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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 – Lost In Translation – Emperor Norton, 2003

 

 

이방의 도시, 외로운 영혼들의 드림 팝

몇 년 전 도쿄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주쿠나 하라주쿠 같은 번화가를 지나던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이나 도시 곳곳에 만연되어 있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쿄가 치유할 길 없는 고독감에 휩싸인 도시라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이 낯선 땅에 여행을 온 나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보았던 화려하지만 왠지 적막한 도시의 야경과 점심시간에 커피 숍에서 혼자 샌드위치를 먹던 어느 노인의 표정에 깃들어 있던 것은 숨막히는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 영화를 보며 그 때 내 온 몸을 휘감았던 쓸쓸함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Lost In Translation](우리말 제목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은 거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의 두 번째 작품이다. 미국에서는 골든 글러브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는 등 비평가들과 영화 팬들의 찬사를 받은 화제작이다. 그런데 이러한 찬사가 무색할 만큼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아니 어쩌면 졸린 영화다. 밥 해리스라는 이름의 한물간 중년 배우가 위스키 광고 촬영을 위해 도쿄의 한 호텔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일밖에 모르는 사진작가 남편을 따라 와 무료하게 소일하는 샬롯을 만나게 되고 결국 서로에 대한 동질감을 확인하며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니 말이다. 출연진 역시 화려하지는 않은데, 밥 해리스 역의 빌 머레이(Bill Murray)는 [Saturday Night Live] 출신의 코메디언으로서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2)]과 같은 영화를 통해 국내에 얼굴을 알린 바 있으며 상대역인 샬롯으로 분한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은 [프릭스(Eight Legged Freaks, 2002)에 조연으로 나왔던 20살의 신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화의 초라한 외관 속에는 잔잔하고 깊은 울림이 진동하고 있다. 낯선 도시의 호텔에서 만난 중년의 유부남과 젊고 매력적인 유부녀의 만남은 불륜의 침침한 냄새도 짜릿한 로맨스도 아닌 절박한 연대감으로 맺어진다. 그리고 [Lost In Translation]은 제목이 암시하듯 소통이 부재하는 이방의 도시에 유폐된 고독한 인물들의 내면에 조용히 다가서지만 지독히도 말이 없다. 각자의 배우자로부터 소외된 두 주인공은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거나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신다. 이런 장면에서 빌 머레이는 무기력한 중년 남자의 고독감과 심드렁한 표정을 특유의 허무한 유머와 함께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 샬롯은 호텔 방에 있는 내내 팬티 바람으로(물론 상의는 입은 채)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도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곤 하는데 영화의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그녀의 맨다리는 관능적인 느낌보다는 버림받은 소녀의 모습 같이 묘하게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 한 마디 내뱉지 않는 밥과 샬롯은 심지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이별의 순간에서마저 다시 만날 기약인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고백인지 모를 귓속말로 웅얼거린다. 이런 장면은 통속적인 멜로물의 진부한 감상주의를 벗어난 독특한 침묵의 화법이자 헐리우드 영화를 기준으로 할 때 새롭긴 하지만, 사실 현대 작가주의 영화에서는 익숙하게 보아온 것들이다(혹자는 왕가위를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일본의 전통문화를 지나치게 생경스런 인상으로 스쳐간다거나, 흔히 왜색으로 지칭되는 동경의 유흥가와 TV 오락 프로그램들, 지나치게 친절한 일본인들의 모습 등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불편한 시선도 있다.

내러티브와 감정발화보다는 여백과 침묵이 강조된 이 영화에서 음악은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소피아 코폴라의 데뷔작 [처녀 자살 소동(The Virgin Suicides, 1999)]에도 참여했던 브라이언 레이첼(Brian Reitzell)이라는 음악감독이 엄연히 있고 코폴라 감독 스스로가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이러한 선곡이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 OST는 케빈 실즈(Kevin Shields)에 의한, 케빈 실즈를 위한 작품이다. 그간 프라이멀 스크림(Primal Scream) 등 다른 밴드와 연주하거나 리믹스 작업에 매진해왔던 그는 이 앨범에 신곡 “City Girl”과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Loveless](1991) 수록곡 “Sometimes” 등 총 5곡을 제공했다. 케빈 특유의 두터운 기타 노이즈를 만끽할 수 있는 앨범의 간판 트랙 “City Girl”이나 신비로운 리버브로 가득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식의 앰비언트 넘버 “Goodbye” 등은 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지만 그 외 나머지 곡들이 지나치게 짧은 소품이라는 점이 다소 서운하다.

한편, 데쓰 인 베이거스(Death In Vegas)의 [Scorpio Rising](2003)에서 커트된 “Girls”는 천상의 기운 가득한 전형적인 슈게이징 넘버로서 케빈 실즈보다 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전성기 시절에 가까운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그밖에 일본 밴드인 해피 엔드(Happy End)의 소박한 포크 록 “Kaze Wo Atsumete”, 브라이언 레이첼 스스로 연주에 참여한 짧고도 강렬한 일렉트로니카 넘버 “On the Subway”, [The Virgin Suicides]에 이어 코폴라 감독의 영화에 참여한 에어(Air)의 “Alone In Kyoto”도 에쓰닉(ethnic)한 무드를 조성하는 매력적인 트랙이다. 그리고 모든 곡들이 뮤직비디오와 같은 느낌으로 영화의 장면들과 절묘하게 호흡하지만, 특히 택시 안에서 샬롯이 술에 취해 도쿄의 야경을 쳐다보는 씬에 등장하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Sometimes”나 밥이 샬롯과 작별의 키스를 나누고 공항으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에 흘러나오는 지저스 앤 메리 체인(The Jesus & Mary Chain)의 대표곡 “Just Like Honey” 등은 영상의 힘을 얻어 감각적으로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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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오케 복도의 두 주인공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부르던 다소 어설프지만 감칠 맛 나는 노래들이 빠져 있는 점이다. 특히 가라오케 씬에서 샬롯이 밥을 쳐다보며 귀엽게 춤을 추며 부르는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의 스매시 히트곡 “Brass In Pocket”이나 역시 그곳에서 밥이 부르는 “More Than This” 등은 놓치기 아까운 곡들이다. 특히 “More Than This”는 록시 뮤직(Roxy Music)의 1982년 명반 [Avalon]에 수록되었던 곡으로서 빌 해리스가 이 상큼한 뉴 웨이브 넘버를 건조한 표정과 우수에 찬 저음으로 쓸쓸히 읊조리는 모습은 음악 팬들만이 캐치할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다(OST 앨범을 끝까지 듣다 보면 “Just Like Honey”가 끝나고 무려 8분 뒤 히든 트랙으로 잠깐 흘러나오기는 한다).

[Lost In Translation]은 아직까지 국내에서 음악이 좋은 영화로 소개되고 있지 않으며 케빈 실즈의 이름이 더 알려질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대중적으로 어필할만한 감각적인 일렉트로니카 소품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앨범에서 가장 부각되는 드림 팝과 앰비언트 넘버들은 영화 저널리즘이나 대다수 영화 팬들에게 비교적 생소한 장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드림 팝이라는 실험적 음악이 영상언어와 이토록 감각적으로 융화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소중한 작품이다. 그것은 마치 지상의 로맨스에 등을 돌렸던 이 차가운 노이즈가 외로운 영혼들을 위무하는 몽환가로 도래하는 듯한 잔잔한 희열을 선사한다. 20040210 | 장육 jyook@hitel.net

6/10

수록곡
1. Intro/Tokyo
2. City Girl – Kevin Shields
3. Fantino – Sebastien Tellier
4. Tommib – Squarepusher
5. Girls – Death In Vegas
6. Goodbye – Kevin Shields
7. Too Young – Phoenix
8. Kaze Wo Atsumete – Happy End
9. On the Subway – Brian Reitzell & Roger J. Manning Jr
10. Ikebana – Kevin Shields
11. Sometimes – My Bloody Valentine
12. Alone In Kyoto – Air
13. Shibuya – Brian Reitzell & Roger J. Manning Jr
14. Are You Awake? – Kevin Shields
15. Just Like Honey/More Than This – The Jesus & Mary Chain/Bill Murray[hidden tr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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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My Bloody Valentine 팬 사이트
http://www.mybloodyvalentine.net
My Bloody Valentine 한국 팬 사이트
http://home.postech.ac.kr/~knecht/valentine
영화 [Lost In Translation] 공식 사이트
http://www.lost-in-translation.com
영화 [Lost In Translation] 한국 공식 사이트
http://www.sarangdo.com
Emperor Norton Records 공식 사이트
: OST 수록곡 클립과 “City Girl” 뮤직 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다.
http://www.emperornort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