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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 – 유리가면 – T­ Entertainment, 2004

 

 

주인과 노예

척 팔라닉(Chuck Palahniuk)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소음 중독증과 정적 공포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장자의 격언처럼, 사람들은 음악에 둘러싸인 채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탁기 광고, 48화음 휴대폰, 버거킹 매장에서 음악이 들리지 않는 순간을 상상해보라.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듯 오늘날 음악은 문화의 시녀이다. 이 거대한 주종 관계는 개별적인 순간의 매개를 통해 드러난다. 춤과 의상을 위해 존재하는 댄스 음악이나 5분 내내 앙각(仰角)으로만 찍어대는 뮤직 비디오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장엄하고 클래시컬한 크로스오버 서사시 같은 것들 말이다.

김윤아의 솔로 데뷔작인 [Shadow Of Your Smile]은 그녀의 내면을 솔직히 드러낸 음반이라고 홍보되었다. 두 번째 솔로 음반 [유리가면]은 자신의 내면을 더 솔직히 드러낸 음반이라고 홍보되고 있다. 두 음반의 제목은 모두 ‘겉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얼굴’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명전략은 인간의 내면이 LCD 모니터처럼 까맣고 평평하다는 만화적인 정신분석 이론에 우아한 자태로 무임승차한다. 모니터에 전원을 넣으면 다음과 같은 아이콘이 뜬다. 불안, 고독, 상처, 증오, 그리움, 열정. 무엇을 클릭해도 20-30줄 짜리 단독 육성고백을 들을 수 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여/진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단꿈에 마음은 침식되어/깨지 않을 긴잠에 든다”(“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누구나 알아챌 수 있듯 이 음반의 핵심은 육성고백이다. 육성고백이란 진실한 것이고, 그래서 김윤아는 음악을 압도하는 진실한 음성으로 노래한다. 노래라기보다는 연기에 가깝게 목소리를 구사하는 그녀는 음반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줄거리도 일관성도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진짜 내면의 고백, 즉 두서없고 산만한 감정적 반응만이 줄기차게 흐른다. 이 감정이 응시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얀 노트 위의 검은 글씨다. 사드(Marquis de Sade)나 라클로(Pierre de Laclos), 혹은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노리며 신중하게 고른 공허한 단어들 말이다. “차갑고 농밀한 나의 열정이/내 눈먼 영혼을 잠식하면/뜨겁고 농염한 죄의 입맞춤/타락의 나락 그 황홀”(“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이 난삽한 육성고백이 음반 전체를 장악한다. 상징주의적 가족유사성? 시이나 링고(椎名林檎)의 친구 사진같은 부클릿부터 곡 제목에 이르기까지 음반이 의도하는 모호하고 불길하면서도 무해한 동시에 고급스러운 정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탱고, 보싸 노바, 재즈, 사이비 클래식, 뮤지컬 등 그녀가 차용하는 모든 스타일은 그녀의 시녀가 된다.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와 “Melancholia”는 삐아솔라(Astor Piazzolla)와 조빔(Antonio Carlos Jobim)의 저항이 강한 탓에 김윤아의 노래보다 삐아솔라와 조빔의 비명이 더 크게 들리지만 대개의 곡들은 순순히 무릎을 꿇는다. 영혼도 잠식당하고 마음도 침식당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와 가사는 잠식당하지도, 침식당하지도 않는다.

결국 이 음반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리가면을 쓴 그녀의 내면이다. 그걸 장식할 수 있는 음악이라면, 2004년의 한국에서 고급스럽게 들릴 수만 있는 음악이라면, 즉 한국에서 ‘댄스음악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고급 대중문화’의 일부로 취급될 수 있는 음악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한국의 고급 대중문화는 종종 그 자체의 내적인 가치보다는 ‘싸구려’에 대한 반작용을 통해 자기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음반이 모호하고 불길한 검은 안개가 아니라 크림 치즈처럼 물컹한 존재로 나타난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감상 전에 베이글과 커피, 그리고 햇살이 잘 비치는 커다란 창문이 옵션으로 딸린 처연한 봄날을 준비해 두면 좋을 것이다. 20040323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4/10

수록곡
1.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2.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
3. 세상의 끝
4. 夜想曲
5.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6. 봄이 오면 G
7. Melancholia
8. 미저리
9. 봄이 오면 P
10. 증오는 나의 힘
11. Girl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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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 [Shadow Of Your Smile] 리뷰 – vol.3/no.24 [20011216]

관련 사이트
김윤아 공식 홈페이지
http://www.loveyu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