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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 Frith – Speechless – Ralph/Fred Records, 1981/2001

 

 

아방가르드 보헤미안의 랩소디

데릭 베일리(Derek Bailey)와 함께 영국 최고의 아방가르드 기타리스트로 손꼽힘에도 불구하고 프레드 프리쓰(Fred Frith)의 이름은 영국 음악계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헨리 카우(Henry Cow) 시절 그의 주무대는 유럽 대륙이었고 솔로 아티스트로서 일가를 이룬 곳은 미국 뉴욕이다. 그가 모국인 영국을 떠나 이처럼 낭인 생활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영국에 그의 음악이 수용될만한 조건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퓰러 음악에서는 언제나 강세를 보여온 영국이지만 아방가르드 계열은 대부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 그곳 음악계의 현실이다. 헨리 카우 해산 후 크리스 커틀러(Chris Cutler)와 다그마 크라우제(Dagmar Krause)를 규합해 아트 베어스(The Art Bears)를 결성한 그는 1970년대 말 유럽을 떠나 뉴욕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이는 그의 음악인생에 있어서 결정적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다운타운 씬’의 일원으로 합류했고 존 존(John Zorn), 밥 오스터택(Bob Ostertag), 빌 라스웰(Bill Laswell) 등과 함께 1980년대 초의 아방가르드 전성시대를 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74년의 기념비적 솔로 앨범 [Guitar Solos] 이후 수년간 프레드 프리쓰는 더 이상의 솔로 경력을 추구하지 않고 철저히 헨리 카우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그룹 해체 이후 1980년 앨범 [Gravity]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후에도 그는 아트 베어스, 머티리얼(Material), 매서커(Massacre), 골든 팔로미노스(The Golden Palominos), 네이키드 씨티(Naked City) 등 수많은 밴드에서 활동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솔로 활동에 병행하는 단기 프로젝트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그의 밴드 또는 합작 프로젝트들이 맹렬하고 진지한 실험성을 추구한 반면 그의 솔로 앨범들은 다분히 ‘팝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그가 직접 노래까지 부른 1983년작 [Cheap At Half The Price]는 이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프레드 프리쓰에게서 달콤하고 듣기 편한 팝송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 그의 솔로 작품들은 그의 기준에서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접근이 용이하다.

[Speechless]는 [Gravity]의 이듬해에 발표된 프레드 프리쓰의 세 번째 솔로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 그는 한편으로 [Gravity]에서 탐사했던 민속음악의 영역을 재답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실험적 성향이 강화된 음악을 들려준다. 앨범은 오리지널 LP의 A면과 B면이 각각 상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A면이 담고 있는 것은 유럽 좌파 록 그룹 동맹 ‘록 인 오포지션(Rock In Opposition)’ 시절부터 동지적 관계를 형성해 온 프랑스 록 밴드 에트롱 푸 르루블랑(Etron Fou Leloublan)과의 세션이다. 프레드 프리쓰가 이 세션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거리’와 ‘민속’의 이미지다. 그는 여기서 뉴욕의 노천시장과 시위현장들에서 채집한 소리를 김바르드(guimbarde), 백파이프, 하모니움, 피리(recorder) 등으로 엮어진 음악과 결합함으로써 떠들썩하고 신나는 거리의 분위기를 재현한다. “Woman Speak To Men; Men Speak To Woman”에 삽입된 “워싱턴 포스트 행진곡(Washington Post March)”과 “Laughing Matter/Esperanza”에 포함된 컨트리 풍 기타 악절은 ‘미국적인 소리’를 대표하지만 음반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유럽적인 색채를 진하게 표출한다.

프레드 프리쓰가 여기서 수행하는 작업은 다양한 유럽 민속음악을 끌어 모아 한데 뒤섞는 일이다. 아이리쉬 포크와 게르만 민속음악과 플라멩꼬와 클레즈머 등이 그의 손끝에서 병치되고 결합되고 교차되면서 새로운 음악적 조합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단순히 ‘범 유럽 민속음악’을 만드는 것에 있지는 않았다. 뒤틀린 멜로디와 엇박자 리듬 그리고 기묘한 화성은 그의 작업이 지닌 아방가르드적 토대를 여실히 드러낸다(“Woman Speak To Men; Men Speak To Woman”처럼 아방가르드 노이즈로만 일관하는 곡도 있다). 재즈와 하드 록까지 동원한 그의 작업은 민속음악이 지닌 전통의 안온함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의 음악이 단지 낯설거나 괴상한 것만은 아니다. 프레드 프리쓰가 지닌 천부적 멜로디스트로서의 소양은 이러한 급진적 실험 속에서도 매우 즐길 만한 음악적 결과를 산출해낸다. 비록 통상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선율은 몇 번 듣다 보면 충분히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명쾌하고 흥미롭다.

[Speechless]의 B면은 A면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음악을 들려준다. A면의 활기찬 축제분위기와 대조적으로 B면의 음악은 차분하고 때로는 명상적이기까지 하다. 간혹 신경증적 광기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B면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진지하고 이론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곡들이다. B면의 세션에 참가한 인물들은 당시 프레드 프리쓰가 몸담고 있던 펑크 재즈 트리오 매서커의 멤버들이다. 프레드 프리쓰(기타), 프레드 마허(Fred Maher, 드럼), 빌 라스웰(Bill Laswell, 베이스)로 구성된 매서커는 간결한 편성의 파워 트리오 포맷으로 강렬한 노이즈를 만드는데 주력했던 그룹이다. 이 앨범에 실린 “Navajo”, “Balance”, “Speechless”, “Domaine de Planousset” 등의 트랙도 이들의 1980년 CBGB 공연 테이프에서 발췌된 곡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수록된 음악을 단순히 매서커 음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악기와 스튜디오 효과음이 전폭적으로 가세한 이 앨범의 사운드는 매서커 본연의 거칠고 강한 사운드와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라이브 음원 역시 스튜디오 조작을 통해 거의 원형을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변형되어 있다.

B면에 수록된 곡들은 A면에 비해 좀더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아우른다. 변형된 디스코 트랙 “A Spit In The Ocean”을 비롯하여 헨리 맨시니(Henry Mancini)의 “Peter Gunn”을 패러디한 “Conversations With White Arc”, 매서커의 펑크 재즈를 재현한 “Saving Grace”, 에릭 사티(Erik Satie) 풍의 앰비언트 곡 “Domaine de Planousset” 등 앨범의 B면은 아방가르드/실험주의 음악의 파노라마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푸짐한 메뉴를 제공한다. 프레드 프리쓰는 여기서 스티브 라이크(Steve Reich)의 테이프 음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테이프에 녹음된 음원을 악기로 활용하는 선구적 사운드 실험을 전개한다. 고장난 수도관에서 나는 소리에 루프를 걸어 리듬트랙으로 사용한 타이틀 곡 “Speechless”는 이러한 실험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를 통해 그는 오늘날 업계의 관행이 된 샘플링 음악의 미학을 일찌감치 선취한다. 1980년대적 퓨전 재즈의 느낌이 강한 “Balance”가 어느 정도 세월의 흐름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B면에 수록된 곡 대부분은 20년이 넘은 지금 들어봐도 별다른 시간적 격차를 느끼기 어려울 만큼 선진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Speechless]의 2001년 버전은 프레드 프리쓰가 직접 설립한 프레드 레코즈(Fred Records)의 1차 출시분 7장 중의 하나다. 프레드 레코즈에서는 앞으로도 프레드 프리쓰와 관련된 미발표 음원이나 단종 앨범들을 지속적으로 발매 또는 재발매할 예정이다. 고급스러운 디지팩 포장에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사운드는 프레드 레코즈의 새로운 버전을 매우 매력적인 리이슈로 만든다. 프레드 레코즈 버전은 현재 절판된 이스트 사이드 디지털(East Side Digital)의 구버전에서 보너스 트랙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오리지널 LP의 내용을 그대로 복원하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안타깝게 여겨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보너스 트랙은 어디까지나 보너스 트랙일 뿐이다. 문제는 앨범의 포장이 바뀌면서 자켓 디자인이 변경되었고 이와 함께 소중한 정보를 담은 라이너 노트 또한 제거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현재 이 앨범을 구하려면 프레드 레코즈 버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그나마도 국내 매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한가지 바람인데 이마저도 그리 여의치는 않은 듯하다. 20031115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8/10

수록곡
1. Kick The Can (Part 1)
2. Carnival On Wall Street
3. Ahead In The Sand
4. Laughing Matter/Esperanza
5. Woman Speak To Men; Men Speak To Woman
6. A Spit In The Ocean
7. Navajo
8. Balance
9. Saving Grace
10. Speechless
11. Conversations With White Arc
12. Domaine De Planousset
13. Kick The Can (Part 2)

관련 사이트
Fred Frith 공식 사이트
http://www.fredfrit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