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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 레이건

레이건 집권기는 한국에서 전두환 통치와 일치하지만, 최근 세상을 떠난 그에게 미국 언론이 베푼 찬사와 경의는 차라리 ‘박정희 향수’ 현상에 비길 만하다. 레이건의 장례식을 둘러싼 각종 행사는 공중파 전 채널에 걸쳐 하루종일 중계되었는데, 이는 박정희의 부인이 그를 대신해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모든 TV 방송이 중단되고 오직 검은 바탕 ‘근조'(謹弔) 화면에 장송곡만 흘러나오던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어떤 이의 암흑시대는 다른 이의 황금기라는 건 온갖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된 인간사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겠지만, 죽은 자를 턱없이 미화하는 일종의 우상숭배는 어떤 의미에서도 건강하다고 보기 힘들다. 역사의 ‘왜곡’도 문제려니와, 이미 죽었거나 살아있는 예전 권력자들의 아들딸들이 그 후광을 입어 득세를 꾀하는 일은 비단 한반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이건 우상화뿐 아니라, 아버지가 끝장을 보지 못했던 이라크에 대한 병적인 집착, ‘권력승계자’ 김정일에 대한 본능적 혐오 등은 현재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미 대통령의 가련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징후들로 읽을 수도 있다.

5150, “Bloodline” from [The Reagan Era Hardcore Series]

언어학자/시민운동가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레이건에 대해 특히 신랄하다. “레이건의 임무는 미소를 띠고 상쾌한 목소리로 대사를 따라 읽으면서, 농담 몇 마디 섞어서 관객들을 적당히 즐겁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지닌 자격이라곤 부자들이 그를 위해 써놓은 대사들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 전부였다. 부자들은 이 서비스에 후한 돈을 지불했고, 레이건은 그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불행한 일은 오늘날의 ‘레이건 따라쟁이’는 대사를 따라 읽는 것조차 신통치 못한 까닭에, 허수아비처럼 보이지 않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란-콘트라 사건 덕택에 마침내 레이건의 ‘멍청함’이 TV를 통해 중계되었을 때는 대중에게 얼마간 충격이라도 있었지만, 부시 2세의 그런 모습은 이제 너무 익숙해져 실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The Worst, “I Don’t Know” from [The Reagan Era Hardcore Series]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가 레이건의 군비경쟁 덕분이라느니 따위의 도착적인 주장에서는 진실을 찾기 힘들지만, 레이건 시대가 미국의 하드코어 펑크 씬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레이건 정권의 대외정책이 중남미,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가한 타격에 별로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소수인종 및 빈곤층에 대한 국내정책 또한 잔혹했다. 부자들과 대기업에 대한 세금혜택 및 사회복지 지출의 삭감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른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는 누군가 재치있게 비꼬았듯이 일반 대중에게 ‘오줌을 갈겨대는 효과'(trickle-down effect)를 가져왔을 뿐이다. 그리하여 미국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의 전위부대가 정치적으로든 음악적으로든 급진과격화되어 ‘투쟁의 한길로’ 나아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D.R.I., “Reaganomics/Commuter Man” (mpeg video)

“인디 레이블을 거점으로 삼아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전개된 이 싸움은 1982-3년 경에는 대중적 파급력을 가지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른바 ‘하드코어 씬’이 탄생한 것이다.
이미 1978년에 결성된 블랙 플랙(Black Flag)은 메이저 레이블과의 어떠한 사업도 기피하면서 ‘DIY (Do It Yourself) 윤리’의 전범을 창조했다…인디 레이블인 SST 레코드사를 설립하여 하드코어의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전국 각지의 펑크 밴드들이 흑색 무정부주의의 깃발 아래 모여들거나 다른 인디 레이블을 설립하였다.
하드코어 네트웍은 서서히 전국적인 연결망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몇몇 밴드들은 전국 투어도 감행했다…난장판의 공연이 끝난 뒤에는 그날 밤 만난 ‘동지들’의 아파트에 가서 함께 술을 퍼마시면서 레이건과 마이클 잭슨을 비롯하여 주류의 모든 것들에게 욕을 퍼붓다가 소파나 마루 위에 지쳐 쓰러졌다.”(신현준 외, [얼트 문화와 록 음악 1], 59-61쪽)

Black Flag, “Black Love” from the live in Detroit, 6/27/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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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플랙

그렇게 수많은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이 1980년대 중후반까지 명멸해 갔다. 앞서 소개한 첫 두 밴드들처럼 제대로 된 음반 한번 내지 못하고 사라져간 경우가 다수를 이루지만, 개중에는 비교적 널리 이름을 날리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밴드 및 뮤지션들도 있었다. 블랙 플랙의 차력사 스타일 프론트맨이었던 헨리 롤린즈(Henry Rollins)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밴드를 계속하는 것 외에도 영화배우 및 출판업자로 활동의 폭을 넓혔을 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을 도는 스포큰 워드(spoken word) 투어를 통해 ‘펑크 정신’을 설파하는 일종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해 왔다. 외설시비에 휩싸여 우울하게 끝장난 샌프란시스코의 데드 케네디즈(The Dead Kennedys)를 이끌었던 젤로 비아프라(Jello Biafra)도 마찬가지로 스포큰 워드 공연을 통해 미국 주류 문화의 통렬한 비평가로 자리잡았다. 다른 한편 마이너 쓰레트(Minor Threat)에서 푸가지(Fugazi)로 이어지는 워싱턴 DC 펑크 씬의 맹주 이안 맥케이(Ian McKay)는 여전히 디스코드(Dischord) 레이블을 운영하면서 인디 음반산업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The Dead Kennedys, “Kill The Poor” from a demo tape

“1980년대 초반의 펑크 밴드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거의 ‘동질적’이라는 점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곡의 연주 시간은 3분 안팎이며, 기타는 거의 이펙트를 입히지 않은 톤으로 쓰래쉬(thrash) 풍의 리프를 긁어대고, 드럼은 8비트의 기본 패턴과 16비트의 필인(fill-in)을 별다른 강약이나 완급 조절 없이 내리친다. 보컬은 짧은 시간에 많은 말을 하려는 듯 버스와 코러스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아무런 기교 없이 계속 소리친다.”(앞의 책, 63쪽)

이러한 하드코어 펑크의 음악적 일차원성으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은 또한 이후 주류 음악계까지도 뒤흔든 새로운 사운드의 밑바탕이 되었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대명사 너바나(Nirvana)가 하드코어 펑크의 정통적 사운드뿐 아니라 그 이단아들, 예컨대 허스커 두(Husker Du)나 미트 퍼피츠(The Meat Puppets)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Husker Du, “Do You Remember?” from [The Early Years](1985)

2000년대 미국의 상황은 이상스러우리만치 20년 전의 그것과 닮아 있거나 평행선을 긋는다. 레이건-부시가 그렇고, 뻔뻔스런 제국주의적 폭력으로 중동 및 세계 곳곳을 휩쓸고 다니는 것도 그렇다. 그토록 백인이 되기를 열망했던 1980년대 주류 대중음악의 상징 마이클 잭슨은 오늘날 자신을 흉내내는 백인 스타 저스틴 팀벌레이크(Justin Timberlake)의 등장으로 간접적인 소원성취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하드코어 펑크에 견줄 만한 무언가가 땅밑으로부터 끓어오르고 있는 걸까?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좋겠지만, 우선은 이 불행한 시대가 레이건 시절마냥 향후 4년, 혹은 그보다도 더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040622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후기: 이 글을 마친 직후 이라크에서 납치당한 한국인 인질 김선일씨의 처형 소식을 들었다. 응당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그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자들에게 향할 것이나, 우리는 과연 누가 이 처참한 파괴와 살육의 악순환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가 또한 냉정하고 엄중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