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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is – 12 Memories – Sony, 2003

 

 

지금 아닌 언젠가

정규 2집 음반 [The Man Who](1999)부터 트래비스(Travis)는 ‘제 2의 라디오헤드(Radiohead)’라는 ‘찬사’를 받기 시작한다. 여기서 강조까지 해가며 ‘찬사’라는 말을 쓴 데는, 다른 밴드의 경우라면 당연히 오명으로 붙여져야 할 ‘제 2의~’란 수식이 이상하게도 트래비스에게만은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규 4집 [12 Memories](2003)를 얘기하기에 앞서 이 점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The Man Who]가 발매될 당시의 상황은 대충 이랬다. 라디오헤드는 그들의 역작이자 1990년대, 더 크게는 록음악의 역사 안에서도 칭송 받는 [OK Computer](1997)를 발표한 뒤 2년이 넘도록 침묵을 지키던 중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이라면, 차기작을 작업하며 밴드 멤버들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는 얘기, 그래서 [OK Computer]는 밴드의 최고작 겸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말들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포스트-오아시스(post-Oasis)계의 선두주자였던 트래비스가, 섬세하고 유려한 사운드와 톰 요크(Thom Yorke) 같이 바뀐 프랜 힐리(Fran Healy, 보컬)의 목소리를 들고 돌아왔다. 영국 음악계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라디오헤드의 빈자리를 채울’ 주자로 트래비스의 이름을 맨 앞에 올려놓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라디오헤드의 ‘라디오헤드 같지 않은’ 음반 [Kid A](2000)가 발매됐을 때, 이들은 ‘여전히 라디오헤드 같은’ 음반 [The Invisible Band](2001)로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이후의 과정은 이렇다. 이제는 ‘라디오헤드의 아류’가 아닌, ‘트래비스의 아류’ 밴드들이 출몰하기에 이른 것이다. 콜드플레이(Coldplay)부터 도브스(The Doves), 스타세일러(Starsailor)에 이르기까지(물론 도브스는 약간 다른 접근을 필요로 하는 밴드임을 알고 있다).

대충 당시 트래비스를 둘러 싼 정황이 이랬다. 누구의 잘못이랄 건 없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논리에 안 맞는 광경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트래비스에 대한 그 모든 찬사들은 곧 아무 의미 없이 남발한 공수표가 되어버렸고, ‘라디오헤드의 아류였던 트래비스의 아류’로 출발한 콜드플레이의, 미국을(그리고 기네스 팰트로(Gwyneth Paltrow)까지) 접수해버린 엄청난 성공은 트래비스라는 밴드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화’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드러머 닐 프림로즈(Neil Primrose)의 심각한 사고가 있었다. 밴드의 상황은 내외부적으로 최악을 달렸고, 밴드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들에게 지워졌던 턱없는 기대치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성급한 실망감에서 초연해져 조금은 여유롭게 숨을 고를 시간 말이다. [12 Memories]는 바로 그러한 ‘숨고르기’의 산물이다.

음반의 첫 트랙 “Quicksand”부터 변화의 조짐은 보인다. 나이젤 갓리치(Nigel Godrich)의 도움 없이 밴드가 직접 프로듀싱을 맡은 사운드는 한결 명쾌하고 간결해졌으며, 프랜 힐리의 보컬은 더 이상 징징대지 않겠다고 선언이라도 하듯 확고하다. 이는 이어지는 “The Beautiful Occupation”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전형적인 ‘트래비스 표’ 슬로우 넘버라는 점에서, 아마도 2003년 영국 팝계 최악의 싱글선택 사례로 뽑힐) “Re-Offender”를 지나 “Peace The Fuck Out”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특히 “Peace The Fuck Out”은 밴드의 초기곡 “All I Wanna Do Is Rock”를 연상시키는 긍정적인 힘에 충만한 트랙이다. 요약하자면, 음반의 전반부는 최대한 장식을 배제한 ‘생(生)’ 톤의 사운드를 잡아내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음반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효과를 가져온다. 2003년 발매된 기타팝 음반 중 [12 Memories]의 전반부처럼 ‘생동감’을 잡아낸 앨범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음반을 대단한 음반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12 Memories]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How Many Hearts”를 넘어서면서, 초반부의 에너지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비단 트래비스만의 문제가 아닌 요즘 영국산 기타팝 밴드들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하다. “Somewhere Else”와 “Happy Hang Around” 정도가 비교적 또렷한 자기 목소리를 내며 음반의 후반부를 잡아주는 역할을 해내지만, “Paperclips”나 “Mid-Life Krysis”, “Walking Down The Hill” 같은 곡들은 지나치게 느슨하고 이완되어있다.

[12 Memories]는 일관된 흐름을 생성/유지해 가는 ‘앨범 지향’의 작업으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몇몇 트랙들(“Quiksnad”나 “Peace The Fuck Out”, “Happy Hang Around” 등)을 통해 트래비스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중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어쩌면 다시는 이들이 [The Man Who]와 같은 ‘이상 인기’를 누릴 가능성이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트래비스는 [12 Memories]를 통해 점진적인 변화, 발전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밴드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듯 지속적인 진화를 이루어나가는 모습일 것이다. 비록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지만, 아직 트래비스를 ‘그저 그런 반짝 인기밴드’로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아닌 언젠가, 이들이 진정 훌륭한 음반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어 보이니까. 20031022 | 김태서 uralalah@paran.com

6/10

수록곡
1. Quicksand
2. The Beautiful Occupation
3. Re-Offender
4. Peace The Fuck Out
5. How Many Hearts
6. Paperclips
7. Somewhere Else
8. Love Will Come Through
9. Mid-Life Krysis
10. Happy Hang Around
11. Walking Down the Hill (Bonus Track : 12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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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The Beautiful Occupation”

관련 사이트
Travis 공식 사이트
http://www.travison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