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집에서는 기존에 만들어졌던 곡이 아닌 새로운 곡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2집에서 표현해 보지 못한 그런 파격적인 음악을 시도하려는 연장선상으로 생각됩니다.”: 산울림의 1-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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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당시 1집에서의 연주를 들으면 박자가 잘 맞지 않는데요, (그게 더 좋게 생각되기도 합니다만) 형제들의 연주력에 대한 산울림 멤버들의 생각은 어땠습니까? “좀 더 잘 연주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지요. 말하자면 연주력에 대한 반성이 있었는지요.
– 지금 생각해보니 기본 연주력보다는 녹음실의 비용에 대한 강박감 등으로 빨리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지요. 시간여유를 갖고 부족한 부분을 더 연습을 하던지 또는 재녹음을 하던지 해야 하는데 저희 형제만의 의지로 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외부 탓으로 이유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완성도가 떨어지는데 오케이 사인이니 나니 누구 한사람의 주장이 먹혀들 수 없는 면도 있었죠.

Q: ‘베이스의 거장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이 있으셨습니까? ^^
– 베이스에 대하여 관련된 책자 등이 없었던 현실이었기 때문에 막연히 베이스 교습서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산울림만의 베이스 스케일 등을 정리하여 체계화하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있었지요.

Q: 2집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전주만 2-3분인 곡인데 앨범에 실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게다가 음반의 타이틀 곡으로 실렸을 뿐만 아니라 방송에서도 계속 틀어주었고 히트도 했습니다. 물론 방송에서는 거의 앞부분의 사이키델릭한 전주가 잘린 형태로 방송되었습니다만…. 밴드 멤버들이 곡을 만들면서 걱정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리고 음반사의 반대가 있지는 않았는지요.
– 곡에 대하여 음반사는 일체의 간섭과 의견이 없었습니다.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아마 이런 발상으로 시작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 간주를 중간에만 하느냐, 전주를 이렇게 해보자, 그리하여 어떠한 기대감을 주고 긴장감을 주었다가 전개해보자’ 하는 식이지요.

Q: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전주에서 베이스의 울림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베이스의 ‘소리’에 대한 취향은 어떤 편인지요. 앰프에서 EQ 조정에 대한 취향이나… (이런 것을 여쭙는 것은 노하우를 훔치려는 것이나 다름없겠습니다만.. ^^) 묵직한 울림을 좋아하신다거나, 아니면 통통거리는 소리를 좋아하신다거나.
– 통통거리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베이스다운 음색을 좋아한다고 할까요. 앰프와 연주되는 기타에 따라 음색을 조절해야 합니다. 좋은 앰프와 기타가 좋은 음색을 주기 때문이지요.

Q: 2집에서의 키보드는 김난숙 님이 연주하신 것인지요? 변성룡 님이 연주하셨다는 말씀이 있던데요. 그리고 산울림에서 키보드의 편곡라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요? 김난숙 씨가 세션을 하실 때는 김창완 님이 악보를 그려주었다고 하던데요.
– 김난숙의 경우 클래식 피아노만 치고 째즈와 같은 음악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Feel’을 통한 연주가 불가능했습니다. 리듬도 그렇고.. 악보를 곧이 곧대로 치는 것만 익숙하기도 했죠. 결국 형(김창완)이 멜로디를 그려 주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밴드의 ‘feel’이 들어가서 어우러지는 연주가 불가능하였고, 연습 시간도 한계가 있고… 결국 완성도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많은 음악이 된 것이지요.

Q: 변성룡 님이 연주하셨다면 그분의 경우도 김창완 님이 그려주신 것인지요? 키보드 주자가 바뀐 이유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라이브 시에는 키보드가 함께 하지 않는데, 그것은 라이브에서는 키보드가 필수적이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인지요.
– 그런데 저는 변성룡 님이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워낙 그런 기억력이 부족해서… 라이브에서 키보드가 함께 하지 않은 것은 활동의 불편함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3인조로도 가능하기 때문이었겠지요. 한 집에서 사는 형제의 기동력이 3인조로 굳히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키보드와 같은 또 다른 파트가 있었다면 얼마나 연주와 작품 표현에 도움이 되었겠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어차피 곡은 3인조로 만들어지고 있었으니까요.

Q: 1집에서는 사운드에 대한 주도권이 산울림 멤버들에게 있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2집은 보다 멤버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음반이라고 봐도 좋을지요? 그리고 1집과 달리 ‘스튜디오에서의 음향 실험’에 대한 의식이 싹튼 작품이라고 봐도 좋을지요?
– 진정한 산울림이 추구하는 사운드는 기성 녹음실에서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리하고 나중에 8집인가에서 직접 녹음하게 된 것입니다. 아주 하드한 사운드로… 그러나 8집의 경우 사운드 자체는 좋았으나 엔지니어가 없이 직접 녹음한 것이고 또 믹싱 등의 작업이 무엇인지도 몰랐기에 역시 아쉬운 점이 있었지요. 사운드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4집, 15집에서나 이루어질지? 오히려 13집이 가장 좋은지도 모르겠어요.

Q: 2집에는 “나 어떡해”가 실려 있습니다. 샌드 페블즈 때와는 코드도 약간 다르고 다른 맛이 납니다. 산울림의 곡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곡 중 하나인데요, 이 곡에 대한 본인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곡을 만들 때 의도가 있으셨다면? 그리고 후배들에게 줄 곡이라는 점에 대한 염두가 있었는지요.
– 이 곡은 사실 1집에 수록하려고 했는데… 그리고 산울림 2집에도 수록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아마 지금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레코드 회사의 권유가 작용하여 수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샌드 페블즈가 발표한 “나 어떡해”는 사실 너무 느리게 연주되었어요. 가요제때 아마 많이들 긴장해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후배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된 것은 아니고 작곡된 곡 중에서 가요제에 출품하기 적당한 곡이라 생각되어 골라진 것이지요.

Q: 3집에서는 김창훈 님의 곡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첫 곡인 “내 마음은 황무지”뿐 아니라 “그대는 이미 나” 같은 경우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3집에서 김창훈 님의 곡이 많아진 사연이 있는지요? 그렇다면 김창훈 님의 곡들은 언제 만들어진 것이었는지, 기존에 만들어진 곡과 새로 만들어진 곡에 대한 구체적인 구분이 가능하시면 사례를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3집에서는 기존에 만들어졌던 곡이 아닌 새로운 곡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2집에서 표현해 보지 못한 그런 파격적인 음악을 시도하려는 연장선상으로 생각됩니다. 3집이 흥행에서 실패한 것은 군입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활동의 주체가 없이 출반된 최초의 산울림 앨범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같으면 아예 군제대 이후로 미루었을지 모르죠.

Q: 김창완 님의 경우 발라드나 동요, 민요풍의 노래도 많이 만드시는데, 김창훈 님의 곡들은 보다 스트레이트하고 헤비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컬의 목소리도. ^^ 김창훈 님께서 보다 록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스트레이트한 면은 악상에 있어 환상적이며 몽상적인 표현이 가능한 형님의 음악과 구분되어진 자연스런 개성일지 모르겠어요.

Q: “그대는 이미 나”의 경우 작곡하실 때 가사나 음의 표현 등에서 주안점을 두신 부분이 있으셨다면? 그리고 긴 노래인데, 악보를 그려서 작곡하신 것인지요?
– 악보를 그려가면서 작곡되었습니다. 산울림식 악보라고 봐야지요. 문자식의 악보라고나 할까요. 한 곡을 가지고 라이브를 한다고 상상하며 그려진 곡입니다. 3인조로 한번에 연주할 수 있는… 라이브의 실현은 못했지만…

Q: 3집의 경우 상당히 실험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런 음악을 본래부터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었던 것인지 아니면 하다 보니 이런 영감이 떠오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시장에서 참패했다고 하는데 예상하셨는지? 아니면 혹시 이 음반마저 성공한다면 ‘판이 바뀔 수도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는지요?
–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활동주체가 없는 음반이다 보니 참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당시 산울림의 패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으며, 애호가들도 어떤 음악이라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자만(?)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음악의 내용보다 군입대로 인한 활동의 중단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군제대 후 7집에서의 성공이 이를 반증하는 것 아니가 하는 생각도 들고…

Q: 김창훈 님 본인은 산울림의 음악이 자유주의자의 그것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저항적인 로커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 산울림 시절은 저항이 통할 수 없는 그런 사회요 환경이었습니다. 왜냐구요? 모든 가사가
검열되던 시절이니 자연스럽게 ‘자유주의’적인, 서정적인 표현만이 가능하게 되었지요. 저항적인 로커를 할 수 없었지요. 어떤 도전과 반항과 저항이 통할 수 없는 때였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우회적으로 또 아슬아슬하게 표현해야 했어요. 하지만 가사에 대한 절제와 책임성은 항시 느끼고 있습니다. 욕설과 무질서와 앞뒤가 안맞는, 무의미하게 지껄이는 그런 가사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지요. 스스로의 기준에서..

Q: 김창훈 님의 곡이 많은 3집 음반의 분위기는 고독하고 황량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황무지”로부터 13집의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몰라”까지, 김창훈 님의 정서는 전반적으로 이런 쪽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 이제 사랑도 찾고 가정도 꾸리고 행복하게 삽니다. 하지만 행복은 어디에서 옵니까? 인간은 결국 유한하며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불쌍하고 황량할 수밖에 없지요. 지금 부자입니까? 지금 유명합니까? 높은 자리에 있습니까? 다 부질없는 헛수고 아닙니까. 나는 그런 인간의 정체성을 노래하고 싶어요. 그리하여 종국에는 예수님을 알리고 싶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그런 기회가 있다면 크리스찬 록 뮤직을 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이런 저런 절망적인 노래를 하다 세상을 비추는 희망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죠.

“4, 5, 6집은 다소 사생아적 성격이 있는 음반이라는 생각이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산울림 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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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집을 산울림 1기(?)의 마지막 앨범이라고 봐도 좋을지요. 4집은 음반사와의 계약 때문에 나온 음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김창완 님께 여쭤보니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음반의 전체적인 균형이 맞질 않고, 영화, 연극, 드라마 음악이나, 기타 방송에 사용되었던 음원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음반을 꾸미게 된 배경이 있다면? 혹시 불만은 없으신지요?
– 계약은 무슨 계약이 있었겠어요. 형님(김창완) 말씀대로 그런 건 없습니다. 사실 이 음반부터 산울림의 요소가 바래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분명 산울림 음악인데 산울림 음악이 아닌, 이상한 영향을 받은 음반이라고나 할까요. 4, 5, 6집은 다소 사생아적 성격이 있는 음반이라는 생각이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Q: 그 이전에 100곡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1, 2, 3집은 그 100곡 중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곡들을 뽑은 결과물이었는지요. 김창완 님은 1, 2, 3집까지는 1집 이전에 만들어진 노래들이라고 하셨고, [개구장이] 앨범, [산할아버지] 앨범이 활동하면서부터인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김창훈 님도 1977-78년에 다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 과거의 곡과 새로 만들어진 곡에 대한 김창훈 님의 기억을 다시 여쭤보려고 합니다. 정확히 어느 앨범부터 그 때의 곡들(100곡)을 쓰지 않고,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요? 과거의 곡을 쓰지 않았다면, 1, 2, 3집에 수록된 노래를 제외한 나머지 노래들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 버려진 것인지요.
– 이후에도 1970년대에 만들어진 곡을 수록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래 걷자” “집에 갈래” 등은 70년대 만들어진 곡으로 기억됩니다. 음반의 성격과 곡의 구성에 따라 이리 저리 조정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기는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했으며 전체 음반의 칼라와느낌, 그리고 주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Q: 그 이전 앨범에 비해, 긴장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멤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3집이 많이 팔리지 않은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을까요.
– 저희 형제는 앨범의 판매량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가장 최근인 13집의 정확한 판매량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 판매량과 음악의 내용과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Q: “특급 열차(속에서)”와 “카멜레온”은 연극 음악으로 사용된 곡으로 압니다. “유리인형” “어디로 갈까” “내일 또 내일” “바람부는 강 언덕”은 영화 [내일 또 내일](감독 임권택)의 삽입곡으로 알고 있고요. “그리움”도 이 영화에 수록된 곡 같은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는 특별히 기억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영화 음악의 녹음 일정에 쫓겨 밤샘 작업을 한 것 외에는… 그리고 만화 영화 음악을 만들었던 기억 등등 이외에는 미안하지만 기억도 안나고 잘 모릅니다. 임 감독님이 유명하신 분이지도 몰랐고…….

Q: “우리강산”의 훵키 디스코는 산울림이 처음 도전한 영역인 듯 보입니다만 김창훈 님의 시도였는지요?
– 베이스의 단조로움을 탈피할 방법을 찾다가 그런 효과를 도입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금새 싫증날 사운드로 생각되어 절제를 하였지요..

Q: 김창익 님의 곡(“풋나기들의 사랑”)이 있습니다. 김창익 님은 그다지 곡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만, 곡을 만드는데 있어서 산울림 형제 간에, 누구의 곡을 수록할지 대한 논의는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었는지요? 누군가가 곡을 가지고 오면 가부를 어떤 방식으로 결정했는지요.
– 작품성과 표현력, 아니 무엇보다도 가사에 의하여 거의 결정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맞아요. 가사에 의하여 거의 결정된 것 같습니다. 곡조가 아주 좋은 것이 아니라면……

Q: 5집은 김창훈 님과 김창익 님이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입대 전 기획했던 것을 휴가 중에 짬짬이 연주해서 마무리한 음반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는지요? 어떤 식으로 앨범에 참여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또 5집 앨범에서 김창훈 님의 곡이 “오솔길”, “봄”, “포도밭으로 가요”, “무녀도”의 4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3집의 경우에도 김창훈 님의 곡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3집도 그렇고, 김창훈 님의 곡이 많아진 사연이 있는지요?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4곡의 경우 곡을 만들고 나서 입대하신 것인지요?
– 휴가 중에 나와서 녹음하거나 한 것 같은데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군시절의 경우 인생중 망각의 기간이라 생각되어 별로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모든 기획은 형이 한 것으로 생각되고 노래는 모두 입대전에 녹음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Q: 위의 곡 중 “무녀도”는 전통적인 소재의 곡입니다. 이런 경향의 곡은 사실 1집에서부터 등장합니다. 전통 소재 혹은 민요적인 느낌의 곡들, 5집 “무녀도”를 비롯해 1집 “청자(아리랑)”, 5집 “백자”가 있고(이 두 곡은 한 쌍의 곡인지요?). 2집의 “떠나는 우리님”, 8집 “돌아오려무나” 등 까지 이런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민요적, 전통적 소재에 입각한 곡들은 밴드가 의식적으로 추구한 방향 중 하나였는지요? 그런 게 있었다면 어떤 멤버의 생각이 주요했는지요? 김창훈 님의 “무녀도” 역시 궁금한 지점이구요.
– 한국적인 록을 무의식중에 추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Q: 군 생활 동안 음악활동(혹은 관련일)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휴가를 나올 때 말고 악기를 다루거나 음악을 접하거나 할 기회가 있었는지요. 김창완 님께서는 군대에서 동생분들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했는데 두 분 다 군악대에 있으셨던 것인지요?
– 휴가중에 그런 기회는 없었습니다. 풀타임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또한 군악대의 군기가 강하여 그런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별로 도움된 것이 없었고, 동생의 경우는 드럼의 기본을 읽히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Q: 군악대에 계셨다면 연주나 음악에 대한 여러가지 면에서 군악대의 체험에 영향을 받은 점이 있다면?
– 제가 음악을 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아마 연예대라는 곳에서 밴드 생활을 했다면 모를까.

Q: 6집에서는 김창훈, 김창익 님께서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고장난 우주선이라는 팀이 세션을 했다고 합니다. 박동률(베이스), 김영국(드럼), 유지연(기타, 하모니카) 씨가 멤버였다고 들었습니다. 두 동생 분의 참여는 전혀 없었나요?
– 참여가 없었어요. 아마 4-5집까지 입대전 녹음된 곡이 바닥나고, 제대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또 제대 이후에도 컴백이 불투명한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형님이 단독으로 기획한 앨범이며 이후 형님 혼자의 활동이 가능케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앨범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이 앨범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후 [기타가 있는 수필] 등의 솔로 앨범도 출반이 안될 수도 있었겠지요. 여기서부터 형님의 음악 활동에 대한 고민과 독자성을 확보한 그런 동기를 부여한 앨범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와 같은 ‘김창완 음악’의 개성이 갈리는 그런 계기가 되었지 않았을까요.

Q: 이 앨범을 산울림의 이름으로 내는 것에 대해서는 형제분들 간에 서로 이야기된 부분이었을 것 같은데요,
-별로 그런 기억은 없고요. 형님이 공백 중에 애쓰신다는 생각이 있었지요.

Q: 멤버 중 누가 없더라도 산울림 활동이 계속 되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게 있었던 것인지요.
– 누가 없다는 것은 생각지 않고…. 글쎄요… 군대로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으니까 별 다른 방법이 없었지요. 요즘 아티스트는 어떻게 했을까 궁금합니다.

“빠른 비트의 음악은 댄서블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산울림 7-1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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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7집은 두 분이 제대한 이후의 앨범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더 산울림답기도 하고요. 그런데 음반의 녹음시기를 보면 김창훈·창익 님의 병장&말년 휴가를 활용해서 녹음한 게 아닌가 싶은데 어땠는지요? 이 시기에 두 분의 앨범 참여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 맞아요. 제대 무렵에 휴가나 외출하며 준비한 걸로 알고 7집은 100% 3형제가 다시 뭉쳐 작업한 겁니다.

Q: 그런데 퍼즈 톤 기타 사운드와 같은 사이키델릭한 부분이 많이 사라진 듯 여겨집니다. 오르간의 비중도 적어지고, 이전의 산울림이 하드 록으로서 사이키델릭한 출렁거리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앨범부터는 좀 더 스트레이트한 느낌입니다. 이런 변화의 이유가 있다면? 산울림 멤버들의 정서가 변했기 때문일까요? 변하였다면 어떠한 방향으로 변한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 글쎄요. 그사이 형님이 혼자 활동하면서 여러 제약이 있으니 알게 모르게 조금 기성화되었는지 모르죠.

Q: 김창훈 님 작곡의 “하얀 달”의 경우, 댄서블하고 그루브한 경향이 있습니다. 김완선 님에게 준 곡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록이 아닌, 이러한 댄서블한 음악에 대한 취향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지요?
– 사실 빠른 비트의 음악은 댄서블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되고, 그러한 곡들을 만들 때 그런 느낌을 갖고 만들어 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김)완선이 경우는 여성 로커를 기대하고 만들었는데, 다소 순화되고 각색되어 편곡되고 또 그렇게 자리매김된 면이 강합니다.

Q: 이 앨범에는 김창훈 님의 “독백”이 실려 있습니다. 직전의 인터뷰에서 김창훈 님께서 이 노래를 각별하게 아끼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창완 님에 따르자면 ‘”독백”은 초소에서 만든 노래이며 현실에 뿌리가 있는 노래들’이라고 하셨는데요. 이 노래에 대한 사연을 말씀해주세요.
– 초소는 악상을 다듬은 장소의 일부였을 뿐이지요. “독백”은 수개월 걸쳐서 완성된 곡입니다. 삶의 한계와 현실, 그런 허무함과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지요. 인생에 대한 체념, 포기 등은 모두들 느끼고 공감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Q: 김창완 님의 대성음반 입사(?)에 따라 7집부터 서라벌로부터 대성음반으로 음반사를 이적했습니다. 이러한 음반사의 변화는 산울림 음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가령 녹음할 때 더 자유로왔다던가, 보수를 더 많이 받았다던가 하는 것처럼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아니면 기존과 똑같았는지 등등.
– 기존과 똑 같다고 한다면 아마 별 관심이 없었으니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죠..

Q: 7, 8집을 보면 연주력의 능숙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연주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1, 2, 3집의 연주가 오히려 세련된 연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이 있어서 각별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긴 시간이니 만큼 시기에 따라 연주 스타일이 다른데, 본인이 생각하기기에 시기별로 연주 스타일을 평가하신다면?
– 연주가 특별히 일취월장했다고 하기는 곤란합니다. 군시절에 베이스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연습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녹음 스튜디오의 여건이 다소 나아지고 또한 형님이 혼자서 활동한 시기에 나름대로의 경험과 인프라 구축이 보다 프로화된 점은 있었지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드럼치는 막내(김창익)는 군에서 드럼 기본에 대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셈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습니다.

Q: 이어지는 질문입니다만, 자신의 베이스 라인에 대해서도 1, 2, 3집의 연주는 미숙하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럼요. 아쉬운 부분이 있지요. 지금은 그 라인이 그대로 굳어져 있지만 사실 지금 녹음한다면 다른 라인이 사용될지 모릅니다

Q: 8집 앨범에 실린 김창훈 님의 곡 “회상”은 산울림의 곡 중에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곡입니다. 김창훈 님의 곡의 가사를 보면 헤어진 연인에 대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가사는 체험에서 나온 것인지요? 이러한 가사의 사연이 있다면….
– 직간접적인 상상이 총동원되는 것 아니겠어요. 모든 창작이라는 것이 다…

Q: “사랑하니까” 등, 스카나 훵키 등 장르의 도입이 종종 눈에 띄는데요, 이러한 장르의 도입에 대해서 항상 꾸준히 듣고 연구하시는 편이셨는지요?
– 다른 색깔의 음악을 자꾸 추구하다 보니….

Q: 9집은 김창완 님이 개인적인 면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앨범인데요. 초기의 원초적이고 독창적인 사운드로 되돌아가려는 자성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김창훈 님께서 산울림 앨범 중에 가장 좋아하는 앨범은 어떤 것인지요. 그리고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의 기타 전주(리프) 이후 나오는 소리는 테입 역주행(?) 소리인지요?
– 맞아요. 예리하게 들으셨네요. 다른 시도이긴 하지만 “어느날 피었네”는 “하”를 아주 저음 목소리를 깔아서 악기 기분 들도록 녹음한 생각이 갑자기 나네요. 사실 저도 9집 앨범이 좋아요. 아마 7-8집 녹음하면서 정말 저희 형제는 녹음의 한계를 뼈아프게 느꼈어요. 녹음을 마치면 당초 구상한 음악으로 되지 않는 겁니다. 고심 끝에 ‘그러면 직접 녹음하자’ 그래서 9집이 나온 겁니다. 가장 우리가 원하는 색깔의 음악에 가깝게 녹음되어 나온 거지요.

Q: 이 앨범에서 “소낙비”를 위시해서 “빨간 신호등”, “속도위반” 등 4곡을 수록하셨습니다. 소낙비는 앨범에서 가장 하드한 넘버이고요. 사운드 및 연주는 매우 강력하지만 가사가 무척 재미있습니다. 이 곡들의 작사에 대한 에피소드 같은 게 있다면 소개부탁드립니다.
– 현대 도시적인 정서를 표현하고자 시도한 것이지요. 그전에는 전원적이고 서정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면 말이죠.

“산울림 음악에서 가사의 비중은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모두 심의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표현에 제약과 한계가 많았고 일부 곡은 내용이 다소 각색되고 변질되어 발표된 적도 있습니다”: 산울림의 음악 이야기

Q: 산울림의 파격적인 측면은 음악도 음악이지만 한국말을 가사로 활용하는 방법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일상적인 구어로 시적 감성을 담아내는 부분에는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산울림 음악에서 가사는 어떤 비중이었는지요?
– 산울림 음악에서 가사의 비중은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모두 심의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표현에 제약과 한계가 많았고 일부 곡은 내용이 다소 각색되고 변질되어 발표된 적도 있습니다. 곡이 너무나 아까운 경우에는 가사 재심의를 위하여 그런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지요.

Q: 연관한 질문입니다만, 보통 가사가 먼저 있고 곡을 만드는 방식이었는지, 아니면 곡을 만들고 가사를 만드는 방식이었는지요. 아니면 한 번에 발상되어 나오는 식이었는지요. 김창훈 님과 김창완 님이 곡을 만드는 방식이 달랐다면 그것도 이야기해주세요. ^^
– 저는 보통 늘 어떤 주제와 설정을 상상하고 읊조리다가 어느 순간 한번에 8-90%를 완성하고 이후에 10-20%를 시간 여유를 갖고 마무리하는 편이었습니다.

Q: 김창완 님이 “(8집에서 영악한 팔기를 시도해 성공하자) 그걸 좀 자책을 해서 9집은 그야말로 우리 본질을 보여준다고 의욕적으로 작업을 했는데 그건 대외적 평가가 매우 안좋았아요 그래서 다시 초창기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록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초창기에 산울림 사운드를 구사하겠다고 해서 10집을 냈어요. 그래서 10집 앨범은 참 좋아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동의하시는지요?
– 10집은 제가 본격적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시기이기에 제가 참여할 수도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산울림의 색깔이 변질된 앨범이라 생각합니다. 6집과 비슷하게요.

Q: 6집부터 10집까지는 1년에 한 장씩의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주기는 염두에 두어진 것인지요?
– 특별한 염두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래도 1년에 한번 새 앨범을 발표해야지 하는 의무감과 강박 관념이 있었는지 모르죠.

Q: 10집의 “너의 의미”에서 이치현 님이 기타를 연주하셨다죠? 김정택 님은 어느 곡에서 도와 주셨는지요? 그리고 이런 분들에 의해 산울림의 사운드가 달라졌다고 볼 수 있는지요?
– 당연히 산울림 음악이 변질되었죠. 기성 프로에 의한 강제적인 변형이 이루어진 거지요. 돌연변이 같이…

“저는 여성 록커를 생각하면서 곡을 지었어요. (김)완선이 음색도 그렇고 편곡도 그렇게 기대했는데 실제 결과는 조금 다르게 나왔습니다.”: 김완선의 작곡자 활동 및 산울림 10집 이후

Q: 10집을 이후로 김창훈-창익 님의 앨범 참여가 사라집니다. 이는 어떤 연유로 인한 것인지요?
– 완전히 직장 생활 때문이지요. 직장에 전념하라는 형님의 말씀도 있었죠.

Q: 이후 11집이 나오는 1986년은 김창훈 님께서 김완선 씨의 앨범에 참여하시는 시점입니다. 김완선 씨의 앨범에 참여하는 것이 산울림 활동과 단절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아닙니까?
– 나는 창작이 가능하고 창작 의욕이 있는데, 활동에는 제약(직장생활)이 있으니 그렇게 돌파구가 마련된 거지요.

Q: 여기서 김완선 씨 앨범에 대한 말씀을 여쭈려고 합니다. 김완선 앨범에는 어떠한 계기와 동기로 참여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가령 누구의 소개를 받았으셨는지요. 댄스 음악에 대한 관심도 있으셨을 것 같기도 하구요.
– 그 당시 인순이 제작자인 한백희 씨로부터 제안이 있어 참여하게 되었지요. 댄스를 잘하니 춤추며 부르기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Q: 이때 곡을 쓰실 때 김완선이라는 가수를 염두에 두고 새로 곡을 쓰셨던 것일텐데 어떤 점을 특별히 염두에 두셨는지요.
저는 여성 록커를 생각하면서 곡을 지었어요. (김)완선이 음색도 그렇고 편곡도 그렇게 기대했는데 실제 결과는 조금 다르게 나왔습니다. 또 편곡하던 분은 갑자기 요절하고 또 저도 직장 생활에 묶여 있어 녹음에 깊이 관여를 못했어요..

Q: 사실 김창훈 님의 곡이 없었다면 히트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는데요…^^
– 과찬의 말씀이고요. 한백희 씨와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컸다고 봅니다.

Q: 김완선 1집 [오늘밤](1986)의 편곡자 박강호 씨는 어떤 분이신지요.
– 맞아요. 이분이 1집을 편곡하고 갑자기 간암인가로 돌아가신 걸로 압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저는 그분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그 당시 한백희 씨가 섭외를 하였고 최고 일류 편곡자로 알려져 발탁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Q: 김완선 2집 [나홀로 뜰앞에 서서](1987)의 편곡자는 연석원 씨입니다. 1집과 2집 중 편곡 스타일은 (혹은 둘 중의 어느 분의 편곡이) 김창훈 님의 마음에 흡족했는지요.
– 두분 모두 최선을 다하신 걸로 알고 결과적으로 만족합니다. 1,2집 머리곡이 잘 알려졌으니 감사하죠.

Q: 솔로 가수를 위해 작곡하는 것과 그룹 활동을 위해 작곡하는 것에 어떤 차이나 매력 같은 걸 느끼셨는지요.
– 개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면에서 좋은 점이 있고 참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던 기회였지요.

Q: 11집에는 김창훈 님의 “옷 젖는 건 괜찮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1, 12집에는 김창훈-창익 님의 참여가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김창훈 님의 곡이 수록된 것은, 형제 간에 음악적 교류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인지요?
– 제가 앨범에 일부나마 참여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려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산울림의 앨범이라는 이름에 덜 미안하게… 10집은 형이 혼자 작업했으니까요.

“(복귀 앨범인 13집에 대해) 저는 강한 음악을 원했어요.”: 솔로활동, 산울림 13집, 그리고 그 이후

Q: 산울림의 재결성을 제안한 것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밴드의 복귀를 둘러싸고 형제 간에 오간 이야기가 있었는지요. 복귀 이후 계속해서 산울림 활동을 하실 생각이셨는지요.
– 개구장이 팬클럽이지요.

Q: 복귀를 둘러싸고 형제 간에 오간 이야기가 있었는지요. 복귀 이후 계속해서 산울림 활동을 하실 생각이셨는지요.
– 원래는 1년 한시적으로 활동하기로 하고 재결성을 한 것입니다. 막내가 직장을 다니는 중이었고, 저 또한 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이후의 활동 여건이 제약이 있어 어렵게 되었습니다.

Q: 13집에서 다시 밴드를 결성할 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말하자면 노장밴드의 복귀로 볼 수 있는데요. 이전의 팬층을 관객층으로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젊은 친구들을 관객층으로 잡으셨는지요?
– 젊은층을 관객층으로 생각했습니다.

Q: 복귀 앨범인 13집에서 밴드 멤버들이, 혹은 김창훈 님께서 가장 주안점을 두신 부분이 있으셨다면? “이런 점을 특별히 유의한 앨범이 되어야겠다”라는….
– 저는 강한 음악을 원했어요. 또한 뮤직 비디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획과 모든 과정에서 연속성이 부족했죠. 섭외도 그랬었구요. 아쉬움이 많지요. 좋은 앨범이었는데…

Q: 직장에 들어간 것은 언제이셨는지요?
– 저는 1982-87년까지 해태상사, 1987-1995 해태 아메리카, 1995-2003 [주]앞선; 식품 유통회사 in Vancouver, Canada. 2003년 이후 한국 CJ의 미국법인인 CJ Foods, Inc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고. 카나다 [주] 앞선의 사장을 겸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동생은 현재 카나다 회사의 부사장으로 실질적인 경영을 하고 있습니다. 전공을 살려 쭉 식품 유통업에 종사해 왔고 전문 분야는 식품 머천다이징과 마케팅 분야입니다.

Q: 그리고 13집 활동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유지하셨는지요.
– 개인 사업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그래서 13집 이후의 시간적 제약은 막내의 직장생활로 인한 것이 주요 원인입니다.

Q: 솔로 앨범에 대해 여쭈어 보려 합니다. 1987년 이후 미국 LA로 가시게 되었는데요. 아마 직장 관련해서 이주하셨을 듯한데 맞는지요? 그곳에서 음악활동을 하시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요. 솔로 앨범에서 연주자들이 미국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의 연주가 만족스러웠는지요.
– 미국 연주자들은 연주에 거침이 없었어요. 아주 만족했습니다.

Q: 산울림과 연장선상에 있는 지점이나 차별화시키고 싶었던 지점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요.
– 연주 부분의 완성도에 제일 중점을 두었어요. 보컬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지만… 개인의 정서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죠.

Q: 이 솔로 앨범에서 가사는 한글을 먼저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맞는지요.
– 역시 곡의 주제를 구상을 먼저 하게 되니 가사가 먼저 나와야 하지만 가사와 곡이 거의 동시에 완성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Q: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다시 산울림으로서 활동할 의향은 없으신지요? 현재는 음악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으신지요?
– 산울림 활동은 원래 올해 예정되어 있었지요. 막내도 시간적으로 이제는 자유롭고… 그런데 제가 올초부터 갑자기 직장 생활을 겸하게 되어서 ‘풀 타임’으로는 곤란하지만 2004년부터 좋은 소식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되면 방송보다는 봄, 가을 콘서트가 개최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취지가 좋은 공연도 하고 싶고.. 사회에 기여하는 그런 공연 같은 것들 말이죠.

Q: 그간 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그간의 여러 인터뷰 준비에 감사드리고 언제 한번 서울에서 뵙길 바랍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200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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