈음, 그는 일종의 희귀성 자가 면역 질환으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제이 디의 이 마지막 신보 [Donuts](2006)는 뒤늦게 투병 생활에 들어간 그가 병실로까지 들여 온 턴테이블, 샘플러, 신서사이저, 드럼 머신 등의 기기를 사용해 인고 끝에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음반은 그가 죽기 사흘 전, 그의 서른두 번째 생일(2006년 2월 7일)에 발매되었다. [Donuts]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그래서 그의 여느 전작들보다 더 치밀하고도 치열한 기운이 느껴진다. 실험적이면서 동시에 탄탄한 구성미가 돋보였던 솔로 데뷔작 [Welcome 2 Detroit](2001)에 이은 두 번째 정규 인스트루멘틀 앨범 [Donuts]는, 그 간에 선보인 EP [Ruff Draft](2003)나 미발표 앨범 [Vintage](2003) 등의 작업물보다도 한층 현란해진 꼴라주 기법이 발휘된 수작이다. 그리고 그러한 장인 정신의 발로에는 바로 제이 디 고유의 샘플링 작법이 최전방에 자리하고 있다. 때로 어떤 평자들은 샘플링이라는 작법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힙합 본연의 태생적 성격을 확고히 의식하지 못하는(않으려는) 데에서 나오는 해석이기도 하다. 샘플링의 용도는 단지 변칙성을 부여하는 양념 내지 장식품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비유컨대 힙합의 샘플링은 마치 기타 주도적 장르에 있어 스트로크 주법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스트로크의 매너리즘’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당시 움트기 시작한 브롱크스 힙합음악의 본질이 바로 샘플링에 철저히 기반하고 있었으며 어느 누구나 비싼 악기를 직접 사서 연주하지 않아도 저만의 창작 세계를 표현토록 해준 그것이야말로 힙합 작법론 최상의 액면패이자 조커라는 사실은 제이 디의 이번 음반을 보다 유쾌하게 즐기기 위한 기본 요구사항이다. 덧붙여 [Donuts]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번외 사항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제이 디 자신의 목소리나 다른 게스트 보컬리스트들의 직접 참여 없이 대부분의 곡에선 각종의 보컬 샘플들이 전면적으로 차용되고 있다. 그리고 한 트랙이 끝나는 모양새나 다음 트랙이 시작되는 방식은 대체로 페이드인/아웃 혹은 청자가 완결된 형태로 받아들일 만한 방식이 아닌, 마치 플레이어의 스킵 버튼을 연속해서 쿡쿡 누르는 것처럼 이루어진다. 또한 한 곡을 제외한 나머지 30곡의 러닝타임은 각각 2분을 채 넘지 않으며, 첫 번째 트랙의 제목이 “Donuts (Outro)”, 마지막 트랙이 “Donuts (Intro)”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는 점도 독특하다. (특히 이 마지막 부분은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제이 디의 삶에 대한 관점이 녹아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앨범 제목이 도너츠(ⓞ)인 이유가 추측되는 지점이다.) 수록곡들의 가장 큰 무기는 무엇보다 ‘듣는 재미’를 보장한다는 점이다. “Stop”이나 “The Diff’rence”와 같은 곡에는 지난 세대의 소울, 재즈, 훵크 넘버들로부터 빌려온 멜로디 조각들과 제이 디 특유의 맑고 단단한 스네어 드럼 음색이 지극히 감각적으로 조합되어있다. 대표적인 예로, 많은 올드팝 팬들의 귀에도 반갑게 들릴 법한 10번 트랙 “Time: The Donut of the Heart”는 잭슨 5(The Jackson 5)의 히트곡 “All I Do Is Think of You”의 코러스 파트를 깔끔하게 오려 몇몇 첨가물들과 함께 꽤 그럴 듯이 붙여놓은 꼴라주다. 그는 악곡의 뼈대라 할 브레이크 비트(Break Beat) 고유의 반복미를 극대화하면서도 바이닐(vinyl, 레코드판)의 질감을 향긋이 풍기는 갖가지 샘플들을 그 위로 다채롭게 얹어내는 것에도 능하다. 그리고 여기에 그만의 미니멀한 멜로디 메이킹과 리듬감은 별 무리 없이 스며든다. 가령 12번 트랙 “Airworks”의 다층적인 루핑은 이 앨범이 지향하는 사운드를 명확하게 대변하는데, 멜로디컬한 샘플들의 향연과 견고한 퍼커셔닝 감각은 이 외의 다른 곡들에서도 무난히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재주가 가장 집중력 있게 총합되고 있는 곡은, 앨범에서 가장 긴 시간(2분 57초)을 달리는 2번 트랙 “Workinonit”이다. 긴장감 어린 한 마디 루프가 지속되는 가운데 그 위를 다양한 효과음들이 창조적인 박자 감각으로 종횡한다. 날선 기타음과 전자음이 주도하는 소리의 공간은 곳곳에 정교히 삽입된 보컬 샘플들에 의해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음악적 재미로 꽉 채워진다. 만약 [Welcome 2 Detroit]를 제이 디의 견실한 대표작으로 본다면, [Donuts]는 그의 욕심과 사색의 흔적이 역력한 음반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Donuts]가 부담 없이 길을 걸으며 즐기기에 큰 장애를 가졌다는 말은 아니다. 제이 디의 정갈한 비트메이킹 덕분에 처음에 귓가를 잠시 어지럽히던 음원들은 곱씹을수록 듣는 이의 체내에 원활히 흡수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1980년대 이전의 소울/R&B 음반에서 뽑아낸 ‘엑기스’ 샘플들 대부분이 아름다운 선율을 품고 있다는 점은 제이 디의 훌륭한 심미안을 다시금 입증한다. 설혹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던 [Welcome 2 Detroit]보다 손이 자주 가진 않을지라도 [Donuts]는 좋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곧 발매 예정인 그의 기대되는 유작 [The Shining](2006)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로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20060626 | 김영진 young_gean@hotmail.com 8/10 수록곡 1. Donuts (Outro) 2. Workinonit 3. Waves 4. Light My Fire 5. The New 6. Stop 7. People 8. The Diff’rence 9. Mash 10. Time: The Donut of the Heart 11. Glazed 12. Airworks 13. Lightworks 14. Stepson of the Clapper 15. The Twister (Huh, What) 16. One Eleven 17. Two Can Win 18. Don’t Cry 19. Anti-American Graffiti 20. Geek Down 21. Thunder 22. Gobstopper 23. One For Ghost 24. Dilla Says Go 25. Walkinonit 26. The Factory 27. U-Love 28. Hi. 29. Bye. 30. Last Donut of the Night 31. Donuts (Intro) 관련 사이트 Stones Throw의 J Dilla 페이지 http://www.stonesthrow.com/jdi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