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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집 – 양병집 1993: 그대 떠난 빈자리 – 서라벌(SRB 0294), 19930210

 

 

문화적 ‘경계인’의 망향가

벌써 10년이 지나 버렸지만 양병집의 가장 최근의 정규 앨범이다. 잠시 배경 설명을 한다면,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 본인의 두 장의 앨범인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1988), [긴 세월이 지나고](1989), 그리고 그가 발굴한 16년 차이(김용덕, 김용수)의 음반을 제작한 비즈니스가 다시 한번 좌초한 뒤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로 돌아 가서 제작한 음반이다.

앨범의 크레딧을 보면 알 수 있듯 앨범을 녹음한 장소나 녹음에 참여한 음악인들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의 현지인들이다. 그래서 이 음반은 ‘제대로 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앨범이 발표된 1993년의 국제적 트렌드(‘얼터너티브 록’)의 지저분한 사운드와는 거리가 있지만 무언가 미비해 보이는 국내 스튜디오에서의 사운드와는 딴판으로 매끄럽고 쫙 빠지게 프로듀싱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작곡가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들은 조동익, 장인호, 최성원, 조영수. 이태열 등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당대 한국의 음악인들 가운데 가장 ‘팝’에 가까운 감성을 가졌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양병집의 자작곡은 하나도 없다.

작곡가 진영 가운데 조동익, 최성원, 이태열은 양병집과 오랜 연을 가진 사람들이고, 장인호와 조영수는 양병집이 1980년대 말 이후 발굴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전자에 비해 후자에 속하는 인물들의 참여가 더욱 두드러진다(조동익의 곡 “이 세상 사람이”는 [우리노래전시회](1984)와 [넋두리 II](1985)에 이미 실렸다). 장인호는 호주 유학생 시절 양병집을 만나 이미 양병집과 작업한 경험이 있고([부르고 싶었던 노래들](1988)에서 기타를 연주했고 [긴 세월이 지나고](1989)에 수록된 “이대 앞길”을 작곡했다), 조영수는 홍대앞의 라이브 클럽 프리 버드(!)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양병집의 마수(^^)에 걸려든 인물이다. 조영수는 캠퍼스 그룹 사운드 로커스트 출신으로, 박지윤이 다시 불러 히트한 “하늘색 꿈”의 작곡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음반에 수록된 음악은 마치 영미 팝 음악을 한국어로 개사·번안한 음악처럼 들린다. 장인호의 곡인 “그대 떠난 빈자리”와 “에고와 로고스”, 조영수의 곡인 “혼자 걷는 거리”와 “알 수 없네” 등이 모두 그렇다. 장인호의 작곡이 록의 감성이 강한 장엄하고 진지한 스타일이고, 조영수의 작곡은 팝의 감성이 강해서 쾌활하고 명랑한 스타일이지만 그 차이가 그리 멀지는 않아서 영미권에서 ‘메인스트림 록’이라는 범주에 무난히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최성원이 작곡한 “Down on the Highway”는 양병집이 직접 붙인 영어 가사로 되어 있다. 최성원 스타일의 곡이라기보다는 양병집의 읊조리는 보컬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쌈빡한 사운드의 꿈을 외지에서 실현한 셈이다. 물론 그 결과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장인호와 조영수의 곡에서는 국산(國産) 곡조와 외제(外製) 사운드의 조화가 성공적인 편이고, 최성원. 조동익, 이태열의 곡에서도 어색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부활가”, “희망가”, “타박네”같은 토속적인 곡에서는 된장찌개에 버터를 풀어 놓거나 샌드위치에 된장을 발라 놓은 것처럼 이상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을 ‘서양맹종주의’라거나 ‘국적불명’이라고 못박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서양의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따라해 보았더니 결국은 별 거 아니고 허전하기만 하더라’는 말이 적용될 대상은 한국 사회 전체이지 특정한 개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는 기분은 경기도 교외에 미국산 소품들로 장식해 놓고 양주를 파는 조그만 바(bar)를 방문한 기분과 흡사하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미국 어딘가에 한인들이 운영하는 업소도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다. 그것도 현대 한국인의 하나의 초상이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별 거 없다’고 평하는 것처럼 들릴 텐데 그렇지는 않다. “그대 떠난 빈자리”나 “혼자 걷는 거리”는 숨겨진 보석같은 곡이고, 현역으로 활동하는 가수(후보는 전인권, 강산에, 이은미 등등)가 리메이크하면 히트하지 말라는 법이 없을 만큼 빼어난 곡이다. 그렇지만 이런 곡을 양병집이 불렀다는 사실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하긴 본인이 ‘똥’이었다고 말하는(물론 정말 ‘똥’은 아니다. 결단코) [넋두리](1974)의 중고 LP는 수십만원을 주고 구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도 양병집의 새로운 앨범이나 새로운 사업에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내지 않는 게 한국의 우울한 현실이니 무슨 말을 더 하랴. 20031020 | 신현준 homey@orgio.net

수록곡
Side A
1. 이세상 사람이
2. 그대 떠난 빈자리
3. 에고와 로고스
4. 부활가
5. Down on the Highway
Side B
1. 혼자 걷는 거리
2. 알수 없네
3. 타박네
4. 희망가
5. 밤비 (경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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