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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Panic) – 04 – CJ Music, 2005

 

 

우주 볼펜

만약 음반사의 홍보문구대로 패닉이 정말 우리 시대의 음악작가라면, 우리 시대는 범상한 음악적 상상력을 비범한 천재적 재능으로 과대포장하는데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작가들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만약 우리 시대의 음악작가가 돈키호테 대신 로시난테를 소재로 다루면서 로시난테가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 폭풍을 뚫고 달리는’ 것(“로시난테”)을 희망의 액션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시대는 정치적으로 공정하고 정부미보다 더 빨리 소화되는 통속적 상상력이 작가정신으로 인정받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패닉의 네 번째 음반은 형광등에 오색 셀로판지를 붙이면 방안이 무지개처럼 빛날 거라고 생각하는 음반이다.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 직접 해 보라.

김진표가 ‘피처링’이 아닌 정식 멤버로 음반에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이 음반을 장악하는 것은 이적이다. 혹은 목소리 외에는 김진표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언제는 그렇지 않았느냐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하지만 패닉의 변태적 상상력이 극에 달했던 [밑](1996)에서, 김진표는 [Panic](1995)에서는 좋게 말해야 조력자에 불과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갈아치웠다). 그래서 이 음반은 이적이 낸 두 장의 솔로 음반이 가졌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훌륭한 편곡과 범상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얽힌 ‘음악성 있는’ 음반 말이다.

그래서 이 음반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대라면 전작들을 좋아하거나 싫어했던 이유와 같을 것이다. 그는 어떤 스타일을 시도하건 과유불급의 자세를 견지하고, 그래서 정말 과유불급의 음반을 낸다. 화려하긴 하지만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예쁜 종이컵같은 음반. 덧붙여 패닉의 음반이라고 해도 “눈녹듯” 같은 곡까지 김진표의 목소리를 넣어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이 곡에서 드럼통을 머리에 쓰고 중얼거리는 듯한 랩을 띄엄띄엄 들려준다. 그의 래핑은 “Mama”([밑])에서는 곡의 효과를 극대화시켰지만 “눈녹듯”에서는 사진기 셔터를 누르기 직전 갑자기 끼어드는 사람을 연상시킨다(만약 이 음반에 담긴 소리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밑의 관련글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음반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패닉의 1,2집이 갖고 있던 패기와 파격이 증발한 뒤 남은 축축한 흙덩어리 같다. 누구에게나 해당될 것 같지만 그 때문에 누구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한치도 보이지 않는/지리한 어둠 속에서/끝없이 걷고 있는/나는 어디에/빛은 어디에”(“나선계단”)와 같은 가사가 신용카드 빚 때문에 서울 근교의 어두컴컴한 콘테이너 창고에 납치되어 신장을 빼앗길 때만 기다리는 20대 젊은이의 공포를 다룬 것 같지는 않다. 노래 가사가 반드시 특정한 상황이나 대상을 지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그걸 핑계로(혹은 ‘열린 해석’을 핑계로) 흐릿한 감정을 애매하게 표현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힘을 내서 일어나면 어딘가에 있는 그 무엇을 언젠가는 찾게 되리라’는 감동적인 위로는(“길을 내”)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하고 싶어서 한 말인가? 어딘가에 있는 그 무엇을 찾긴 찾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냉정한 인간에 불과한 것인가? “균열”의 냉소와 분노에 대해서 우리가 상식적 동의 이상으로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이것이 패닉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패닉 역시 이런 경향에 기꺼이 동참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패닉의 네 번째 음반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이 음반을 네 번 이상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음반에는 분명 듣는 이들의 귀를 한순간이나마 잡아끄는 부분이 있으며(“태풍”, “눈녹듯”, “길을 내”) 그러한 부분들은 그저 좋은 환경 속에서 때깔 좋은 소리를 뽑아낸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패닉을 비롯한 ‘음악성 있는’ 뮤지션들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버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우리는 그 조그만 버팀목 위에 아흔 아홉 칸 짜리 대궐을 지을 수 있다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음반은 우주선 조종사들의 편의를 위해 나사(NASA)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개발한 우주 볼펜 같다. 러시아인들은 그냥 연필을 썼다. 20051228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3/10

수록곡
1. Intro – 재회
2. 균열
3. 태풍
4. 눈녹듯
5. 길을 내
6. 나선계단
7. 종이나비
8. 뭐라고?
9. 정류장
10. 로시난테
11. 추방

관련 글
이적 [막다른 길] – vol.1/no.2 [19990901]
이적 [2적] – vol.5/no.11 [20030601]

관련 사이트
패닉 공식 사이트
http://www.pani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