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Zzzaam) – 거울놀이 – 카바레, 2004 별이 빛나는 밤에 잠의 신보를 듣는 동안, 나는 음반의 제목을 자꾸 ‘겨울놀이’라고 읽었다. 1980년대 ‘방화’에 등장하는 순정 100% 여인의 테마같은 음악 ― 나긋나긋한 기타 스트러밍, 단순하고 예스러운 테마를 아련하게 반복하는 키보드, 둔탁한 울림의 1980년대 풍 드럼, 희끄무레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갖는 휘파람 ― 속에서 보컬 박성우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밤새 달려온 눈 쌓인 그 길엔 / 하얀숨결, 달빛, 구름, 너의 미소” (“70’s Once More”) 나로서는 방금 얘기한 이 두 가지 점이 이 음반을 설명할 수 있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이 음반은 겨울의 낭만을 리버브를 잔뜩 먹인 복고적인 소리로 표현하는 음반이다. 불길한 음향으로 마무리를 짓는 “70’s Once More”의 종결부에서 알 수 있듯 그 낭만에는 금이 가 있긴 하지만. 하지만 잠이 이런 소리를 내는 밴드였던가? 이들의 이전 음반인 [낮잠](2000)과 [Requiem #1](2002)은 마치 흠뻑 젖은 모피코트가 땅바닥에 끌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려준 바 있다. 그 음반들의 관심사는 매캐한 기타 노이즈와 음울한 무드를 혼란스러운 태도로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그 사이에서 가끔씩 엿보이던 멜로디와 훅은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 신보에서 밴드는 노이즈의 역할을 대폭 줄이고 남은 공간을 ‘맑고 영롱하게’ 처리된 기타, 철금, 키보드로 빚은 예쁜 선율들로 채운다. 보컬은 두드러지지 않으며, 최소희가 노래한 “기우” 정도를 제외한다면 담요 밖으로 나오기 싫은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러나 이 예쁜 선율들은 “70’s Once More”나 “따뜻했던 겨울밤이었지”, “덥덥”을 들을 때 느낄 수 있듯 지금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회고적인 정서를 표현하려는 많은 곡들이 지금 여기서 바라보는 과거를 애잔하게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면(그래서 회고조의 노래는, 마이너 키의 비장하고 쓸쓸한 전개로 대표되는 비슷한 음률과 분위기를 따라가게 된다), 잠은 마음의 소리를 따라 그 시절 그 노래를 다시 불러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듯 하다. 이는 상대적으로 ‘모던’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다른 곡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딜레이를 건 중첩된 기타음과 사이렌 소리를 비롯한 몽롱한 효과음이 나른한 드라이빙감을 선사하는 “거울놀이”, 요 라 텡고(Yo La Tengo) 풍의 깔끔한 “기우”, 시끄럽지만 파괴적이지는 않은 “Sonicboom”, 비틀스에 대한 잠 식의 해석인 “Plz Plz Me” 등은 두툼하게 반짝이는 사운드 메이킹을 통해 ‘바깥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라는 태도를 취한다. ‘1990년대의 정서’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그 정서 말이다. 다만 이들의 음악이 ‘1990년대의 정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의 음악이 자폐적이라기보다는 신실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굳은 매듭을 마음으로 자른 후 / 저기 저 마련되어 있는 카펫 위로… / 오 입술에 레몬”(“오 입술에 레몬”)과 같은 가사는 특정한 의미보다는 ‘쿨하게 서정적인’ 어떤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려 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외부에 대한 강박적 반응이나 내면에 대한 지나친 신뢰, 이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음반의 사운드는 이런 섣부른 짐작을 지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유난히 심각해 보이는 2004년 한국의 후덥지근한 봄에 발매된 이 음반은 얼어붙은 오르골에서 나오는 것 같은 소리들을 들려준다. 예닐곱 달 뒤에는 더 들을만한 음반이 될 것이다. 20040502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7/10 수록곡 1. 거울놀이 2. 70’s Once More 3. 기우 4. 긴머리 쓸어올리며 5. 따뜻했던 겨울밤이었지 6. 싸이킥 7. 오 입술에 레몬 8. 덥덥 9. Sonicboom 10. Plz Plz Me 11. Sweet Swing 관련 글 잠 [낮잠] 리뷰 – vol.3/no.8 [20010416] 관련 사이트 잠 공식 홈페이지 http://zz.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