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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집 –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 – 예음(YERD 7005), 19881231

 

 

건망을 넘어, 기억을 찾아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황망하게 이민을 떠난 양병집이 1980년대 말 일시 귀국하여 만든 두 종의 앨범 가운데 하나다(다른 한 종은 신곡 중심으로 녹음한 [긴 세월이 지나고]다). ‘부르고 싶은 노래’라는 제목처럼 1970년대 초중반 한국 포크의 고전들, 혹은 한국 포크에 영향을 준 미국 포크의 고전들을 수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리메이크 음반’이다.

그렇지만 ‘리메이크’나 ‘다시 부르기’같은 상업적 목적이 드러나는 음반과는 성격이 다르다. 여기 수록된 곡들이 ‘정말’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이라는 점은 앨범의 편곡에서 드러난다. 통상 ‘리메이크’라는 것이 오래된 히트곡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편곡하여 다시 녹음하여 다시 한번 히트를 노리는 것일 텐데 이 앨범은 옛 감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의 전기·전자악기를 배제하고 어쿠스틱 기타 두 대만으로 연주하고 있고, 그 결과 이 당시 발표된 음반들 중에서는 물론이고 양병집의 디스코그래피 가운데서도 가장 어쿠스틱한 음반이 되었다. 앨범을 녹음한 곳이 정규 스튜디오라기보다는 광고음악을 녹음하던 스튜디오(이승희가 운영하던 예성 스튜디오)라는 점도 이런 컨셉트에 부합한다.

앞면에 실린 곡들의 원작자를 차례대로 일별하면 김의철, 한대수, 김상배, 정태춘이다, 대체로 ‘1970년대 포크’와 관련해서 기억되는 이름들이고, 그리 오래 활동하지 않은 김상배를 제외한다면 이른바 ‘포크 정신’을 제대로 견지했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다. 양병집의 이 곡들에 대한 해석은 원곡의 레코딩에 들어 있는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 이외의 악기들을 모두 제거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1970년대 명동 어딘가에 있는 ‘살롱’이나 ‘카페’의 한 구석에서 노래부르는 듯한 사운드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맥주집 통기타 가수’가 부르는 철지난 노래와는 상이한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여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학 도중 양병집에 의해 발굴된 장인호의 감칠맛 나는 기타 연주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장인호는 이후 양병집의 음반에서도 계속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한편 앞면 마지막 곡인 “잃어버린 전설”과 뒷면 수록곡 4곡은 개사곡 혹은 번안곡이다. “잃어버린 전설”은 피트 시거(Pete Seeger)와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의 “Weep for Jamie”, “소낙비”는 밥 딜런(Bob Dylan)의 “A Hard Rain’s a Gonna Fall”을 “서울하늘”은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의 “New York Town”를 한국어로 개사(혹은 번안)한 곡이자, 1973~4년 경 이연실과 양병집 본인의 목소리로 녹음된 일이 있는 곡이다. 특히 “서울하늘”은 [넋두리]에 실린 녹음과는 달리 블루스 스케일을 이용한 어쿠스틱 기타를 통해 원곡에 비해서 메시지의 전달에 유효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이어지는 “동근이 아버지”는 밥 딜런(Bob Dylan)의 “Masters of War”를, “세마리 까마귀”는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가 부른 “3 Ravens”를 번안하거나 개사한 곡이다. 우디 거쓰리, 피트 시거, 밥 딜런, 피터 폴 앤 메리 등의 이름에서 미국 포크의 ‘정통’ 계보를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본토의 ‘포크’가 어디까지 수입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의미가 더 크다. 이런 생각에 미치면 이 앨범은 당시의 일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려는 양병집의 고독한 투쟁으로 보인다.

다시 앞면으로 돌아가 보면 정태춘의 곡 “양단 몇 마름”이나 구전가요인 “엄마 엄마아 엄마”는 ‘빠다 냄새’ 나는 다른 곡들과 달리 구성지고 ‘동양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뭐랄까, 20세기 중반의 한국의 가난하고 비참했던 역사를 어렴풋이 일깨우는 가사와 멜로디라서 앨범에 적절한 탄력을 부여하고 있다. 마지막 트랙이자 수록곡 중 유일한 자작곡인 “무엇 때문에”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판단은 청자의 몫이라는 말’로 평을 대신해야 할 곡이다.

1970년대의 통기타 포크 씬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이 음반은 과거에 대한 철지난 향수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렵은 통기타 포크 세대들에게는 ‘1970년대의 꿈’이 이미 사라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다. 정말 좋았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간헐적으로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재생되다가 갑자기 흐려지고 그러다가 은근히 되살아나고 하는 모양이다. 기억, 건망, 재기억, 망각, 대항기억 등등… 양병집이 이렇게 기억을 재생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려는 시점에 한대수는 ‘기억상실’을 토로한 바 있다. 세상살이란 이렇게 복잡하다. 20031020 | 신현준 homey@orgio.net

수록곡
Side A
1. 저 하늘의 구름따라
2. 바람과 나
3. 날이 갈수록
4. 양단 몇마름
5. 엄마 엄마아 엄마
6. 잃어버린 전설
Side B
1. 소낙비
2. 서울하늘
3. 동근이 아버지
4. 세마리 까마귀
5. 무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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