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유럽 혹은 아시아

터키는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를 통해 한국과 급격히 가까워진 나라다. 한국전쟁 시기 터키가 한국에 군대를 파병했다는 역사적 사실까지도 작용했다. 이데올로기 문제를 떠나서 다른 나라와 친선관계가 돈독해지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과연 터키의 문화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곰곰 생각해 보면 한국과 터키의 문화는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멀어 보인다. 지도를 보면 터키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을,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일본은 ‘섬’이므로 ‘대륙’에는 속하지 않으므로 제외하고, 러시아의 아시아 대륙 영토도 일단 무시하자)

그런데 이상하다. 월드컵 대회에서 터키는 아시아 대표가 아니라 유럽 대표로 출전했다. ‘아시아’나 ‘유럽’이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터키가 유럽에 속하는지, 아시아에 속하는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지도를 들여다 보면 에게해(海)를 사이에 두고 동쪽(동남쪽)은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북서쪽)은 발칸 반도이다. 터키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발칸 반도 일부에도 터키의 영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왕년의 수도였던 이스탄불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영토를 가진 나라는 러시아와 더불어 터키가 유이무삼(唯二無三)할 것이다. 그래서 이곳 역시도 유럽과 아시아의 점이지대라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이곳도 발칸 반도처럼 ‘문화적 용광로’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터키만큼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도 드물기 때문이다. 이른바 ‘돌궐족’이라고 부르는 터키 민족은 민족적 자부심과 응집력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때는 유럽 일원까지 영토로 다스렸던 오스만 터키 제국의 후예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자부심과 응집력이 때로 ‘문화적 다양성’을 희생할 때가 있는데 터키의 경우 어땠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터키는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가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면서부터 현대국가의 면모를 갖춘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임을 선포했지만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랍과는 구분되는 문화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즉, 터키의 뿌리가 ‘중앙아시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아랍 반도의 이슬람국가들과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정책적 노력의 결과 아랍권 나라들의 음악문화보다는 아르메니아, 그리스 등 인근 국가의 음악문화와의 상호영향이 강하다. 유태인이나 집시같은 소수민족의 음악문화도 남아있다.

아라베스크, 메블레비, 파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상하다. 이제까지 터키의 대중음악의 주류는 아라베스크(Arabesk)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적인 대중음악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음악이고 아랍권 대중음악의 주류, 특히 이집트의 대중음악과 유사한 특징도 보인다. 즉, 터키에서 ‘아라베스크’라고 부르는 음악은 아랍 음악이 아니라 터키 음악이다. 아라베스크는 노동계급을 비롯한 하층계급에서 인기가 좋다. 한국에서 ‘왜색’이 강한 트로트가 하층계급의 문화로 정착한 것과 비슷한 현상일까… 아무튼 서양이 팝 음악의 어법에 ‘오리엔탈’한 느낌이 가미된 음악이고 댄스 리듬이 강하다.

한편 터키 외부에서 아라베스크보다 더 많이 알려진 터키 음악은 메블레비(Mevlevi)라고 불리는 탁발승들의 염불 외는 음악이다. 이슬람의 수피 종파(波)에 속하는 성직자들의 음악인데, 아타튀르크 치하에서 민족주의가 강성한 무렵에는 문화적으로 제재를 받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남아 있다. 서양인들에게 이국적 흥미를 던져주는 음악으로 어느 정도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는 음악이기도 하다. 터키인들의 대다수가 즐기는 음악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터키 음악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상’을 규정해주는 음악이다.

아라베스크와 메블레비라는 터키의 음악 문화의 양 극을 이루는 음악이다. 현실은 이것보다 훨씬 풍부하다. 특히 터키의 대표적 악기인 사즈(saz)는 대규모의 교향악단으로 합주되고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서 정책적으로 육성되어 왔다. 네크가 긴 모양의 루트인 사즈(saz)는 가장 터키적인 악기로 인식되고 있다. 사즈 중심의 오케스트라 음악을 흔히 ‘TRT 음악’이라고 부르는데 TRT란 ‘Turkish Radio and Television Station’의 약자다. 한국으로 치면 KBS에 해당되는 국영방송국이다.터키에 존재하는 ‘고전 음악’은 TRT 음악을 가리킨다. TRT 음악은 현대적 작곡물도 많이 있으며 우디 흐란트(Udi Hrant)라는 거장 연주인도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와 달리 집시들의 음악은 ‘파실(Fasil) 음악’이라고 불린다. 집시 음악은 이스탄불의 나이트클럽이나 레스토랑 등지에서 광범하게 연주되고 있다. 이들 집시 음악은 클라리넷, 다부르카, 바이올린 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고전 음악’인 TRT 음악과 악기편성은 유사하다. 그렇지만 해석이 매우 다르다.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과 집시들이 실제로 연주하는 음악이 다른 것과 비슷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정확하고 엄밀하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광적으로 연주한다. 파실 음악으로는 ‘터키의 베니 굿맨’이라고 불리는 클라리넷 연주자 무스타파 칸디랄리(Mustafa Kandirali)라는 전설적 이름이 전해 내려온다.

현대적 대중음악과 아나톨리아 록(anatolia rock)

이상의 음악들은 ‘고전’ 음악이거나 ‘민속’음악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보다 현대적인 대중음악은? 이런 스타일의 음악은 외즈귄(Yzguin)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음악인은 영화 [욜(Yol)]의 음악을 맡은 쥘퓌 리바넬리(Z lfu Livaneli)일 것이다. 리바넬리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에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와 마리아 파란두리(Maria Farandouri)같은 그리스의 거물급 음악인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확고하게 쌓았다. 외즈귄은 기타와 베이스 등 서양의 악기를 도입하고 ‘리얼’한 가사를 가지고 있어서, 터키의 좌파 지식인이 선호하는 음악이 되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 초반으로 가면 쎔 카라까(Cem Karaca)라는 전설적 인물이 주도한 ‘아나톨리아 록 무브먼트’에 대한 이야기도 접할 수 있다. 이 전설적 인물은 1980년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독일로 망명했고 그 뒤 외잘(Ozal) 정부가 들어서 민주화가 진행된 1987년 고국으로 귀국하여 활동을 재개했다. 물론 새 정부에 협력하면서 전설적 지위도 조금은 손상을 받았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록 음악의 기본 어법에 서양 고전음악의 벨 칸토 창법을 결합시킨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이다.

한편 록 음반의 국제적 컬렉터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인물은 에르킨 코라이(Erkin Koray)다. 그의 음악은 어떨 때는 ‘싸이키델릭 록’으로, 다를 때는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되는데, 특히 그의 기타 연주는 록 기타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동양음악의 음계를 절묘히 섞어넣은 독특한 것이다. 한국의 음반 컬렉터들은 그를 ‘터키의 신중현’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표현이 많은 것을 설명해 줄 것이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공감되는 표현으로 보이는데, 한 예로 독일에서 발매된 컴필레이션 음반 [Love, Peace and Poetry: Asian Psychedelic Music]에서도 에르킨 코라이의 곡 “Istemem”이 수록되어 있고, 신중현과 더 멘의 “아름다운 강산”도 수록되어 있다.

정작 터키에서 에르킨 코라이는 터키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부르고 있으니 사견으로는 지미 헨드릭스보다는 신중현에 더 가까운데, 그 이유는 서양의 록 음악(특히 싸이키델릭 록)의 사운드를 자국의 음악적 전통과 결합시키려는 외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음계, 리듬, 창법, 가사 모든 면에서 ‘영락없는 록 음악이지만 독특한 향취가 있다’는 짧은 평으로 자세한 설명을 대신한다. 즉, 서양화와 민족주의 사이의 문화적 협상의 절묘한 산물이다. 최근작인 Erkin Koray [Devlerin Nefesi](Ada Musik 99264, 1999)은 ‘거인의 호흡’이라는 뜻의 앨범 제목처럼 녹슬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쎔 카라까나 에르킨 코라이는 ‘고전’으로 남아 있지만, 현재의 터키 사운드(혹은 아나톨리아 사운드)를 대표하지는 못한다. 이제 터키 팝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세젠 악수: 터키 팝의 여왕

대중가수가 새 음반을 발표한 사건이 국영방송국의 첫 번째 뉴스가 되는 경우가 있을까. 내가 아는 것은 ‘터키의 국민 디바’ 세젠 악수(Sezen Aksu)가 1995년 [Isik Dogudan Yukselir]을 발표한 일이 유일하다. 터키라는 나라가 원체 평온하고 심심해서 뉴스 거리가 없어서?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음반이 나올 무렵 터키 제 1의 도시 이스탄불에서는 종교집단 사이의 분쟁이 있었고, 이라크와의 접경지대인 남동부에서는 쿠르드족과의 분쟁이 가열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민심을 호도하기 위해? 그렇지만 세젠 악수가 단지 대중스타가 아니라 정치적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도 제대로 짚은 것은 아니다.

1954년 터키의 이즈미르(Izmir)에서 태어난 세젠 악수는 대중음악의 길에 들어서기 이전 고전음악에서 성악을 공부한 경력이 있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계 작곡가인 고(故) 온노 툰츠보야씨안(Onno Tun boyaciyan)과 파트너쉽을 이루어 1975년 [Haydi Sansim]을 발표한 이래 20장이 넘는 정규 앨범을 발표하면서 ‘논란이 없는 터키 팝의 여왕’으로 군림해 왔다. 초기의 음악 스타일은 ‘키보드를 적절히 활용하여 풍성하게 편곡된 팝 음악’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젠 악수의 음악은 아라베스크의 ‘대중적(천박한?)’이고 ‘동양적’인 음악과 외즈귄의 ‘엘리트적’이고 ‘서양적’인 음악의 장점을 겸비한 것이다. 서양의 영향을 개방적으로 흡수하면서도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잊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소울풀한 목소리를 들으면 ‘터키의 에디뜨 삐아프’라는 평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별명은 ‘작은 참새’라는 뜻의 미닉 세르쎄(Minik Serce)이다. 실제로 그녀의 초기작인 1978년작 [Serce]의 세 번째 트랙에는 “Minik Serce”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프랑스어 ‘piaf’의 뜻을 찾아보면 된다).

음반으로 승승장구하고 자유주의적 정권의 들어선 1980년대 중반 이후 그녀는 인기 가수를 넘어서 영향력있는 명사가 되었다. 그녀는 공연과 캠페인 등을 통해 환경문제, 여성문제, 인권문제 등에 대해 발언과 행동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Cumartesi Anneleri(Saturday Mothers)’라는 모임을 주도하면서 독재 정권 시절 ‘실종’된 아들을 찾는 행동이다.

이런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전쟁이나 쿠르드족 문제같이 ‘국제 문제’에 대한 개입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호에 소개한 보스니아 출신의 음악가인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아 함께 [Dugun Ve Cenaze](2001)을 발표한 것도 이런 국제적 관심의 일환일 것이다. 이 음반은 고란 브레고비치가 다른 음악인과 작업한 여러 작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을 수 있다.

진정한 유라시아 음악?

1990년대 이후 레벤트 윅셀(Levent Y ksel), 깐단 에르쎄틴(Candan Ercetin), 세브넴 페라(Sebnem Ferah), 세르타브 에레네(Sertab Erener) 등 세젠 악수의 ‘제자들’이 터키 팝을 잇고 있다. 그렇지만 세젠 악수의 지위는 – 또 한명의 슈퍼스타인 타르칸과 더불어 – 아직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녀의 공연에는 통상 20명 안팎의 오케스트라가 등장한다. 이는 대체로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같은 서양의 악기들, 사즈(saz), 우드(oud), 피리같은 터키의 악기, 그리고 서너명의 백킹 보컬으로 구성된다.

공연장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대해서 ‘고대와 현대를 횡단하는 분위기’,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넘나드는 분위기’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런 분위기가 가장 ‘터키적’인 것 같다.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고 이를 현대화시키는데 일정한 성취를 이룩한 나라의 음악문화라는 뜻이다. 한국인의 귀에는 다소 ‘촌스럽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전통음악은 박제화 되고 대중과 괴리된 채 남아 있을 뿐이고, 대중음악은 서양의 유행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한국의 음악문화의 현실보다는 차라리 이런 방향이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 점에서 터키의 음악은 터키인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인 케밥을 닮아 있다. 서양도 동양도 아니고,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문화. 케밥을 맛보면서 터키 음악을 듣고 싶으면 가리봉동에 가면 된다. 20041210 | 신현준 homey81@empal.com

* 케밥에 대해서는 한 웹사이트의 설명을 옮긴다. “kebob : 1. 얇게 썬 양고기나 쇠고기, 닭고기를 긴 꼬치에 꿰어서 숯불에서 돌리면서 굽는 터어키 전통 요리. (사진은 터어키 음식 전문점 살람의 케밥. 긴 칼로 익은 부분을 잘라내어 쓰레받기처럼 생긴(^^;;) 도구에 받는다.) 2. 해물, 고기, 야채등을 꼬치에 꿰서 구운 요리”(http://www.orio.net/dic/ka/kebob.htm)

* 월간 [복스]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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