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 – 기억상실 – 뮤직디자인(MDLR 0077), 1990 실험이냐 습작이냐 이듬해 발표된 [천사들의 담화]와 더불어 한 대수의 ‘실험적 전위음악’의 2부작이다. 혹은 [무한대](1989)을 포함한다면 ‘중기 한대수’의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다. 따라서 한 대수의 ‘노래’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적잖이 실망할 것을 각오하고 음악을 들어야 한다. ‘기억상실’이라는 앨범의 타이틀, 그리고 앨범 뒷면의 사진의 해설에 자신을 ‘집 없는 남자(홈리스)’라고 묘사한 것을 들으면 이런 기대를 접어야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앨범 앞 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억상실”은 ‘성장과정’, ‘혼돈’, ‘고향의 봄’, ‘혼란’, ‘회상’, ‘인생의 춤’ 등의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클래식 음악의 포맷(알레그로-비바체-아다지오-프레스토)으로 편곡했다”는 본인의 변은 음악을 감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템포와 무드와 볼륨과 스타일이 급격히 변동하고 때로 프리 재즈풍의 소리의 난장이 전개되었다는 점만 기억날 뿐이다. 즉, 곡의 제목에 부합하듯 음악을 듣고나면 음악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상실된다. 두 번째 곡 “지하철”에서 훵키한 리듬에 전자 효과음이 난무하다가 영어로 부르는 찬송가(“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으로 번역된 찬송가)가 나오는 것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목은 아니다(찬송가를 부른 사람은 [멀고 먼 길]에서 멋진 기타 연주를 들려주었다가 뉴욕으로 이주한 뒤 CCM으로 방향을 바꾼 임용환이다. 무언가 시사적이다). 두 트랙이 한대수의 ‘작곡’이 아니라 ‘구상’이며, 작곡(‘songwriting’이라기보다는 ‘composition’)의 몫은 앨범에 함께 참여한 에드 매과이어(Ed Maguire)와 잭 리(Jack Lee)의 몫이었다는 점도 참고가 될 만한 정보다. 앨범 뒷 면은 나름대로 노래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혼돈스럽고 절망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백인 여자와의 섹스를 소재로 삼았다는 “White Woman”의 셔플 리듬, 그리고 머리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램을 담았다는 “Headless Man”의 훵키 리듬도 본래 이런 패턴의 리듬을 운용하는 목적과는 상관 없이 위악적인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잭 리(Jack Lee)와 이우창 형제의 손길은 곳곳에 재즈풍의 연주를 묻혀 놓고 있지만 메인스트림 재즈의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영어로 부르는 노래도 우리에게 익숙할 수는 없다. 혼돈과 절망은 마지막 두 트랙에서 절정을 이룬다. 멜로디와 화성이라곤 전혀 없이 리듬만 등장하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의 마지막에서 “노력해서 부자 되자”는 말을 12번이나 반복하는 것이 발악에 가깝다면, ‘우정 출연’한 양희은과 함께 부른 “아무리 봐도 안 보여”(이게 유일한 가사다)의 밋밋하기 이를 데 없는 화성과 멜로디는 ‘이제 나같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망이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통상 이런 혼돈과 절망은 이혼이라는 그의 개인적 이력으로 설명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1990년대 40줄에 접어들어 이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된 이른바 ‘475세대’를 우한 진혼곡? 이렇게 해석하는 일은 너무 단순하고 작위적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비유하자면 그리 명확치 않은 이유로 한국 땅을 등진 사람이 생사확인도 잘 되지 않다가 어느날 문득 보내온 편지같은 음반이다. 편지지 위에는 악필로 이리저리 휘갈긴 난해한 내용이 들어있을 뿐이고… 따라서 이 리뷰를 쓰다가 ‘실험이냐 습작이냐’라는 질문을 붙였던 기억도 ‘상실’된다. 이 리뷰를 쓰지 않았더라면 다시 들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들어 보니 1990년이라는 시점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 묘할 뿐이다. 20031020 | 신현준 homey@orgio.net 6/10 P.S. 이 앨범은 2000년 6월 [천사들의 담화]와 더불어 2CD(도레미, DRMCD 1681)로 재발매되었다. 수록곡 Side A 1. 기억상실 (성장과정, 혼돈, 고향의 봄, 혼란, 회상, 인생의 춤) 2. 지하철 Side B 1. White Woman 2. Headless Man 3. 해가 서쪽에 뜬다 4. 아무리 봐도 안보여 관련 글 보헤미안 혹은 문화적 경계인의 두 개의 초상 – vol.5/no.20 [20031016] 멀고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의 회고담: 한대수와의 인터뷰(1) – vol.5/no.20 [20031016] 멀고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의 회고담: 한대수와의 인터뷰(2) – vol.5/no.20 [20031016] [다큐멘터리 한대수]: 한반도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반대기(半代記)에 대한 감상문 – vol.4/no.21 [20021101] 한대수 1집 [멀고 먼 길] 리뷰 – vol.4/no.20 [20021016] 한대수 2집 [고무신] 리뷰 – vol.4/no.23 [20021201] 한대수 3집 [무한대] 리뷰 – vol.5/no.20 [20031016] 한대수 [Masterpiece] 리뷰 – vol.2/no.12 [20000616] 한대수 5집 [천사들의 담화] 리뷰 – vol.5/no.20 [20031016] 한대수 6집 [1975 고무신 ~ 1997 후쿠오카 라이브] 리뷰 – vol.5/no.20 [20031016] 한대수 7집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리뷰 – vol.5/no.20 [20031016] 한대수 8집 [Eternal Sorrow] 리뷰 – vol.2/no.24 [20001216] 한대수 9집 [고민(Source Of Trouble)] 리뷰 – vol.4/no.22 [20021116] 배리어스 아티스트 [Drop the Debt] 리뷰 – vol.5/no.20 [20031016] 관련 사이트 한대수 공식 사이트 http://hahndaes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