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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 Koala, [Nufonia Must Fall]
ECW Press/Ninja Tune, 2003

턴테이블 신동 키드 코알라(Kid Koala)는 뛰어난 만화 솜씨로도 이미 이름이 익히 알려져 있다. 아마 데뷔앨범 [Carpal Tunnel Syndrome](2000)에 자기가 직접 그린 30여 페이지의 ‘흑백 무성 만화’를 부록으로 실은 게 독특한 키드 코알라 이력의 출발점일 것이다. 아기자기하고 재기 넘치는 음악과 어울리는 익살스런 만화 속 캐릭터와 유쾌한 ‘화풍’은 이 턴테이블리즘 앨범을 기묘한 컨셉 음반으로 변모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키드 코알라는 어린 시절 의외로 만화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 했다고 한다. 유년 시절에는 피아노 학습에 빠졌고 12세 이후에는 오로지 턴테이블 연주에만 집중했던 그가 데뷔 앨범에 만화를 실었던 것은 순전히 음반 작업의 피로에 대해 스스로 정신적 보상과 재충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Carpal Tunnel Syndrome]이 발매와 동시에 음악 뿐 아니라 만화로도 호평을 받게 되자, ECW 출판사는 키드 코알라에게 만화책 출간을 제의했고 결국 3년여의 작업 끝에 지난봄에 마침내 [Nufonia Must Fall]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애초에 100페이지 분량에 대사가 들어간 만화로 기획되었던 [Nufonia Must Fall]은 결과적으로 무려 340여 페이지에 이르는 무성 만화로 출간되었다. 지난 3년여간 키드 코알라가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본인의 투어는 말할 것도 없고, 고릴라즈(Gorillaz), 델트론 3030(Deltron 3030), 러비지(Lovage) 등의 프로젝트, 수많은 게스트 음반 작업과 공연 참여로 정신없이 바빴던 것을 상기하면, 이런 두꺼운 책을 뚝딱 내놓은 것이 경이로울 정도다. 아무리 대사 없는 만화책이라 해도 말이다.

“누포니아(Nufonia)는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는 제목만 봐서는 이 책의 내용이 데뷔 앨범에 수록되었던 부록 만화의 후속 작이 아닌가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책을 열어보면 직접적인 연작은 아닌 것 같다. 키드 코알라 본인에 따르면, 누포니아는 “재미없는(No Fun) 곳”을 의미하는 조어로,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고 테크닉에만 연연하는 턴테이블 디제이와 무심한 관객들이 즐겨 찾는 클럽을 빗댄 말이다. [Carpal Tunnel Syndrome]에서 악동 로봇 디제이 네가트론(Negatron: negative + robotron)의 주무대이자, 동시에 ‘닌자(Ninja) 디제이 학원’에서 턴테이블 수련을 쌓은 주인공 소년이 마침내 네가트론과 대결을 벌이다 관객들로부터 야유와 공격을 받던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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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fonia Must Fall]의 주인공 로봇이 등장하는 한 장면

하지만 [Nufonia Must Fall]의 주무대는 더 이상 누포니아가 아니다. 항상 부정적인 사고를 지닌 네가트론이 사악한 헤드폰을 무기로 지구 정복을 도모한다는 애초의 컨셉과 달리, 정작 이 책의 주인공은 네가트론의 제자인 이름 없는 뚱뚱한 턴테이블 로봇이다. 오로지 일에만 빠져있는 메마른 감성의 직장 여성과 이 로봇의 사랑이 전체 줄거리를 구성한다. 물론 예기치 않은 액션, 모험, 공포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잠시도 긴장을 놓칠 수 없다. 흑백에 회색 톤을 더해 입체감을 적절히 살린 것이나 마치 음악의 리듬을 타는 듯한 캐릭터들의 동선은 프로페셔널 만화가를 무색케 한다. 주인공 여성의 외양이 너무 어둡고 살벌하다고 불평(?)할 수도 있지만, 턴테이블 로봇의 어수룩하면서 귀여운 캐릭터는 이 여성과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주인공 로봇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신문수의 [로봇 찌빠]에 나오는 ‘찌빠’나 도리야마 아키라의 [닥터 슬럼프]에 등장하는 어리버리한 이발사 로봇과 가정부 로봇이 연상되는 건 착각만은 아니리라.

키드 코알라의 만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로봇 캐릭터는 턴테이블 디제이와 로봇간의 묘한 상관 관계를 보여준다. 사실 키드 코알라의 음악은 기존 턴테이블리스트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과도한 스크래치와 비트 저글링이 때론 고감도 기술을 자랑하는 턴테이블리스트들의 음반을 망치는 것과 달리, 그의 음악은 턴테이블 기술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기를 가급적 지양하고 절제한다. 그가 데뷔 앨범의 만화에서 테크닉 중심의 턴테이블리스트와 클럽 이미지를 각기 네가트론과 누포니아에 투영하며 묘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Nufonia Must Fall]의 턴테이블 로봇은 보다 인간적이고 외로운 존재로서 턴테이블 디제이 일반을 상징한다. 다른 턴테이블리스트로부터 자신을 격리하지 않고, 이제 자신을 포함한 턴테이블 디제이 일반의 보편적 정서를 로봇을 통해 투영하려는 것이다. 클럽과 파티를 좌지우지하는 음악감독인 디제이가 역설적으로 수많은 장비 뒤에 파묻혀 있는 모습과, 테크놀로지 세계를 상징하지만 정작 로봇 스스로 그 첨단장치들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더욱이 청중으로부터 격리된 공간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디제이가 음악을 통해 그들과 교감하려는 욕구는, SF 영화나 소설 속의 로봇이 인간과 의사소통을 원하는 모습과 흡사한 면이 있다. 키드 코알라가 끊임없이 로봇에 집착하며 이를 매개로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물론 디제이 큐버트(Q-Bert)나 엑세큐서너스(X-ecutioners) 멤버들이 광적으로 로봇 프라모델이나 장난감을 구입하고 로봇 매니아임을 자처하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Kid Koala – p. 275 ([Original Soundtrack to Nufonia Must Fall] 중에서)

[Nufonia Must Fall]에 부록으로 수록된 16분 분량의 사운드트랙 음반은 이 대사 없는 만화책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키드 코알라 자신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와 턴테이블의 사운드 콜라주는 멍청하면서도 애절한 주인공 로봇의 행동과 썩 잘 어울린다. 친절하게도 10개의 트랙은 각기 페이지 표시를 제목으로 하고 있는데, 헤드폰으로 차분히 감상하며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면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을 느낄 것이다.

최근에 키드 코알라는 [Nufonia Must Fall]의 일탈에서 돌아와 두 번째 정규 ‘음악’ 앨범 [Some Of My Best Friends Are DJs]를 내놓았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50여 페이지의 만화 부록을 수록하고 있다. 다른 턴테이블리스트에 대한 묘한 갈등과 불만을 이제는 극복한 듯한 앨범 타이틀과 달리, 데뷔 앨범의 만화에서 적대적 관계로 묘사된 두 주인공 네가트론과 디제이 소년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 자못 흥미롭다. 혹시 디제이 소년 혹은 키드 코알라는 여전히 누포니아를 파괴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네가트론과 극적인 화해를 하려는 것일까. 20031024 | 양재영 coct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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턴테이블에 마법 걸기: 키드 코알라 뉴욕 공연 – vol.2/no.10 [20000516]

관련 사이트
Kid Koala의 공식 홈페이지
http://www.kidkoala.com
Kid Koala가 소속된 레이블 Ninja Tune의 공식 사이트
http://www.ninjatu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