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지연 – 실화(My Life’s Story) – BJE/신나라, 2003 숨길 수 없는 노래 첨단 디지털 테크놀러지와 고도로 분업화된 시스템의 시대, 아날로그의 숨결과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신인 여가수 손지연의 데뷔 음반 [실화(My Life’s Story)]는 그런 상념의 실타래를 던진다. 우선 음반 제목부터 눈에 밟힌다. 시대 분위기에 맞게 ‘Just Listen'(세븐)이라든가 ‘No More Music'(BMK) 같이 좀 건방지면서 간단명료하게 하든가, 아니 굳이 의도를 살리겠다면 ‘It’s Real'(휘성)처럼 쿨하게 툭 던질 수도 있을 것을, ‘실화(實話)’라니…. 한영애도 1925∼55년의 옛 가요들을 리메이크하면서 ‘Behind Time’으로 이름짓지 않았던가. 곡들의 제목도 그렇다. 기다림, 세월, 사랑, 여행, 마음, 친구 등 한 단어 짜리 ‘지순한’ 단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게다가 “꿈”이란 노래의 가사를 보면 “내 나이 스물 아홉 살”이란 구절이 나온다. “내 나이 열 아홉 살”이면 모를까, 스물 아홉 살이라니…. 도대체 음반을 제작한 사람은 누군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제작자는 ‘한국의 밥 딜런’이란 별칭을 얻으며 1970년대를 풍미한 포크 가수 양병집이다. 컬컬하고 텁텁한 목소리로 “역(逆)”(젊은 층에겐 김광석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잘 알려진), 구전가요 “타복네” 등을 불러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정태춘, 동서남북, (이주호의)해바라기 등을 발굴하고, 신촌에서 ‘OX’, ‘톰스 캐빈’, ‘모노’ 등의 카페를 운영하며 우울한 시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의 터전을 마련해준 (그래서 1980년대 신촌 언더그라운드란 이름으로 꽃핀 이른바 ‘신촌파’ 조류에 자양분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양병집이다. 재능과 안목을 갖고 있었지만 시대와 풍토 탓에, 속된 표현을 하자면 ‘짭짤한 재미’를 보지는 못한 가수이자 음반 제작자라고 말할 수 있다. ‘포크계의 돈키호테’ 양병집이, 천명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어, 다시 음반 제작에 ‘올인’하게 만든 손지연은 누구인가. 현재 시점에서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다. 다만 ‘실화’라는 제목에 기대, 그녀가 직접 쓰고 만들고 부른 수록곡 가사와 노래를 통해 추측해볼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민한 감수성과 솔직하고 꾸밈없는 태도, 그리고 이를 소박한 예술로 표현할 줄 아는 재능을 가진 포크 가수라는 점이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지만 좀 사연 많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추측되는 서른 안팎 나이의 싱어송라이터 말이다. 그녀의 노래만으로 이런 짐작이 가능하다는 것은 장점일까, 단점일까. 그렇다면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보고 음반을 제작한 양병집의 선택은? 손지연의 [실화]는 음반의 표제처럼 한 개인의 진실 어린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이야기일까. 우리네 삶처럼, 대단치는 않지만 저마다 소중한 이야기들이다. 나보다 잘난 친구에 대한 가벼운 질투(“친구”), 떠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기다림”), 엄마가 사주던 맛있는 호떡(“호떡”), 이루지 못한 소박한 꿈(“꿈”) 등 삶에서 길어 올린 얘기들이다. 그런데 재즈 풍의 감칠맛 나는 반주에 다소 천진한 목소리로 흐르는 이런 가사는 어떨까. “한 개만 먹어도 배부른 호떡 배가 불러도 맛있는 호떡 … [중략] … 집에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길었어 엄마와 떨어지긴 싫었어 / 엄마가 보고 싶으면 이렇게 라도 말해야지 호떡이 너무 먹고 싶어요”(“호떡”). 맛깔스런 사운드에 실린 순탄치 않은 가정사를 읽을 수 있다. 다른 곡들의 가사도 평범한 타이틀과는 달리 단선적이지 않고 미묘하며, 시각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또 “너의 집 앞을 맴돌다 사랑에 만취돼 우는 난 주정뱅이”(“실화”), “내게 다시 목말라 해줘 나의 사랑 굶주린 사자처럼 내게 구애해 줘”(“절망”) 같은 가사는 일체의 꾸밈을 벗어 던진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며, 여성의 목소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선한 느낌을 준다. “내 눈에 간직하면 너의 모습 잊을까 내 맘으로 찍었던 낡은 사진 한 장 / 노 저을 수 없는 얼음 배를 타고 너의 마음까지는 언제쯤 도착할지 / 그리움이 점점 더 가까워질 때면 부끄러운 여행길 좀더 멀리 떠나네”(“여행”) 같은 구절은 오랜만에 만나는 시(詩)적인 울림을 주는 노랫말이다. 속살을 들추면 마디마다 상처가 배어 있는 이런 이야기들은 대개 차분한 음성과 정갈한 어쿠스틱 기타가 꾸미는 포크 스타일로 형상화되어 있다. 물론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드럼 등의 세션이 말 그대로 ‘적절히’ 쓰이고 있고, 음악 스타일도 포크 록, 재즈, 레게 등의 요소들을 가미하여 곡마다 상이한 질감을 준다. 듣다 보면 R.E.M.의 섬세한 감성과 연주, 돌로레스 오라이어던(크랜베리스)의 팔랑이는 스캣, 강산에 또는 윤도현이 감기약을 먹고 늘어진 상태로 통기타를 튕기며 부르는 듯한 노래가 연상되는 대목도 있다. 말하자면 편곡과 연주는 최소의 투여로 최대의 효과를 꾀하기라도 하듯 어떤 경우에도 과잉되는 법이 없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낮게 울리는 현(strings)이다. 단촐하게 현악기가 삽입된 “기다림”과 “실화”의 경우 근래에 나온 가요 음반 중 현의 느낌과 울림을 가장 잘 살린 예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수십 인조 오케스트라 세션으로 층층이 쌓은 소리 다발이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 채 듣자마자 귓등으로 미끄러지곤 하는 주류 가요와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 음반에 담긴 악기 중 단 하나를 꼽으라면 손지연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녀는 탁월한 가창력을 자랑하지도, 카리스마적인 개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기 담긴 음악들과 잘 어울린다. 그녀는 뮤지컬 가수와 닮았다. 에너지 넘치는 군무와 함께 정열적으로 열창하는 뮤지컬 가수가 아니라, 화려한 장면이 끝나고 무대에 홀로 남아 독백처럼 노래하는 뮤지컬 가수 말이다. 그녀의 보컬은 호흡을 고르느라 혹은 미묘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여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솔로 곡의 그 쓸쓸함과 날 것의 느낌과 닮았다. 이 음반에 담긴 손지연의 자작곡들은 자동기술처럼 가사와 멜로디가 함께 만들어지면서 흐르는, 그래서 마디마다 딱딱 떨어지지 않고 마디에 걸치고 불규칙하게 들고나는 느낌을 준다. 하여 관습적인 주류 가요에 닳고닳은 우리 귀에는, 한 번에 쏙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질적 비만과 정서적 빈혈의 시대, 모두가 가속으로 지나가는 시대에, 이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낮은 목소리’는 잘 소통될 수 있을까. 결과는 두고 봐야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할 것 같다. 그녀의 노래가 우리네 감성의 굳은 살 속에 잠들어있던 ‘삶의 진솔한 표현’이란 노래의 한 본연을 새삼 일깨워준다는 점. 어느 시 제목처럼 그녀의 노래는 ‘숨길 수 없는 노래’이므로. 20031024 | 이용우 garuda_in_thom@hotmail.com 8/10 * 이 글은 월간 [민족예술](2003-11)에 실린 글입니다. 수록곡 1. 기다림 2. 마음 3. 친구 4. 호떡 5. 꿈 6. 뜬구름 7. 실화 8. 세월 9. 사랑 10. 여행 11. 절망 12. 노란 꽃 두 송이 13. 기다림 in B 14. 기다림(video clip) 관련 글 보헤미안 혹은 문화적 경계인의 두 개의 초상 – vol.5/no.20 [20031016] 불운의 저항가수, 저주받은 걸작들의 제작자의 꿈: 양병집과의 인터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1집 [넋두리] 리뷰 – vol.4/no.24 [20021216] 양병집 2집 [아침이 올때까지] 리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3집 [넋두리 (II)] 리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4집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 리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5집 [긴 세월이 지나고] 리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6집 [양병집 1993: 그대 떠난 빈자리] 리뷰 – vol.5/no.20 [20031016] 배리어스 아티스트 [Drop the Debt] 리뷰 – vol.5/no.20 [2003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