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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하이(EpiK High) – Map of The Human Soul – 2003

 

 

랩으로 그려내는 서사(Epic)

씨비매스(CB MASS)의 3집 [Massappeal]에 수록된 “동네한바퀴(Massmediah Version)”는 에픽하이의 타블로(Tablo)를 위한 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버스부터 “나의 고뇌가 고래가 돼 / 요나처럼 삼키네”라고 부드럽게 읊조리는 타블로의 랩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데뷔작을 기대하게 했다. 곧이어 인터넷에 “GO”와 ”그녀가 불쌍해“의 MP3가 공개되고, TBNY의 “유서”에 참여하면서 이들은 발매 이전에 이미 입소문에 둘러싸였다. 씨비매스를 연상시키는 비트와 랩, 스탠포드(Stanford) 대학을 졸업했다는 타블로의 학력을 둘러싸고 인터넷 게시판에선 말들이 많았다.

이들의 데뷔작 [Map of The Human Soul]의 뚜껑이 열리면서 이러한 논란은 수그러드는 분위기다. 각각의 곡들이 탄탄한 음악적 완성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타블로와 미쓰라(Mithra)의 랩은 부드러운 플로우 위에 기존의 한국 힙합과는 확실히 다른 가사를 전달한다.

이들의 가사가 마구잡이로 내뱉는 공격적인 랩과 다른 점은 이미지의 활용에 있다. 하고 싶은 얘기를 명령조로 라임을 맞춰가며 뱉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나 비유들을 제시하며 하나의 서사(Epic)를 그려낸다.

“내 어린 시절 주제가는 엄마가 치던 통기타 소리와 나팔바지 아버지의 하모니카 / 그 짙은 흑백 멜로디가 알고 보니까 / 현실의 사막에 지친 내겐 파도소리와 같은 존재 / 내 작은 손에 담겨질 만큼 세상은 종이 딱지만 했는데 / 어느새 다 큰 숨가쁜 나는 항상 멜랑 꼴리 / 어린 황자들의 스토리속 하나뿐인 못난이”(“I remember”, 타블로)

“인생이란 버드나무 / 너는 지는 낙엽 / 수천 수만 가지 입은 너의 경쟁자며 / 실패란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낙엽이 된 가엾은 그대여 두발로 뛰어가렴 / 버팔로 같이 거친 인생의 풍파도 / 날카로운 창과 칼로 다진 수난도 / 자신감의 방패를 쥔 너의 두 팔로 막아내고 / 다시 태어나 인생의 투사로 / 눈물로 고개를 숙여버리기엔 너는 아직도 채 익지않은 벼이기에 / 힘에 부칠 땐 기대감에 기대/실패는 기회란 생각이 참된 삶의 지혜”(“풍파”, 미쓰라)

비트가 흘러가는 가운데 듣는 이의 머릿속엔 상황에 대한 하나의 선명한 그림이 떠오른다. 이들의 랩은 메시지를 전달한다기 보다 한 장면을 선명하게 잡아내는 것에 가깝다. 그 장면에 대해 그리움, 후회 혹은 동정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묻어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대해 명확히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나스(NAS)가 데뷔작 [Illmatic]을 통해 뉴욕을 그려낸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하지만 상황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가끔 위태로워 보인다. “I remember”나 “10년 뒤에(Dear Me)” 같은 곡들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다루는 능력, “GO”, “Free Love”, “Get High”에서의 재치 있는 말장난은 성공적이지만, “그녀가 불쌍해”나 “하늘에게 물어봐”는 버겁다. 곡의 주제가 되는 사람들의 삶에 천착한다는 느낌보다는, 힐끗 보고 문제를 쉽게 규정해버린다는 느낌이 강하다. 진지한 접근이 자리할 곳을 구체적인 이미지의 나열이 대신하고 있으니 랩의 호소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곡의 주제인 “삶은 온통 다 구라”인 사람들과 “불쌍”한 그녀들에게 이들 곡이 호소력을 갖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물 흐르는 것 같다는 타블로의 유명한 플로우는 여전하고, 미쓰라 역시 목소리가 최자와 비슷하다는 억울한(?) 약점만 제외하면 에픽하이의 데뷔앨범은 거의 최상에 가까운 랩을 들려준다. 프로듀싱 역시 씨비매스의 [Massmediah]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피아노와 기타 루프들을 자주 사용해 랩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 변하지 않는 스타일을 고수하는 주석을 제외하면 다이너믹 듀오(Dynmaic Duo)나 더블케이(Double K), 한상원 등의 피처링진들과의 조화도 훌륭한 편이다. 리쌍의 [재, 계발]처럼 일관된 정서를 표현한다는 느낌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알차고 개성적인 음반이며, 무엇보다 인상적인 데뷔작이다.

이미지를 다루는 이들의 능력이 “비트위에 흐르는 시”를 한국어로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과거의 추억을 달콤한 비트 위에 좋은 멜로디와 섞어서 읊어주는 것을 넘어설 수 있다면, 사물의 표면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질 수 있다면 “랩하는 양아치”가 아닌 철학자 MC, 시인 MC를 만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20031201 | 선민 sun1830@hotmail.com

7/10

수록곡
1. Go
2. 풍파 (feat. 한상원)
3. I Remember (feat. Kensie0
4. 하늘에게 물어봐 (feat. Dynamic Duo)
5. 10년 뒤에 (Dear Me) (feat. Leeds)
6. Lesson One
7. 그녀가 불쌍해 (feat. Lyn)
8. Street Lovin’ (feat. 주석)
9. Love Song (feat. 박성웅)
10. 고독恨사랑
11. Free Love
12. Get High
13. 유서 feat. TBNY
14. 막을 내리며(Dedication)
15. Watch Ya Self (feat. Yankie, Double K) (Hidden Track)

관련 영상

“I Remember”

관련 사이트
에픽 하이 공식 홈페이지
www.epikhig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