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 가볍게 하기의 선도세대, 그리고 혼종들 0. 예술과 중력 예술의 영구불변한 제 1직무는 “현실의 중력을 조작하는” 것에 있다.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중력의 작용을 왜곡시킨다. 공간을 넓히거나 좁게 하며 시간을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한다. 이어폰을 끼고 거리에 주저앉아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떤 음악이 어떤 중력작용을 의도하는지 알 수 있다. 만화방에 앉아서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금새 지나간다. 30권 이상, 많은 권수가 발행된 만화가 의도하는 것은 명백하다. 앉아서 보고 있노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감각이다. 중력을 조작하여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왜곡하는 것은 가장 실용적이고 가장 고상한 예술의 임무이다. 가볍게 하기이든, 무겁게 하기이든, 이러한 감각을 조작하는 방식에 있어서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질 때 그 문화의 진지함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중력을 감각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삶의 방식인가”를 제시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1. 대중음악의 사례 – ‘가법게 하기’의 선도세대 음악인들 무겁게 하기에서 가볍게 하기가 등장하기까지, 현재의 흐름을 살펴보기 전에 그 이전에 존재했던 선도적인 흐름을 살펴본다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신해철과 서태지일 것이다. 첫째로, 이 둘 다 모두 ‘가겹게 여겨지는’ 음악으로 시작해서 “생각 없는 트렌드 음악”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신해철 혹은 함께 음악했던 정석원 등의 경우, 학벌이 이러한 비난의 방패막이 되어주었지만 서태지의 경우 처음에는 앨범 판매량과 철저한 자기관리 외에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전시킬 이데올로기적 수호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성공 이후 ‘무겁게 하기’를 표방하면서 메탈음악으로 노선을 전향하며 평론적인 지지도 획득하는 과정을 거친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 사례로서 이승환 역시 떠올릴 수 있다. 둘 다 동세대 – 386세대 음악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신해철의 ‘무한궤도’는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과 신쓰팝의 노선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밴드였는데, 진지하지 못한, 가볍게 음악하는 학삐리 귀공자들이라는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서태지의 경우 신해철보다 아래 세대이지만 밴드를 함께 한 음악적 동료들은 80년대의 세대에 속한다. 그는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지만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와중에서도 마이클 잭슨과 댄스음악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은 자신보다 아래 세대에서 자기음악을 이해해줄 청취층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신해철과 서태지, 이승환 등의 사례는 이들이 386세대와 그 이후 세대의 사이에 걸친 90년대 ‘가볍게 하기’의 선도세대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신해철과 함께 무한궤도의 멤버였다가 015B를 결성한 정석원 등을 포함해도 될 것이다. 신해철이 가장 386에 가깝고 서태지가 가장 신세대 측에 가깝긴 하지만. 말하자면 이들은 무겁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를 동시에 이해하고 그 양자 사이에 어떤 교량을 놓는 역할을 가진 세대였다. 둘째, 이들의 ‘가볍게 여겨지는’ 음악은, 이전 시대의 대중가요와 달랐으며, 또한 동시대의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주로 헤비메탈) 밴드들과도 다른, 일종의 뉴웨이브 팝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이들은 서양 팝 음악의 쿨한 – 가볍게 하기 – 면모를 한국에 도입하려 했던 제 1세대였다는 이야기다. 무한궤도가 1988년의 대학가요제에서 강력한 키보드 전주를 앞세운 팝 록넘버 “그대에게”로 대상을 수상한 사건은, 이미 새로운 세대, 새로운 청취층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신해철 자신이 그 정치적 성향이나 연령으로 보나 386세대에 속하면서도 보다 어린 세대들에게서 자신의 지지층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 그가 놓인 중간자적 위치를 보여준다. 이후 등장하는 정석원/장호일 등의 ‘015B’나 이승환/오태호의 ‘이오공감'(1992)에 있어서 이러한 성향은 계속 드러난다. 이들이 만드는 노래들은 이전 시대의 진정성/애수 타령으로부터 분명히 담을 쌓은, 세대적 폭발력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었고 ‘서태지와 아이들'(1992)에 있어서는 이미 예고에 그치지 않게 된다. 셋째, 음악적으로 이들은 자신의 밴드 경험으로 인해 밴드 형태의 음악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동시에 키보드 등 전자적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한국에서 록은 전기기타 중심이라는 편견이 존재하는데, 아마 이는, 신써사이저를 중심으로 하는 ‘샘플링’한, ‘미디로 찍은’ 인공적인 음악은 어딘지 모르게 진지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편견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밴드음악은 배고프고 진지한 그 무엇이고 팝음악은 경박하고 천박한 그 무엇이라는 공식도 존재했다. 와중에서 이들이 기타보다는 신써사이저를 비교적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밴드음악의 형태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당시 이들이 놓여있던 한국음악씬 내 위치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무겁게 하기 일색이던 밴드음악에 가볍게 하기로 간주되는 사운드를 도입한 것이다. 무한궤도의 해체 이후 각 멤버들의 지향을 보면 더욱 확실해지는데 정석원을 위시한 015B의 ‘댄스필’한 전자음향을 전면에 내세운 “신인류의 사랑”이나 신해철의 “째즈카페”와 같은 노래가 지향한 감성이 무엇인지는 매우 선명하다. 사실 이러한 형태를 취한 것이 이들에게 가장 독보적인 모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의 음악적 독보성은 이러한 밴드음악을 이해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신써사이저 음향을 활용한 팝센스에 있어서 선진적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이 이 때의 음악적 형태를 현재까지 고수하고 꾸준히 발전하며 활동하였다면 어땠을까. 한국의 음악씬에 지금의 아이돌 댄스뮤직 일색이 아닌, 서양의 듀란듀란(Duran Duran)에서 펫 샵 보이스(Pet Shop Boys)에 이르는 상업성으로부터 작가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뉴웨이브 댄스뮤직의 흐름을 명확히 세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가벼운 스타일을 취하면서도 뚜렷한 작가적 의식성을 유지하는 음악적 취향을 형성하는 것이 선도세대로서의 이들의 역할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으니까 더욱. 2. ‘가볍게 하기’의 선도세대, 중력에 굴복하다 신해철과 서태지가 성공 이후에 취한 행보는 “다시 헤비메탈로” 라는 것이었다. 신해철이 N.EX.T를 결성한 처음에 시도했던 것은 프로그레시브 록과 신써사이저 뮤직을 결합한 것이었으나 이후 점차적으로 건반을 버리고 프로그레시브 록과 헤비메탈을 결합한 형태로 귀결된다. 신해철은 자신이 ‘딴따라’가 아니라 진지한 생각을 가진 지식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려는 듯 마음껏 무거운 이야기를 품어대기 시작하고, 그것은 지금에까지 이른다. 서태지 역시3집 앨범을 통해 통일 등 사회적 이슈를 이야기하면서 비슷한 행보를 취하는데, 가볍게 하기를 선도하던 ‘대학물 먹은 지식인/고교 중퇴 소년’의 ‘무겁게 하기’로의 투신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사실 난 내 마음 진정한 곳 깊숙이에서는 헤비메탈이 좋았는데 그 동안은 상업적인 것을 고려하느라고 발라드랑 댄스 했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초기 팝음악에서 “난 이렇게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어”라는 자연스러운 감흥을 엿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이 ‘무겁게 하기’의 헤비메탈로 전향하자마자 이들의 음악을 작가주의라고 지켜세우기 시작한 ‘무거운 평론가’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야 진정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시작한 OOO”이라고 말이다. 무거운 음악을 하기 시작하자 평론적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문희준은 이러한 바보 같은 현상의 순진한 희화화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러한 바보 같은 사회적 감성과 잣대에, 훌륭하게 피어날 뻔 했던 음악적/감성적 흐름의 하나가 중력에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이 중력은 “무겁게 음악해야 진지한 음악이다” / “울부짖음이나 흐느낌이 없는 음악은 진지한 음악이 아니다”라는 식의 바보 같은, 일차원적 미학적 전제가 강제한 중력이다. 90년대 초반 당시에 이와 같은 담론을 유포한 평론가들에 대해서 필자는 상당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데 필자는 이들이 80년대식 환자 – 이데올로기 중독자 – 로서, ‘무겁게 하기’의 감성이기만 하면 일단 ‘이 황폐한 한국대중음악에 한 조각 희망’이라는 식으로 띄워주었다는 점이다. 무겁게 하기의 음악은 손쉽게 명분을 붙여서 치켜세우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사실 헤비메탈은 정치적이기 보다는 지독하게 탐미적인 음악에 속한다. 한국에서 음악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헤비메탈 로커들이 그런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음악을 마구 정치적인 것으로 써내려가는 것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헤비메탈로커들이 무슨 운동권이기라도 되는 듯이 치켜세운 것이 이 시기 일부 평론가들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80년대 이데올로기의 명분 붙이기가, ‘딴따라’가 한국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음지에서 소외받은 장르의 위상을 높이는 몇 안 되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더라도” 이들 로커들은 기쁘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수혜에 응해왔다는 것이다.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만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말야. 지금까지 그렇게도 담론의 수혜 따위 입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나 대부분의 골수 헤비메탈 청취자들은 이러한 ‘386 록 담론’을 대단히 못마땅해했다는 것을 언급해두어야겠다. 다른 장르 음악인들에 대한 평가도 이와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탐미주의자였던 신중현은 저항적인 로커가 되고, – “아름다운 강산”이 저항음악이냐?! – 허무주의자에 가까웠던 산울림도 청년의 저항음악이 되고, – 음악이 빡세기만 하면 시대에 대한 청년의 저항이냐? – 헤비메탈 그룹 크래시(Crash)와 민중가수 안치환이 같은 묶음으로 “자유와 저항의 로커”가 되는 기묘한, 너무나도 ‘한국적인'(386적인) 사태가 생겨난다. 운동권 습성이 배인 자신들의 획일적인 시각으로 대중예술을 읽어내기 위해서 이놈 저놈 다 비슷한 구석만 있으면 저항의 로커로 평가해버린 것이다. 높이 평가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평가의 틀이 미학적으로 너무나도 좁고 획일적이라는 것이 문제다. 사람이 침대에 맞지 않으면 사람의 다리를 침대에 맞춰 잘라버린다는 식의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아니 이것 만이면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겁게 하기’ 정서가 담기지 않은 ‘가벼운’ 음악에 대해 자신의 몰이해를 자각하지 못하고 ‘상업적’이니 ‘트렌드’니 하는 한 묶음으로 치부해버렸다는 것이 더욱 문제다. 물론 90년대 들어서야 대중음악에 대해서 ‘평론’이라는 것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므로, 이것은 대중음악 평론의 초창기에 있을 수 있는 한계이자 오류로서 존중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것이 분명하게 반성되거나 비판되지 않은 채로 같은 386 평론가들 사이에서 유야무야 넘어간다는 점이다. 평론가들 뿐 아니라 이들 음악인들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은 상당히 비극적인 일이다. 물론, 메탈이 좋으면 언제든지 메탈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들이 메탈을 하면서 “이젠 난 록을 한다”라고 자신을 ‘작가’로서 좀 더 떳떳이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이러한 현상이 감각적인 스타일을 형성하는 것에 뛰어난 작가적 역량을 보인 이들이 작가 대접을 받기보다는 “딴따라” 취급을 받는 풍토에 기인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볍게 하기의 아름다움을 멸시하는 풍토 – 이들이 이러한 풍토에 반감을 가졌는지, 혹은 순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로서는 이들의 초기 팝 음악이 이들의 재능을 더욱 훌륭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아쉽다. 중력을 거역하는 것은 이토록 힘들다. 3. 대중음악의 사례 – 90년대 중반 이후 주류 미디어 가볍게 하기가 무겁게 하기에 대한 어떤 강박 없이 주류 미디어에서 선보인 것은 삐삐밴드의 사례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95년에 “안녕하세요”라는 노래로 가볍게 하기의 아방가르드를 선보인 삐삐밴드는, 무겁게 하기에 대한 명백한 파열욕구를 담은 펑크음악으로 주류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들의 음악은 정치적 허무주의와 미학적 전위성을 담은 팝아트(Pop-Art)로 이해해야 할 법했다. 70년대에 뉴욕 등에서 성행한 아방가르드 아트펑크의 조류를 한국에 유입한 것이다. TV카메라에 침을 뱉을 때 이외에는 사실상 단지 엽기밴드로 치부되었을 뿐이지만. 서구 록 역사의 절반은 칼날 같은 경박함으로 이루어진 성취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에 이러한 부분이 거의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삐삐밴드의 음악이 90년대에 한국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음악적으로나 시대적 의미로서나 적어도 당시 이루어진 것보다는 훨씬 높이 평가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평가는, 괜찮은 평가를 내릴 때조차도 대체로 머뭇거렸는데, 가벼움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도 이 세대 평론가들에게 낯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삐삐밴드의 사례는 결국 그 하나로 끝났는데, 이러한 골수적이고 전위적인 가볍게 하기는 대중도, 평론가도, 기획자에게도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반면 주류 미디어는 가볍게 하기를 통용될 만한 방식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신경을 쓰게 된다. 90년대 후반은 386세대들이 가볍게 하기를 적당한 명분과 함께 상품으로 포장하는 기획과 마케팅을 막 손에 익히고 있는 참이었다. 그와 함께 미디어에서 분출되는 ‘가볍게 하기’에는 그것을 취사선택하고 포장하는 386세대의 ‘무겁게 하기’ 감성이 뒤섞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386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대의 세대로서의 특성이 교합되어 있는 선도세대의 행보는 명분과 새로운 세대의 공감을 동시에 얻어낼 수 있는 일종의 선례로 통용되기 시작한다. 그들이 보여준 가볍게 하기와 무겁게 하기 사이에서의 갈등과 선택이 이후의 댄스그룹이나 다양한 기획상품들에 의해 벤치마킹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겁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는 마케팅 기획을 통해 혼합해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일종의 재료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전에 무겁게 하기 음악은 가벼워지고 – “내가 만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으로 가볍게 한 안치환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 가벼운 음악에는 ‘무겁게 하기’ 식의 스타일이 접합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무겁게 하기를 가볍게 표현하는 한에서는, 혹은 가볍게 하기를 무겁게 포장하는 한에서는 합리적인(상업적인) 절충이 이루어진 것이다. H.O.T.(일명 High-five-Of-Teenager)가 그들의 3집에서 “열맞춰”를 들고 나온 일이 이것을 잘 보여주는데, 이것은 무겁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가 알쏭달쏭한 형태로 뒤섞인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예컨데 음악은 가볍게 나가다가, 갑자기 무겁게 하기의 대표적인 록음악인 메탈풍의 기타 리프(반복악절)가 등장, 장엄하게 되고 격렬한 하드코어 래핑이 전개되다가 다시 말랑말랑한 멜로디로 가볍게 되기를 반복한다. 이것은 가볍게 하기와 무겁게 하기의 혼종이라기 보다는 둘을 기계적으로 잘라붙인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솔로 독립한 문희준에게서 그 미학적 절정(?)에 달한다. 이러한 음악은 한국사회의 풍토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풍자극일까. 4. 대중음악의 사례 – 90년대 중반 이후 인디 90년대 중반이 되자, 한 켠에서 인디밴드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가볍게 하기를 보다 골수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것은 당시 10대-20대 초반에 이르는 세대들이 386세대 기획가들의 개입 없이 자신들의 자생적인 문화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인디음악의 가볍게 하기의 방식은, “아무나 음악할 수 있다”는, 전 시대의 밴드들이 보기에 ‘음악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정치적으로 보이는 크라잉넛이나 노브레인 등은 무겁게 하기에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들 음악의 한 켠에서 보이는 것은 미학적 허무주의에 가깝다. 또한 특정한 감성으로는, 경쾌한 기타 스트로크와 무중력 상태를 구현하는 사운드 이펙터를 사용하는 모던록 밴드들의 출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가볍게 하기와 무겁게 하기의 ‘기획’된 혼합을 엿볼 수가 없는데 이것은 이들이 자생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인디음악에 무겁게 하기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씬이 새로운 세대들이 가진 성향을 매니악한 방식으로, 가감 없이 드러낸 자생적인 문화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순수하게 10대, 20대 새로운 세대만의 흐름이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을 주류에 알려낸 매니저인 클럽(DRUG)의 사장이나, 한국 인디씬 초기에 만들어진 음반 유통사(레이블) ‘Indie’의 구성원들이 초창기에 행했던 역할 때문이다. 인디씬에서 386세대의 역할은, 역시나 ‘명분 부여하기’였다. 이들의 홍보와 386세대 평론가의 담론에 의해서 ‘청년들의 저항’/’인디문화의 혁명적인 힘’ 등 과대포장된 레테르를 주렁주렁 달아야 했던 것은 물론이다. 이들이 주류에 소개될 때도 386세대의 명분을 덧입히는 과정을 그대로 거쳐야 했다. 차라리 그냥 팝송 밴드로 소개되는 편이 훨씬 진취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386세대들의 ‘새로운 세대’의 문화, 인디문화에 대한 선망은 아마도 순수한 것이었을 것이지만,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자신의 선망을 ‘현실을 넘어선 구호와 명분’을 붙이는 것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자들의 실패담이다. 펑크음악의 계급운동성이니 정치성이니, 서구에서도 일각의 ‘해석’에 불과한 이야기를 이제 막 아기 같은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한 한국에서 마치 정설인 것처럼 도입해서 포장하던 담론들은, 인디씬의 거품현상이 사라지자 모두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막바로 혁명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떠들던 평론가들과 386세대 기획자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형들의 그런 말에 혹 했다가 부도수표에 실망한 밴드 멤버들의 자괴감은 어디로 가고. 책임지겠다고 실컷 떠들어대던 자들은 사라지고 처음부터 묵묵했던 자들은 남아서 묵묵히 살아나간다. 5. 무겁게 하기/가볍게 하기의 세련된 혼종 / 무겁게 하기의 명품화 무겁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가 그 갈등이 중재되어 둘이 성공적으로 뒤섞인 형태는 이후의 소위 주류 기획사에 속하여 활동하는 소위 ‘인디밴드’들일 것이다(사실 더 이상 인디밴드라는 명칭을 붙일 순 없다). 자우림과 체리필터, 윤도현 밴드 등은, ‘무겁게 하기’의 심성을 가진 이들이 명분을 부여하기 손 쉬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가볍게 하기로서 대중에게 다가간다. 즉, 어느 정도 생각있고 저항적으로 보이며, (실제로도 저항적인지는 알아서 파악하라) 보컬의 목소리는 보통 ‘내지르는 타입’으로 삶에 대해 건강하고 진지하게 들리는 보이스를 가지고 있다. 그건 그 사람들의 삶이 정말 진지한가와는 특별한 관계없이, ‘그렇게 들리는 보이스’라는 합의 위에서 ‘가볍고 부담없이’ 기능한다. 그 진지한 목소리는 말랑하고 경쾌하게 소화된다는 것이다. “건강하고, 진지하고, 그러면서도 가볍게 하기의 도발성도 가지고 있는 새로운 세대”라는 어떤, 386세대들의 관점에서 생각되는 멋진 후세대의 이미지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명분과 – 여기에는 ‘인디밴드’라는 잘못된 레테르도 한 몫 한다. 이전 386평론가들의 ‘인디밴드’에 대한 잘못된 명분 붙이기가 아직도 유령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 가벼운 트렌드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또한 이들의 음악은 H.O.T와 다르게 가볍게 하기와 무겁게 하기가 세련되게 뒤섞여 있다. 문희준의 경우 가볍게 하기에게도, 무겁게 하기에게도 경멸받았던 반면, 이들 밴드들의 경우는 가볍게 하기에게도 무겁게 하기에게도 상업적으로 통용되는 사례가 되는 것이다. 양쪽 다 만족시키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지나치게 균형적이면서 동시에 집요하게 타협적이다. 예를 들어 최근 김윤아의 솔로앨범은 지독하게 트렌디하면서도 “가창력 있고 자기 곡을 쓰는 여성솔로”, “생각있는, 독기 있는 자의식을 폼은”, “남자친구의 죽음이 내게 준 영향” 등의 단어들로 집요하게 명분화되고 있다. 그래서 무겁게 하기는 가벼운 트렌드가 되고 가볍게 하기는 마치 무겁게 하기의 명분인 듯 모습을 드러낸다. 선도세대에 이어서 등장한 가볍게 하기와 무겁게 하기의 황금비율이다. 각각의 사례에서 가볍게 하기와 무겁게 하기가 어떤 방식으로 혼종되어 있는가는 획일적으로 단정하기 보다 개별적으로 따져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겁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는 더 이상 대립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공익광고로 등장하는 김민기의 “상록수”나 댄스음악으로 편곡되어 발랄한 여공들의 모습을 뮤직비디오로 보여주었던 거북이의 “사계”의 사례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장에서 ’80년대의 명품화’ 현상을 언급했지만 이것은 ‘무겁게 하기의 명품화’라고 불릴 법한 현상이랄까? 80년대의 무겁게 하기는 이제 폼재기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의 무겁게 하기와 90년대의 가볍게 하기는 이제 상업적인 기획의 측면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교배되고 있다. 그리고 2000년대는 그 혼합의 비율과 화학작용에 있어서 나름대로 이미 레시피가 확립되고 있는 시점으로 보인다. 386세대는 가볍게 하기와 무겁게 하기를 혼종하여 문화상품을 만들어내는데 어떤 자신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음악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발전인가? 발전일 수도 있겠지만… 6. 삶을 감각하는 방식을 선택하기 ‘가볍게 하기’가 ‘무겁게 하기’보다 우월한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가볍게 하기나 무겁게 하기나 삶의 중력에 대한 중력제어 방식의 일종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무겁게 하기’가 차지한 지위는 너무나도 절대적인 면이 있다. 무겁게 하기의 잣대로 예술을 평가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무겁게 하기]라는 잣대를 획일적으로 적용하여 인간이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는 폭을 턱없이 제한한 것이다. 반면, 가볍게 하기에 대해서는 “치열하지 못하다”라는 식으로 평가받기 일쑤였다. 비록 90년대 초중반에 비해서는 상당히 나아졌지만, 아직까지 한국의 평론계는 가볍게 하기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질 않다. 이는 한국에서 높이 평가받는 문화들은 모두 유머와 아이러니가 거세되어 있다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는 거대한 손실이다. 90년대에 돌출한 ‘가볍게 하기’의 감각은 적어도 ‘무겁게 하기’의 상대역으로서 “삶의 무게를 느끼는 방식은 한 가지만이 절대적이다”라는 무겁게 하기 특유의 환상을 제거하였다. 그리하여 삶을 감각하는 방법을 좀 더 다변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가볍게 하기는 ‘무거운 땅’인 한국에서 그 기반이 취약해서 너무나도 손쉽게 기획품으로 전락했고 자생적인 골수적인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가볍게 하기 음악은 그 칼날이 감추어진 채로 카페음악이나 오후의 홍차 한 잔과 곁들이면 좋은 음악 정도로 치부되고, 또 그렇게 팔려나간다. “안전한 음악, 착한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중력을 제어하는 방법’에 대한 요령은 이전 시기보다 훨씬 세련되어졌다. 한국사회는 이제서야 삶의 감각을 표현하는 미학적 다양함을 찾아나서기 시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다양한 미학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비평계의 언어는 대부분 무겁게 하기의 가치에 매달려 있고, 이러한 현상을 적절하게 추동하고 평가해내고 비판하거나 지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아직까지 많은 부분에서 언어를 말하고 기획을 행하는 세대가 386세대라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후세대가 그에 대항하는 뚜렷한 이념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여튼, 가볍게 하기든 무겁게 하기이든, 어떤 무게감으로 자신의 삶을 감각할 것인지는 자신의 자유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선택 가능한 문제이고 선택 가능해야만 한 문제이다. 자신의 스타일을, 자신이 세상을 회피하는 방식을, 자신이 세상과 싸우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가볍게 하기/무겁게 하기’ 이외의 다른 방식, 다른 변종이 탄생할 때, 그것을 지지할지 하지 않을지,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 것일지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등장한 ‘깨끗이 하기'(소위 ‘웰빙’) 같은 것은 어떤가. 사람들은 이제 각자의 중력제어구를 가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감각의 차원에서 재형성하는 방법이다. 자신의 감각을 조작하는 것으로 세상이 변화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이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없지만 이것 없이 가능한 것도 없다”라고 말하겠다. 어찌되었건 서로 다르게 세팅된 중력제어구를 달고 있다고 해도, 우리 모두 먼 길을 걸어야 하는 자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구는 둥글고, 하나이며, 구형으로서 모든 가능한 종류의 벡터를 포함한다. 20040625 | 김남훈 kkamakgui@han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