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 – 스트라스부르 컬렉션(Strasbourg Collection) – 사월의 봄, 2005 종(縱)과 횡(橫)의 아이러니 곱창전골의 사토 유키에가 중심이 되었던 음악연주회 불가사리(前 SCUM in Seoul)에서 간간이 라이브 공연을 펼쳤던 강민석은, 그것과는 별개로 생계유지용 각종 CM 음악을 만들었고 그 결과물로 2003년에 채 10분에 불과한 음반 [짝사랑]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공연에서는 [짝사랑]의 수록곡과는 다르게 미니멀하고 극단적인 엠비언트 연주로 각광받았는데, 요즘은 활동영역을 넓혀서 여러 단편영화음악도 만드는 바, 이 역시도 이번 음반 마지막 곡으로 수록되어있다. 아무튼 그의 연주성향을 익히 아는 사람들은 이처럼 극단적인 활동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지만, 이번 음반 [스트라스부르 컬렉션(Strasbourg Collection)]에는 그가 지향하는 바가 절연히 드러나 있기에, 본인 스스로도 이번 음악은 자신에게 있어 일종의 터닝포인트와도 같다고 밝히고 있다. 때문에 모 방송국에서 의뢰 받아 만들어진 전작 [짝사랑]이 -아쉽게도 음악이 프로그램에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한 줄로 이루어진 하이쿠 시와 같은 낭만자객형 멜로디를 구사하며 짧은 소곡임에도 시네마스코프의 이미지에 충실한 반면, 2004년 여름 유럽여행 중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라 쁘띠뜨 메종과의 공연을 계기로 만들어진 [스트라스부르 컬렉션]은, 멜로디컬한 분위기가 상당부분 의도적으로 거세되어있다. 더욱이 수록곡의 제목과 함께 기재되어있는 제작연도로 유추해 보건대 [스트라스부르 컬렉션]은 일종의 베스트 앨범과도 같지만, 다시금 새로운 마스터링을 거쳐 세월의 간극을 메우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주의 깊은 수용자라면 그가 어떤 음악적 과정을 거쳐왔으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반도가 어디쯤에 귀착하려하는지 알 법도 하다. 그것은 곧, 본인이 밝히는 바에 따르면 록음악의 악곡 구성적인 측면에서의 버스-코러스-버스(verse-chorus-verse)식의 종적구조를 지양하는 대신, 모든 것을 해체하고 다시금 재구성하려는데 있다. 물론 그의 음악에 이러한 기준이 어떤 식으로 적용되었는가에 대한 구분과 이해와 감상은, 듣는 이의 몫이다. 그러므로 그 이유가 어떻든 강민석의 [스트라스부르 컬렉션]은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화두를 던져준다. 하여 가장 대중적인 “우연의 놀이”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곡은 대부분이 귀를 자극시켜서 공감각을 발휘하려는 바, 전자음악이 어떤 식으로 소통 가능한 출구를 마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인 동시에 그것의 가장 적합한 형태는 무엇인지, 순수한 잡음과 음악에서의 노이즈가 갖는 한계는 무엇이고 그 경계는 또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질문의 도가니이며 그 정점에 여덟 번째 곡 “불면”이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핸드폰은 음원 기술발전의 원시적인 척도로서 하루가 다르게 화음의 수가 높아져서 점점 근접한 자연음으로, 듣기 좋은 소리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그것의 한계는 정해져있으니, 전자음의 태생은 다분히 운명론적이다. 그리하여 자연음의 동경으로 뱁새가 가랑이 찢어가며 황새 흉내내듯 따라가기보다는 그것에 거스르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것이 오히려 순리가 아닐지. 예를 들어 이솝우화의 한 토막을 인용하자면, 뱀에게 잡아먹히는 개구리가 하소연을 하자 뱀 왈(曰),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난걸 어떡해. 그렇다. 전자음이 원래 그런걸 어떡하냐고.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 순진하게 믿기보다는 다른 측면으로부터 역진화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민석의 음악은, 음악에 대한 호오(好惡)를 떠나 이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시도 혹은 그 과정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순례자처럼 고백한다는 점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이런 점으로 노이즈로의 회귀를 꿈꾸는 음악들, 김동섭의 [오즈 오로라]와 퓨어디지털사일런스(Puerdigitalsilence), 글래스 패사드(Glass Facade)와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 옐로키친(Yellow Kitchen), 그리고 최근의 별(Byul)이나 톡식바이어스플뤠르아이비(Toxicbiasfleurivy), 그리고 내가 미처 듣지 못한 수많은 뮤지션들의 작업을 지지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강민석을 ‘일단은’ 지지한다. 하지만 그것을 차치한 후의 다음의 나머지 부분들, 사운드의 에테르와 소스의 빈약함, 구성의 허술함이나 조악한 샘플 따위는 듣는 이의 입장으로서 신스팝의 날렵함과는 상당히 비교가 된다. 물론 뮤지션의 자의식이 강할수록 개입할 여지는 드러나지 않고 비교대상으로 적합하지 않으리라는 견고한 자세가 앞서겠기에, 다만 흐르는 소리와 그 소리가 흐르는 동안 소요되는 시간동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할까 막연해질 때도 있다. 생각만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강민석이 정의한 종적구조와 횡적 구조의 구분은, 마치 내게는 일본 문학에서 유행하던 사소설과도 같이 들리기 때문이다. 내적 고백으로서 전자음을 은밀히 동경하지만, 디지털 음원이 발전할수록 질리지 않는 음악과, 반대로 위악적으로 질리게 만드는 음악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란 어떤 근거로 성립되는 것일까. 사소설이 체험하지 않은 사적이야기로 쓰여져도 여전히 사소설인가. 종과 횡은 언제나 대치되는가. 그것의 연립은 수구인가, 진보인가. 물론 강민석의 음악에는 종횡의 구분이 어느 정도 나뉘어진 탓에 -한편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 실린 음악만을 가지고 추측할 수밖에 없고 또한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므로- 충분히 어떤 단계로 전이하려는 지의 상태는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돌려 말하자면 영화에서의 열린 구조를 지향하는 격인데, 그것이 음악에서는 얼마나 통용되는가가 문제이다. 그러니 결국 듣는 이에 따라서 지금까지의 어떤 음악보다 자유로움을 얻게 될 수도 있고 -이게 꼭 좋은 말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신경 쓰고 듣지 않는 이상 주변소음에 불과하여, 그 음악 때문에 방해받을 일은 전혀 없으니 이 또한 자유롭다 하겠다- 종적구조가 지니는 취약점, 다음진행은 어떻게 되리라는 짐작을 불허한다. 하지만 길에서 나오는 음악이 날 좀 보소, 사방팔방 꼬리치며 아부하는 애첩기질이 있으되 도달하기란 명왕성이겠지만 강민석의 음악 같은 경우 사랑하고 싶다고 고백하며 달려들어도 “난 관심 없소” 손사래를 치는 격이니, 한번 두 번 튕겨야 제멋이라 여기는 사람은 오히려 더 흥미를 느낄 것이오, 올 누드보다는 낙엽으로 중요부위만 가린 것이 더 섹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찾아올, 예상하기 힘든 타겟이다. 자, 그렇다면 듣는 이에게는 오히려 횡적 구조를 가장한 종적구조가 되어버릴 수도 있으렷다. 이쯤에서 내가 해석하는 횡적 구조란, 곧 시간과 함께 횡적 양상을 띠려는 작업의도라고 단정지어본다. 결국 음악외적인, 태도에 기인하는 것이며 ‘불멸의 이순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내가 듣기로는 여기까지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의 음악에 이러한 기준이 어떤 식으로 적용되었는가에 대한 구분과 이해와 감상은, 듣는 이의 몫이다. 그러니 각자 자신들이 얼마나 귀밝은지 한번 판단해보시길. 20050716 | 이주신 youhadbeenredsometime@hotmail.com 6/10 수록곡 1. 사랑의 순환 Love Circulation 200312 2. Stereo File 200009 3. Stereo File (Dark Side Mix) 200110 4. 횡단보도의 빛 The Lights of the Roundabout 200007 (링크) 5. 횡단보도의 빛 (물) The Lights of the Roundabout (Water) 200111 6. 횡단보도의 빛 (불) The Lights of the Roundabout (Fire) 200112 7. 백열등 Glow Lamp (live) 200302 8. 불면 Sleepless 200408 9. 우연의 놀이 The Playing of the Chance : 엔딩 크레딧 Ending Credit 200407 관련 사이트 사월의 봄 홈페이지 http://myhome.naver.com/aprilb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