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210103428-elteneleven

El Ten Eleven – El Ten Eleven –  Bar/None, 2005

 

 

오늘밤, 함께 걸어요

지난 여름의 어느 늦은 밤, 경부 고속도로 상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비지엠은 적막한 야밤 드라이브용으로 썩 괜찮은 시규어 로스(Sigur Ros)의 음반들. 두어 시간을 가느다란 가성으로 따라 흥얼거리고 있던 내게 옆자리의 친구 녀석은 지겹지도 않냐며 한 복사 시디로 갈아 틀었고, 그것이 엘 텐 일레븐(El Ten Eleven)의 [El Ten Eleven](2005)이었다. 시규어 로스의 나른하고 충만한 사운드에 대한 역반응이었을까. 첫 트랙 “My Only Swerving”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청량하고 절제된 기타 연주가 새초롬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나지막한 베이스음과 조근조근한 드럼 터칭이 차분하면서도 흥겨운 무드를 조성하고, 그 위로 안정적이고 맑은 전자기타음이 슬라이딩 주법을 가미하며 살랑댄다. 이어서 맛깔 나는 피킹의 연속. 깊은 새벽의 고속도로 가로등이 묘한 빛을 발하며 주기적으로 지나친다.

LA의 신예 인디 록 듀오 엘 텐 일레븐의 이 데뷔작은 앨범 내적인 유기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청자를 지루하지 않은 기타팝의 세계로 이끈다. 크리스천 던(Christian Dunn)은 흔치 않은 일렉/베이스 더블넥 기타를 사용하고, 팀 포가티(Tim Fogarty)는 어쿠스틱 드럼 및 전자드럼을 만진다. 특히 리듬과 화성의 양 영역을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던의 기타 연주는 단연 빛이 난다.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한 가지 들게 되는 확신은, 음반이 아닌 실황이 열 배는 더 감동적일 거라는 생각이다. 포스트록 계열의 인스트루멘털 음악이 스튜디오 레코드보다 라이브로서 반드시 더 듣기 좋을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도(물론 시규어 로스의 실황 비디오는 언제 봐도 좋지만), 엘 텐 일레븐의 공연에 대한 관람욕은 이어폰을 꽂은 채 거릴 걷다가도 불쑥불쑥 솟구친다. 이 도심 거리의 푸르스름한 저녁빛깔에도 왠지 궁합이 맞을 듯한 이 밴드의 음색을 가까이서 듣고 싶다. 함께 취하고 싶다.

엘 텐 일레븐의 가장 기본적인 사운드, 근간을 이루는 소리의 진원은 역시나 크리스천 던의 기타에 있다. 특이한 악기나 이펙터를 사용해 낯선 대기나 불안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음향으로 새로운 사운드를 추구하는 게 바로 이 밴드의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 그리고 그것의 주도적 역할이 바로 더블넥 기타가 만들어가는 멜로디와 리듬 라인에 있는 것이다. 귀를 잡아끄는 첫 곡에 이끌려 어느새 당도하게 되는 두 번째 트랙 “Sorry About Your Irony”는 버스(verse) 부분에 7/4박자를 섞임박자로 끼워 넣어 타악적 재미를 높이고 있는 곡으로, 여기서도 던의 창조적 피킹은 상당히 정갈하고 아름다운 나머지 ‘단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혹자에겐 키보드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자체가 이들의 맛깔난 그루비함을 즐기는 데 있어 무시 못 할 메리트일 수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로우 파이 사운드가 유난히 돌출되는 지점에서도 노이즈나 잔음을 거의 발하지 않는 깔끔함이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음반은 듣기에 편하다. 게다가 다소 몽롱한 공간감을 발생시키고는 있지만, 그 안에는 땅을 파는 우울함이라기보다 적적한 상쾌함이 배어 있다. 더욱이 “Lorge”와 같은 트랙에선 거센 힘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앨범 수록곡들의 전반적인 유기성과 응집력도 꽤 높은 편이다. 독창적인 곡의 전개가 인상적인 “Central Nervous Piston”을 지나칠 즈음이면 내 발걸음은 이미 엘 텐 일레븐의 템포와 촉감에 젖어있다. 그렇게 거릴 걷는 기분, 참 좋다.

텁텁한 미감의 몇몇 슈게이징 기타 연주곡들과는 달리 산뜻한 공간감을 소박하게 머금은 이들의 연주는, 앨범의 후반부로 가면서 더욱 안정적인 완급 조절을 해가며 청자의 감성 음계를 이끈다.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제목을 지은 “Fanshawe”에 이르면,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엘 텐 일레븐의 음향 스타일에 어느새 빨려 들어가 눈을 감고 발가락을 까딱이며 에어 기타를 치며 벤딩을 흉내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가장 후미에 놓인 “Connie”가 흘러나올 때 나는 이 업비트(upbeat)의 기타와 베이스, 드럼 전개가 들려주는 성실한 사운드를 향해 뜬금없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진다. 고마워요, 오늘 밤 위로가 되어주네요.

엘 텐 일레븐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세상이 추하고 더럽다는 판단을 내린 기독교의 분석이야말로 세상을 추하고 더럽게 만들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The Christian Resolution to find the world ugly and bad has made the world ugly and bad – Friedrich Nietzsche).’ 사실 이들의 기승전결이 비교적 뚜렷한 작편곡의 방식에서도 느껴지듯, 그리고 곡의 제목들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 음악적 나아가 정신적인 측면에 있어 꽤나 진중한 태도가 느껴지는 편이다. 의도적인 가벼움도, 그렇다고 의식적인 심각함도 아닌, 간결하고도 똑 부러지는 맛이 스며있는 엘 텐 일레븐의 음악은 그렇기에 차분하고 진지해 보인다. 어쨌든 반갑다. 그윽하게, 때론 경쾌하게 신발을 주시하며(shoe-gazing) 밤거릴 걷고 싶게 만드는 이 조용한 멋쟁이들의 출현에 반가움을 전한다. 국내에 라이센스만 되어준다면 더더욱 반가울 텐데 말이다. 20060126 | 김영진 young_gean@hotmail.com

9/10

수록곡
1. My Only Swerving
2. Sorry About Your Irony
3. Lorge
4. 1969
5. Central Nervous Piston
6. Thinking Loudly
7. Fanshawe
8. Connie
9. Bye Mom

관련 사이트
El Ten Eleven 공식 사이트
http://www.elteneleven.com
Bar/None Records 공식 사이트
http://www.bar-no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