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24035639-0520krock_ybz5th

양병집 – 긴 세월이 지나고 – 예음(YERD 7006), 19890106

 

 

긴 세월이 지난 뒤의 회한, 미련, 그리움

30대 중반을 넘어서 40대에 접어들 찰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회한이 있기 마련이다. 양병집의 경우 이런 회한이 남다른 것 같다. ‘이민을 떠난다’는 것은 ‘다시는 한국 땅에 미련을 갖지 않겠다’는 뜻이자 ‘다시는 음악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만, 이역만리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한국에서 음악을 하는’ 꿈을 접지 못한 것을 보면… 또 하나. 그의 회한은 이전에 녹음했던 곡을 줄기차게 다시 녹음하려는 시도에서도 드러난다. 녹음이라는 게 어차피 본인이 만족할 수는 없는 법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평은 청자에게 맡겨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텐데도 그는 부단히 다시 녹음한다.

이 앨범도 양병집의 앨범의 일반적 특징처럼 이전에 녹음했던 곡을 재녹음한 것과 새롭게 작곡하고나 발굴한 곡이 반반씩 섞여 있다. 전자의 경우 “잘 자거라 내 아가야”, “타박네야”, “세상(역)”([넋두리](1974) 수록), “떠나지 말아요”([아침이 올 때까지](1980) 수록), “오늘 같은 날”([넋두리 II](1985) 수록) 등이 해당된다. 결과는 ‘신씨사이저의 음향을 추가하여 현대적으로 업데이트한 버전’이고, 이런 버전에 대해서는 늘상 찬반이 엇갈릴 것이다.

다른 한편 ‘신곡’의 경우 독립군가로 불리던 노래를 발굴한 “부활가”가 돋보인다. ‘미국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토속적인 노래를 발굴하는 양병집의 능력이 다시 한번 발휘된 곡이자 앨범의 전체적 감독을 맡은 양병집의 옛 동료인 유지연의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곡이다. 이렇듯 과거에 대한 묘한 그리움을 이끌어 내는 것은 “어느 날 오전이었지”, “어두운 밤이 찾아와”, “서두르고 싶지 않아” 등의 자작곡에서도 이어진다. ‘고독한 공간에서 헤어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양병집의 가사의 유구한 미학을 확인할 수 있음과 동시에 그의 작곡 스타일이 원숙해졌음을 느낄 수 있는 곡들이다.

그렇지만 음반 뒷 면의 백미를 이루는 곡은 뒷면에 수록된 “이대 앞길”이다. “쓸쓸한 이 거리 나 여기 왜 왔나 / 무엇을 찾아서 헤매나 / 신촌역 바라 보며 걷는 길에 / 추억만이 가득 찼네 / 만남과 헤어짐이 스쳐 가는 / 이 길 위엔 이제 바람만이”라는 부분의 가사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라도 1970~80년대 신촌을 돌아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회한에 젖을 대목이다. ‘이대생’과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또한 신촌역 부근에서 양병집이 운영하는 뮤직 모노(Music Mono)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더 진한 그리움에 젖을 것이다. 단지 가사 뿐만 아니라 ‘마치 팝송같은’ 코드 진행과 멜로디 그리고 확실한 훅이 있는 후렴이 ‘그때 즐겨 듣던 음악’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소통의 편의를 위해 말하자면 ‘아메리칸 록’ 스타일의 곡이다(물론 나는 이 용어를 납득할 수 없지만). 라디오의 오후 시간대에 가끔씩 흘러나오면 좋으련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숨겨진 곡이다.

앨범의 중요한 모멘트를 이루는 곡이 구전가요(“부활가”)이거나 다른 사람의 작곡(“이대 앞길”)이라는 점은 ‘아티스트로서의 양병집’에 대해 여전히 아쉬운 대목이다. 음악을 야구와 비유할 수 있다면, 이론에도 밝고 훈련도 성실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야구인’의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2할 7~8푼의 타율에 머무는 선수같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가 된 뒤에는 선수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지만 막상 성적은 신통치 않아 구단에서는 탐탁치 않아하는 코치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른 각도에 본다면 양병집이 창작에는 약해도 재창조에는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내기 어렵지 않다. 양병집은 원작자의 곡을 마치 자기가 만든 것처럼 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이는 그가 음악판에서 ‘만남과 헤어짐이 스쳐 가는’ 일을 무수히 경험했기 때문이고, 이런 공동체적 흐름이 그를 ‘음악판의 동키호테’로 남겨두는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아니고, 결국 시대는 여전히 그의 편이 아니었으니 이건 누구를, 무엇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긴 세월이 지나도 세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20031020 | 신현준 homey@orgio.net

수록곡
Side A
1. 어느날 오전이었지
2. 부활가
3. 잘 자거라 내 아가야
4. 타박네
5. 어두운 밤이 찾아와
Side B
1. 오늘 같은 날
2. 이대 앞길
3. 세상(역)
4. 서두르고 싶지 않아
5. 떠나지 말아요

관련 글
보헤미안 혹은 문화적 경계인의 두 개의 초상 – vol.5/no.20 [20031016]

불운의 저항가수, 저주받은 걸작들의 제작자의 꿈: 양병집과의 인터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1집 [넋두리] 리뷰 – vol.4/no.24 [20021216]
양병집 2집 [아침이 올때까지] 리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3집 [넋두리 (II)] 리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4집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 리뷰 – vol.5/no.20 [20031016]
양병집 6집 [양병집 1993: 그대 떠난 빈자리] 리뷰 – vol.5/no.20 [20031016]

손지연 1집 [실화] 리뷰 – vol.5/no.20 [20031016]

배리어스 아티스트 [Drop the Debt] 리뷰 – vol.5/no.20 [2003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