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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얼터너티브 무브먼트의 불꽃이 사그러들던 시절에, [릴리스 페어(Lilith Fair)]라는 공연이 있었다. 사라 맥라클란(Sarah Mclachlan)이 주도한 이 공연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3회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얼마 전 부천영화제에서는 그 다큐멘터리 필름인 [Lilith On Top](2001)이 상영되기도 했다. 릴리스는 이브 이전에 존재했다고 하는 최초의 여성인데, 그 기원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밀교에서 유래한 ‘블랙 마리아’전통의 맥락으로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소설 [다빈치 코드]에도 이 이야기는 자세하게 나온다). 릴리스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흙으로부터 태어났으며(그래서 아담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으며) 아담보다 지혜로운 여성이었는데, ‘순수한 자유의지’에 따라 신과 아담의 지배를 거부하고 날개가 꺽인 대천사 루시퍼를 따라 에덴 동산을 떠나버린다. 이 매력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신화가 페스티벌의 형태로 부활된 것이 바로 [릴리스 페어]였다. 여성들의 음악축제라는 의의를 넘어 새삼, 대중문화란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충돌하는 긴장감 위에 형성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역설한 행사이기도 하다.

2000년, 한국에서는 [여樂여樂]이라는 공연이 있었다. 제목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여성 음악 축제’가 컨셉트인 공연이었다. 한영애, 이은미, 이상은 등이 참여한 이 행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음악축제였다. 그리고 2004년 11월 26일, 두 번째 행사가 열린다. 이번 공연의 컨셉트는 ‘한국 여성음악의 역사’다. 윤복희를 필두로 한영애와 이상은, 윤미래와 네스티요나, 그리고 지현 등이 참여한다. 특히 윤복희의 리스트업은 의외이면서도 수긍할 만 하다. 물론 현역과 마찬가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인순이가 있긴 하지만, 소울과 록, 악극과 판소리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반경을 넓혀온 윤복희란 이름의 무게가 그에 비해 모자라거나 미흡하지 않다. 물론 [릴리스 페어]와 [여樂여樂]은 다른 행사다. [릴리스 페어]를 모델로 삼았지만, [여樂여樂]을 온전히 ‘여성음악축제’로 만들기엔 1990년대의 미국과 200년대의 한국의 환경과 조건이 너무나 다른 게 사실이다. 여성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음악 축제로 처음 기획된 [릴리스 페어]가 백인 여성 아티스트 중심의 리스트 업을 탈피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미 출신의 여성 아티스트들과 레즈비언 아티스트를 포함시키고, 나아가 모든 공연 관계자들을 여성으로 채우는, 말 그대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축제로 거듭나는 과정이 미국에서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듯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의 한국에서 당장 그런 공연을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란 작은 변화들의 총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한국에서 멋진, 의미있는 여성음악축제를 보게 될 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즐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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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2000년 즈음부터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여성이 화두가 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런 흐름은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 양태는 21세기에 이르러 조금씩 달라졌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미소녀 보컬 그룹들은 S.E.S와 베이비복스를 거론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일반화되었고, 그에 맞춰 미소년 보컬 그룹도 진화를 거듭했다. 그와 동시에 여성 보컬을 앞세운 록 밴드들이 등장해서 여성파워라는 미디어의 반응을 끌어내기도 했다. 물론, 짚어야 할 것이 한 두 개도 아니고 따라서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런 변화들이 재미있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여성들은 단지 자본의 대상이 되는 소비자로부터 자본을 통제하는(시장을 좌우하는), 역설적으로 시장의 핵심적인 위치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1990년대 후반 즈음부터 대중문화의 장(場)에는 사회적으로 합의되거나 합의되지 않은 여성성(들)이 다양하게 발현되었고, 그것은 대중적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자본의 논리 때문이든 아니든, 여성이 섹스와 관계의 맥락에서 중심에 위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왜냐하면, 대중 문화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긴장감 위에서 뿐만 아니라, 자본과 반자본,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의 긴장감 위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소위, 대중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그저 즐기는 것처럼 보여도, 그 나름의 이유들이 존재하고, 그 이유들은 모든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여성 보컬 음악이 유행하고, 여성이 소비의 주체로 떠오르는 현상을 남성 중심의 대중음악계에서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오롯이 내기 위한 전초전이라고 해석할 것인지, 보다 확장된 상업적 섹슈얼리티의 포장이라고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서 확언을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다만, 대중음악이란 순수한 쾌락이면서 이데올로기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의 반영이기도 하다는, 다면적인 부분들이 복합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영역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기왕에 그렇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자주 들리기를 희망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아가 미국의 여성학자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이 여성망명정부를 공상하며 혁명적 세계관을 농담처럼 유쾌하게 제시했듯이, 어떤 이는 브라운관 앞에서, 혹은 씨디 플레이어 앞에서, 혹은 음반 매장 앞에서 여성 망명 ‘페스티벌’에 대한 공상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법이다. 그래, 사실 20XX년에 동아시아의 어느 무인도에서 한 보름동안 열리는 ‘아시안 여성 록 페스티벌’을 기대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아 그런데, 이거 정말 멋지지 않을까?). 20041120 | 차우진 lazicat@empal.com

관련 사이트
[여樂여樂] 공식 사이트
http://www.yeoroc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