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nny Choi – Postcard Stories – Double Zero, 2003 88 Flavors 피아노에는 여든 여덟 개의 건반이 있다. 호기심 많은 어린 시절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웬만해선 손댈 일 없는 맨 가장자리 최저음과 최고음을 장난삼아 눌러본 기억은 아마 나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을 듯하다. 어쩌면 그 여든 여덟 개를 차례 차례로, 혹은 무작위로 짚어 가면서 흘러나오는 높고 낮은 소리에 신기해하던 것도. 열 다섯 살 때부터 청중을 앞에 두고 공연을 시작했다는 제니 초이에게도 그러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고전 음악을 전공한 어머니가 어린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는 그게 나중에 팝 음악을 하는 데 쓰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릴리쓰 페어(Lilith Fair)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에 반짝했던 여성 싱어 송라이터들의 틈새에 껴있었을 때도, 써드 쉬프트(the Third Shift)라는 기타-베이스-드럼의 남성 백밴드를 대동하고 록 스타일을 실험할 때도 제니는 피아노 건반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여든 여덟의 전형적 다음(多音)악기인 피아노가 재즈, R&B로부터 펑크에 이르는 그녀의 다양한 음악적 색조를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기도 했을 테고, 펑크와 피아노 발라드를 섞어 성공을 거둔 벤 폴즈(Ben Folds)같은 이가 이미 터놓은 길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덧 세 번째를 맞이하는 제니의 앨범은 피아노 중심 사운드로의 안정적인 궤도에 접어드는 느낌을 준다. 묵직한 중저음의 왼손 피아노 터치로 시작하는 “First Day”와 “George Bailey”는 더없이 발랄하게 들리는 제니의 목소리가 드라이빙감 있는 리듬과 겹치면서 ‘산뜻하다’는 첫인상을 남기지만, 그녀가 노래하는 가사는 의외로 음울한 풍경을 그려내는 것들이다. 앞의 곡이 일종의 수용시설에 들어가게 된 ‘첫날’을 묘사한 것이라면, 뒤의 곡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연인과 멀리 떨어지게 된 애절한 심경을 노래한다. 한편 펜더 로즈(Fender Rhodes) 피아노의 몽롱한 사운드를 깔면서 나른하고 고혹적인 재즈풍을 물씬 풍기는 “Prometheus”와 “Day By Day”는 제니의 목소리가 지닌 야누스적인 매력을 잘 들려준다. 물론 잘 훈련받은 재즈 보컬리스트처럼 아주 물흐르듯 매끄러운 건 아니지만, 고난도 화성진행이나 넓은 음역에 걸친 복잡한 프레이징도 거침없이 소화해내는 그녀의 재능은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하다. 단지 기교적인 면만 아니라, 한번 머릿속에 입력되면 좀처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Day By Day”의 후렴구는 창작력 또한 향상되었음을 알려준다. 결국 밴드를 같이 할 기타리스트를 찾지 못하고 네 명의 세션맨을 번갈아 쓰게 된 것도 전반적인 사운드가 자연스레 피아노 중심으로 간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티브 리처즈(Steve Richards)가 성기완의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훵키한 기타 연주를 들려주는 “Plastic Mask”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가장 록킹한 곡이고, 첼로를 집어넣어 중후함을 보강한 “So Far Gone”은 제니 초이 식 ‘파워 발라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작 레이블이 아니라 좀 더 규모가 큰 인디 레코드사를 거치면서 비로소 제니의 음반은 아마존 같은 대규모 판매망을 통해 어디서든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앨범 발매를 전후하여 제니는 아시아계 인디 음악인들을 규합하여 순회공연을 도는 데 주력했고, 그 결과는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AIR(Asians In Rock) 투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중에 2집부터 같이해온 베이시스트 토니 아로니카(Tony Aronica)도 밴드를 떠나고, 이제는 동반자인 드러머 필립 스톤(Philip Stone)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이런 만남과 헤어짐이 성숙하는 과정의 일부라면, 제니의 다음 음반은 더욱 풍성하고 다채로운 결실을 맺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20040415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8/10 수록곡 1. First Day 2. George Bailey 3. Stronger 4. Prometheus 5. Plastic Mask 6. Driving 7. Day By Day 8. Comfort Me 9. So Far Gone 10. Looking Up 11. Velvet And Brass 관련 글 Asian American Grrrl Power in Chicago: Jenny Choi & the Third Shift / Kim – vol.4/no.10 [20020516] 제니 초이와의 인터뷰: 이 향그런 백합들은 오직 우리의 역사 속에서만 한들거리고 – vol.4/no.15 [20020801] Jenny Choi & The Third Shift [Grand And Ashland] 리뷰 – [weiv] vol.4/no.15 [20020801] 평화를 호소하는 인디 록 공연: Plea For Peace 2004 – vol.6/no.8 [20040416] ‘제 3차 스카 리바이벌’의 선구자, 99.9%의 인디 맨: 마이크 박과의 인터뷰 – vol.6/no.8 [20040416] Denali [The Instinct] 리뷰 – vol.6/no.8 [20040416] Cursive [The Ugly Organ] 리뷰 – vol.6/no.8 [20040416] 관련 사이트 제니 초이 홈페이지 http://www.jennycho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