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hel’s – Systems/Layers – Quaterstick/Pastel Music(라이센스), 2003 낭만적 지성 4년만에 나온 (국내에서는 [Music For Egon Schiele] 때문에 그 체감 시간이 줄었겠지만) 레이첼스의 신보가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의 [제 49호 품목의 경매(The Crying of Lot 49)]에 대한 사운드트랙으로 쓰여도 상관없을, 도시가 간직한 묘한 비밀을 탐구하는 듯한 사색적인 음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들의 관심사는 분명 초월적이고 유미주의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 있었으며, 이는 일종의 ‘외도’였던 [Music For Egon Schiele]에서조차도 (쉴레라는 극단적 유미주의자를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지되던 것이었다. 그러나 “4 or 5 Trees”에 대한 라이너 노트의 설명에서, 이들은 도시 한복판에 있던 평화로운, 그러나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어떤 장소’에 대해 (‘약도’를 곁들여가며) 이야기한다. 그런 연유로, 음반을 여는 “Moscow Is In The Telephone”은 이미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스산한 바람 소리 속에서 흐르는 비올라와 일렉트로닉한 효과음, 그리고 멀찍이 들리는 거리의 웅성거림은 이 밴드가 응시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들려준다. 데이터 전송방식에서 제목을 딴 “Packet Switching”이나, 표기부터가 컴퓨터 파일의 흉내를 내고 있는 “where_have_all_my_files_gone?” 또한 “The Mysterious Disappearance of Louis LePrince”로 레이첼스를 알던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울 것 같다. 중간중간 계속해서 음반을 스치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낮게 깔리는 도시의 소음들은 청자에게 모종의 시각적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거기에는 두려움, 삶을 바꿀 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삶에서 사라질 것 같지는 않은, 도시가 만드는 은근하고 차가운 두려움이 숨어 있다. “Arterial”의 경쾌한 울림에 스며드는 재빠른 ‘도시적’ 대화들은 “Even/Odd”에서 야멸찬 트레몰로를 내뱉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합주 위를 흐르는 불길한 비올라의 음색에 의해 쫓겨나듯이 사라진다. 레이첼스 특유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서약을 준수하는 가운데 최면적인 울림을 반복하는 퍼커션 틈새로 (부클릿에 적힌) 건축가 토요 이토의 글을 낭독하는 “Reflective Surface”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레이첼스 나름의 표현이라고 해도 될 것이며, ‘인더스트리얼’한 울림을 담고 있는 “Singing Bridge”는 과격해진 디스 모틀 코일(This Mortal Coil) 같다. 그러나 이 불길함은 음반의 다른 축을 구성하는 낮고 아름다운 ‘클래시컬’한 곡들에 의해 상쇄된다. 설사 이것이 필립 글래스(Phillip Glass)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즘의 조류에서 그 양식을 가져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하는 정서는 지극히 낭만적이다. “Water From The Same Source”의 단아하고 풍성한 울림은 레이첼스의 검소하고 단정한 아름다움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신포니에타의 2악장만을 따로 떼어 온 듯 느긋한 안단테로 시종하는 “Esperanza”는 상당히 공들여 만든 트랙으로, 음반의 중간에서 훈훈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Packet Switching”이나 “Air Conditioning/A Closed Feeling”에 감도는 엄숙한 기운은 또 그 나름대로 평온하게 즐길 수 있는 소리다. 어떤 이들은 레이첼스의 음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 “Last Things Last”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음반의 일차적인 관심이 ‘인간’과 ‘도시’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할 듯 하다. 그 관심을 유지하면서도 레이첼스 본연의 ‘서정적’ 자세를 균형있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 것. 핀천의 도시가 있는 그대로의 도시가 아니듯, 이 도시는 일종의 ‘이상형’에 가까운 도시이다. 음산한 비밀과 인간의 온기가 공존하는 도시. 아니면 실은, 이것이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진실한 묘사라면, 한국의 도시에 이 음반의 지성적 울림을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실패했다. 20031019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8/10 수록곡 1. Moscow Is in the Telephone 2. Water From the Same Source 3. Systems/Layers 4. Expect Delays 5. Arterial 6. Even/Odd 7. Wouldn’t Live Anywhere Else 8. Esperanza 9. Packet Switching 10. Where_Have_All_My_Files_Gone? 11. Reflective Surfaces 12. Unclear Channel 13. Last Things Last 14. Anytime Soon 15. Air Conditioning/A Closed Feeling 16. Singing Bridge 17. And Keep Smiling 18. 4 or 5 Trees 19. NY Snow Globe 관련 글 Rachel’s [Music For Egon Schiele] 리뷰 – vol.5/no.11 [20030601] 관련 사이트 쿼터스틱 레이블의 레이첼스 페이지 http://www.southern.com/southern/band/RAC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