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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ious Artists – Sunset : False – Slow Noir, 2003

 

 

이름 없는 섬들의 희미한 연대

웬만한 앨범은 각종 파일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다 들어볼 수 있는 요즘에도 인내심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다. 방대한 정보량을 자랑하는 AMG나 역시 없는 음반이 거의 없는 Amazon과 같은 사이트에서도 흔적을 찾을 길 없고, 하루 종일 파일 공유 프로그램을 돌려도 단 하나의 수록곡도 뜨지 않는 [Sunset : False]와 같은 편집음반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음반을 구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흔하지 않은 음반 하나 손에 쥐었다고 우쭐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레이블측에 앨범을 직접 주문하고 몇 주를 기다리는 동안 느껴진 긴장감이 반가워 해본 말이다.

본작은 온라인 언더그라운드 뮤직 사이트 Pennyblackmusic의 공동 매니저인 존 클락슨(John Clarkson)이 설립한 신생 인디 레이블 Slow Noir 레코드의 첫 작품으로서 매우 접하기 힘든 인디 밴드들의 싱글을 묶어놓고 있다. 지독한 무명 팀들의 군집이지만 이런 컨셉의 편집앨범은 독집 앨범을 구하기가 어렵거나 검증이 안된 낯선 밴드들의 음악을 접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효용가치가 있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활동중인 밴드들과 프랑스 출신까지 아우르고 있어 공간 범위도 넓다. 어쨌든 이 앨범에 관심을 갖게 한 밴드들인 아르코(Arco), 트랜스미셔너리 식스(Transmissionary Six) 등 몇몇 눈에 익은 이름에도 불구하고 앨범의 외관은 낯설고 초라하다. 또 트랙의 배치 방식이 밴드명의 알파벳순이라는 점도 성의 없어 보인다(다행히 짜임새는 그런대로 있는 편이지만).

어설픈 기교를 뽐내는 듯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다소 작위적인 창법을 구사하고 있는 샌 프랜시스코 출신 싱어송라이터 아나무드(Anamude)의 오프닝 트랙과 맨체스터에서 활동중인 듀오 안나 캐시파이(Anna Kashfi)의 평범한 포크 발라드까지만 해도 내용마저 별 볼일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이후의 트랙들은 저마다의 색채를 머금고 자신만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특히, 콘트라베이스와 비올라, 비브라폰 등의 악기로 재즈풍의 화성을 조성하고 있는 런던 출신 2인조 코펜하겐(Copenhagen)의 “The Divide”와, 내시빌(Nashville)의 챔버 팝 밴드 램찹(Lambchop)에서 노래와 색소폰을 맡고 있는 여성 보컬리스트 디앤나 버레이고너(Deanna Varagona)의 포크 송 “Missing a Friend”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또한 이 앨범, 특히 전반부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라면 어쿠스틱 기타와 여성(혹은 여성적인) 보컬의 부각을 들 수 있을 텐데, 반복되는 여성 싱어들의 노래들 속에서 닉 케이브(Nick Cave)의 음울한 저음을 닮은 래스트 하버(Last Harbour)의 “Serpents”는 피아노와 스트링의 화려한 합주가 더해져 색다른 결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전반부의 낯선 트랙 리스트 가운데에서 아마 시선을 끄는 이름은 아르코일 것이다. 이미 작년에 라이선스 음반이 발매되어 잔잔한 반향을 몰고 왔던 이 수줍은 영국 청년들은 여전히 특유의 명징한 기타 음과 처연한 속삭임을 토해놓고 있다. “Waiting”은 그들의 새 앨범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팬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될 곡이지만 지나치게 짧은 소품이라는 점이 아쉽다.

이 앨범의 진가는 좀 더 다채로운 트랙들이 포진된 후반부에서 발휘된다. 영국 셰필드(Sheffield) 출신의 파워 팝 밴드 리포멘(Repomen)의 “Songs They Never Play on the Radio”는 오아시스(Oasis)를 연상시키는 진득한 기타 톤으로 시작되어 버즈콕스(Buzzcocks) 풍 소프트-펑크 스타일로 템포에 변화를 주고 있는 곡으로서 앨범에서 가장 로킹한 트랙이다. 또 후반부에는 매직 트웰브(Magic 12)와 멜맥(Melmac)이 들려주는 실험적인 성향의 포스트 록 넘버들도 배치되어 있다. 먼저 매직 트웰브의 “Disconnected”는 부드러운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시작되어 미세하게 변조되면서 어둡고 처연한 일렉트로닉 노이즈가 아련히 퍼져 가는 아름다운 곡이다. 또한, 프랑스 출신의 형제 포스트 록 듀오 멜맥의 “Crash”는 곡 전체가 단조로운 드론 노이즈와 길게 울리는 오르간 소리로만 이루어져 영화로 치면 극단적인 롱 테이크 한 장면을 본 듯 하다. 그리고 앨범의 종국으로 가면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밴드이기도 한 트랜스미셔너리 식스의 “Sockeye”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시애틀 출신의 인디 포크 밴드이지만 포크의 테두리를 넘나드는 이색적인 사운드를 만들고 있는데, 이 곡 역시 나른하게 흐느끼는(whining) 기타 음과 필터링 처리된 테리 모울러(Terri Moeller)의 보컬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Sunset : False]는 수록곡의 수준도 균질적이지 않고 아직 아마추어 티를 못 벗은 함량미달의 트랙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신생 레이블의 첫 기획치고는 알차다고 볼 수 있다. 또 같은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공통된 장르나 스타일로 묶이기도 곤란한 음의 파편들은 자욱한 해무(海霧)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내는 익명의 군도들처럼 신비스럽다. 이 신비감이 저주스런 숙명이 될지 몇몇 밴드에게 조금의 명성이라도 맛 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기 느슨하고 희미한 연대의 자리에서만큼은 희망적인 기운이 감돌고 있다. 20040122 | 장육 jyook@hitel.net

6/10

수록곡
1. New Leaves – Anamude
2. Ash Ballad – Anna Kashfi
3. Waiting – Arco
4. Postcards(Early Demo) – Baptiste
5. The Divide – Copenhagen
6. Missing a Friend – Deanna Varagona
7. Autumn – Harper Lee
8. Fugue – La Nuit Americaine
9. Serpents – Last Harbour
10. Disconnected – Magic 12
11. Crash – Melmac
12. Songs They Never Play on the Radio – Repomen
13. Electric Light Shine On – Saint Joan
14. Sockeye – Transmissionary Six
15. Housing Estate – The Workhouse

관련 사이트
Slow Noir Records 공식 사이트
: 앨범 구입처와 참여 밴드들의 바이오 데이터, 홈페이지 등의 정보가 있다.
http://www.slowno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