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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La Soul – The Grind Date – Sanctuary Urban/Ales Music(라이선스), 2004

 

 

검은 보헤미안, 다시금 길을 떠나다

힙합에 관한한, 드 라 소울(De La Soul)은 나에게 헤어진 첫사랑 같은 존재다. 뉴욕 시 교외 롱아일랜드 출신 20세 청년 트리오가 15년 전 내놓은 데뷔앨범은 당시 거의 중독적인 마력에 가까웠고, 어렵게 구한 수입 엘피(LP)는 1980년대 후반 그 ‘열악한’ 대학 시절에 친구들 몰래 간직한 값진 보물과도 같았다. 물론 내가 힙합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된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해 준 것도 이 음반이었다. 드 라 소울의 [3 Feet High And Rising](1989)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묻어둔 가장 소중한 음반 중 하나이기에, 지난 15년간 이들 트리오의 부침(浮沈)을 지켜보며 그들이 일종의 애증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드 라 소울의 7번째 정규앨범 [The Grind Date]는 예기치 않은 시점에 예기치 않은 맥락에서 발매되었다. 데뷔앨범 이후 동고동락했던 토미 보이(Tommy Boy) 레이블과 결별하고 비욘세(Beyonce)의 아버지 매튜 놀스(Mathew Knowles)가 운영하는 생츄어리 어번(Sanctuary Urban)에 이들 트리오가 새롭게 둥지를 튼 것도 그렇고, 이 앨범이 2000년 이후 진행해온 자신들의 ‘AOI’ 프로젝트 연작의 마지막 3부인 ‘디제이 음악’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음반이란 점도 그렇다. 드 라 소울의 카멜레온 같은 음악 여정을 고려한다면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이유로 드 라 소울이 이 음반을 통해 음악 경력의 두 번째 전환점을 맞이하는 게 아닌 가 조심스레 점쳐보게 된다. 즉, 네 번째 앨범 [Stakes Is High](1996)를 통해 스스로를 강박하던 ‘블랙 보헤미안’, ‘사이키델릭 힙합’ 혹은 ‘얼터너티브 힙합’, ‘네이티브 텅(Native Tongues)’ 이미지로부터 완전한 해방 선언을 했다면, 이제 [The Grind Date]에서 이들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상업주의와 대안적 힙합 사이에서 부유하며 잃어버렸던 자아를 되찾으려 혼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앨범감상에 앞서 크레딧을 쭉 살펴본다면 [The Grind Date]가 자칫 전작인 AOI 시리즈 1, 2부와 큰 차이가 없지 않나 우려를 할지도 모른다. [Art Official Intelligence: Mosaic Thump](2000)와 [AOI: Bionix](2001)는 적절한 미디어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호화판 게스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데다 R&B 풍의 훅 중심 트랙들이 지배적이었고, 1990년대 중반 이전 음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날카로운 사회 풍자의 맛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앨범은 당대의 실력파 게스트 프로듀서와 엠씨들을 초빙하되, 훨씬 더 취사선택해 각 트랙마다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무엇보다 드 라 소울 본인들, 특히 포스드너스(Posdnous)와 데이브(Dave 혹은 트루고이(Trugoy)) 콤비의 라임과 엠씨잉이 단연 두드러진다. 더욱이 너저분한 스킷(skit)들을 제외하고 12개의 트랙(국내 반은 13트랙)으로 비교적 간결한 50여분의 감상 시간만을 허용해 듣는 즐거움을 배가한다.

AOI 시리즈에서 감각적인 프로듀싱을 선사했던 수파 데이브 웨스트(Supa Dave West)와 함께 이번에는 제이 딜라(J. Dilla 혹은 제이 디(Jay-Dee)), 매들립(Madlib), 나인쓰 원더(9th Wonder) 같은 당대 최고수들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인상적인 트랙들을 주조하고 있다. 물론 각 프로듀서 고유의 색채는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곡은 유려한 소울 샘플을 사용한 맛깔스런 훅과 온 몸을 들썩이게 하는 신선한 비트의 사운드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앨범의 첫 싱글로 발매된 “Shopping Bags (She Got From You)”는 그 단적인 예다. 파편화되고 미니멀한 비트가 비음의 매끄러운 소울 코러스와 함께 반복되는 가운데 물질만능주의를 조소하는 포스드너스와 데이브의 경쾌한 래핑이 돋보이는 이 곡은 매들립의 지금껏 작업 중 가장 ‘주류친화적인’ 프로듀싱으로 손꼽을 만하다. 물론 “Verbal Clap”에서 제이 딜라의 공헌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배경음처럼 떠돌아다니는 건반과 은근한 스네어 드럼 연주를 중심으로 다소 성긴 듯하면서도 밀도 있는 비트가 엠씨들의 목소리를 묻어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과시한다. 한편,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Spike Lee)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나인쓰 원더의 “Church”가 ‘가스펠 힙합’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면, 드 라 소울의 네 번째 멤버라고 해도 좋을 수파 데이브 웨스트가 프로듀스한 “It’s Like That”은 근사한 모던 소울의 향이 물씬한 트랙이다.

앨범의 후반부는 게스트 엠씨들과 드 라 소울 멤버들 간의 ‘랩 배틀(rap battle) 이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앨범을 통해 처음 이름이 소개된 버타 버시스(Butta Verses)가 참여한 “No”를 예외로 한다면, 다른 곡들은 피쳐링 엠씨들과 드 라 소울간의 솜씨대결이 실로 흥미만점이다. 고스트페이스(Ghostface), 커먼(Common), 엠에프 둠(MF Doom) 같은 당대 최고의 엠씨들이 나대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라임을 선사할 뿐 아니라, 심지어 플레이바 플라브(Flava Flav)의 목소리까지 여전히 칼칼하기 그지없다. 특히, 향수 어린 보컬 코러스와 브라스 사운드를 배경으로 고스트페이스의 유려한 랩이 날아다니는 “He Comes”와 변화무쌍한 비트를 따라 자유로이 완급을 조절하는 엠에프 둠의 엠씨잉 재주를 감상할 수 있는 서사시 “Rock Co.Kane Flow”는 한번만 들어도 한참 귀를 맴돌 정도로 인상적이다.

물론, 게스트 프로듀서들과 엠씨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The Grind Date]의 진정한 주인공은 드 라 소울 본인들이다. 이 점은 전작 AOI 시리즈 앨범들과 이 음반을 구별해주는 핵심 포인트이기도 하다. 심지어, 반복해서 듣다보면, 까메오 엠씨들이 빛을 발하는 건 본인들의 재능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백전노장 트리오가 이들을 제대로 ‘지도’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잠정적 결론까지 내리게 된다. 사실 [Stakes Is High]에서 정점에 이른 후, 드 라 소울은 자신들의 가장 큰 무기인 ‘엠씨잉 마법’을 상실한 듯했다. 내성적이고 비밀스러운 조크와 유머,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보헤미안적 자유 선언 같은 청년 시절의 매력은 사라졌고, 심지어 설교적이다 싶을 정도의 힙합 문화와 사회에 대한 비평 역시 어느새 꼬리를 감췄다. 하지만 앨범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The Grind Date]에서 이들 트리오는 다시금 성실하고 진지하게 힙합과 사회에 대해 솔직한 얘기들을 시도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자신들의 워드플레이 재주를 실컷 뽐내는 라임 역시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가령 타이틀 트랙 “The Grind Date”에서 포스드너스 특유의 수수께끼 같은 인용구들과 데이브의 거칠지만 절묘한 각운은 옛 생각을 절로 나게 한다. “Come On Down”, “No”, “Future” 같은 트랙에서 이들이 요즘 잘 나가는 엠씨들을 질타하고 노장다운 허세를 마음껏 부리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리라.

드 라 소울의 기념비적 데뷔앨범 [3 Feet High And Rising]이 세상에 나온 지도 어언 15년이 흘렀다. 그 사이 미국 힙합의 지형도는 너무도 많은 수정과 교정이 이루어졌다. 사실, 1990년대 초반 대안적 힙합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네이티브 텅 패거리 대부분이 사라진 와중에, 드 라 소울만이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기적 같은 행운일 수도 있다. 물론 1990년대 후반 이후 드 라 소울의 살아남기 전략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레이블과 함께 재출발하는 드 라 소울의 새 앨범은 그들이 제 3의 음악 인생을 시작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단순한 생존의 몸부림을 넘어, 노장으로서 자신감과 새로운 세대 힙합 사운드를 수혈하려는 욕구의 조화가 단연 두드러진다는 말이다. [3 Feet High And Rising]이 가져다 준 15년 전의 충격을 애타게 원한 게 아니라면, [The Grind Date]는 참으로 만족할 만한 근래의 수작 음반임에 틀림없다. 물론 드 라 소울의 최근작들을 접하며 늘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었기에 이 앨범이 주는 감흥이 더욱 유난한 지도 모르겠다. 마치 곱게 늙은 옛사랑을 짧은 순간이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재회한 듯한 기분이랄까… 20041108 | 양재영 cocto@hotmail.com

9/10

* 알레스 뮤직(Ales Music)의 라이선스 발매반 해설지에 수록된 글입니다.

수록곡
1. The Future
2. Verbal Clap
3. Much More (feat. Yummy)
4. Shopping Bags (She Got From You)
5. The Grind Date
6. Church
7. It’s Like That (feat. Carl Thomas)
8. He Comes (feat. Ghostface)
9. Days Of Our Lives (feat. Common)
10. Come On Down (feat. Flava Flav)
11. No (feat. Butta Verses)
12. Rock Co.Kane Flow (feat. MF Doom)
13. Shoomp (feat. Sean Paul) (보너스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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