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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립 – 반도의 끝 (EP) – 열두폭병풍, 2005

 

 

느릅나무 밑에서

[반도의 끝]이라는 제목과 CD의 포장지 겸 부클릿을 보고 있으면 마지막으로 땅끝마을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막 저무는 겨울이었고, 그곳은 온통 회색이었다. 회색인 것과 회색이 아닌 것 사이에는 새로 나온 비누와 예전에 쓰던 비누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다. 다음 날 돌아오는 기차에서 잠시 졸다 눈을 떴을 때 팔다리는 마른 찰흙처럼 뻣뻣했고 차창 너머로는 몇 시간 전에 보았던 풍경이 똑같이 흘러갔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면서 젖은 종이처럼 서로 달라붙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왔다.

이런 기억이 이 노래들, 가벼운 나르시시즘이 떠도는 가사와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청명한 사운드와 ‘싸비’보다는 선율의 흐름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노래들과 어울리는 기억은 아니다. 끊임없이 지직거리는 LP 효과음이 아련한 기분을 자극하고 이아립은 차라도 마시는 것처럼 평화롭게 노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일 귀에 잘 들어오는 곡은 셰이커와 실로폰의 활용이 귀에 밟히는 “그리스의 오후”이다.

나머지 곡들은 위의 기본 방침에 약간씩 변화를 준다. 실험적이라기보다는 세심하게 고려한 듯한 변화들이다. 위악적이지도 조악하지도 않다. 이른바 ‘모던 록’ 풍의 “모든걸 결정할 땐”은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러밍 아래 전기 기타의 트레몰로가 아스라이 깔린다. “반도의 끝”에서는 어쿠스틱 기타를 전면에 내세운 가운데 보컬은 사이다 거품처럼 보글거리는 전자음에 섞여 희끄무레한 소리를 낸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삽입된 “풀”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따온 것 같은 효과를 내려 한 것 같다.

이 모든 것들, 세계 지도를 넣은 부클릿의 디자인과, 그 안에 써넣은 시와(혹시 핵폭발에 대한 내용?), 어딘가에 대한 동경과 심각하지 않은 나르시시즘이 뒤섞인 가사와, 무난하지는 않지만 부담스럽지도 않은 음반의 사운드가 모여 ‘가볍게 한 꺼풀 둘러 쓴’ 듯한 무드를 만들어낸다. 귀밝은 이들이라면 무엇무엇을 닮았다고 말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 정도로 깔끔하게 마름질해두면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클릿에는 이 음반이 ‘첫 번째 병풍’이라 쓰여 있다. 좋은 출발이다. 남은 열한 개의 병풍이 다 그려지는 날을 기다리겠다. 24시간 불가마 사우나에서 봤던 인간 병풍 이야기는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20050527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6/10

수록곡
1. 그리스의 오후 (nameless afternoon)
2. 보리밭 (boribat)
3. 모든걸 결정할 땐 (close to you)
4. 반도의 끝 (end of the bando)
5. 풀 (pool)

관련 사이트
열두폭병풍 공식 홈페이지
http://sugarpap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