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05040212-Spiritualized

Spiritualized – Amazing Grace – Sanctuary/Spaceman, 2003

 

 

헐벗은 날개: 다섯 번째 아가(雅歌)

고대 그리스인들은 역사가 계절처럼 돌고 돈다고 믿었다. 한동안 잊혀졌던 이러한 생각은 니체에 의해 좀 더 근대적으로 윤색되어 재등장했는데, 그는 돌고 돌긴 하지만 반복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힘(Macht)의 끝없는 배치 과정을 ‘영원회귀’라 표현했다. 아마 오늘날 이 영원회귀를 가장 통속적이고 효과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것은 록 음악계일 것이다. ‘네오-(neo-)’와 ‘뉴-(new/nu-)’를 앞에 달고 등장하는 최신 스타일들은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같긴 같은데 같진 않다’는 헤라클레이토스적 믿음에서 찾고 있으며, 어쨌든 자신들이 ‘여섯 번째 구세주’ 따위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그것이 바로 [매트릭스 2]에서 ‘여섯 번째 구세주’가 외치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스피리추얼라이즈드를 ‘여섯 번째 구세주’라고 부른다면 불편부당한 처사일 것이다. 스페이스멘 3(Spacemen 3)이 거라지 밴드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제이슨 피어스(Jason Pierce)가 군용 무전기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마냥 파직거리는 퍼즈 기타음을 나른한 싸이키델리아의 씨줄을 위해 1980년대부터 보듬어왔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더불어 현 네오-거라지의 특성인 미니멀리즘적 성향 또한 스페이스멘 3/스피리추얼라이즈드가 공히 그 위력을 실감시킨 기술 중 하나로서, 이는 ‘과다 복용’시 의사를 불러야 하는 환각 파티의 날줄이었다.

요는 ‘거라지’ 스피리추얼라이즈드를 새삼 ‘놀랍게(amazingly)’ 볼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사이렌처럼 피드백이 울리자마자 기습 장타를 날리듯 몰아붙이는 “This Little Life Of Mine”의 야멸차고 지저분한 소리에 뜨악할 필요 역시 없다. 스페이스멘 3을 듣지 못했던 청자라도 [Royal Albert Hall October 10 1997]을 떠나지 않던 환각적인 퍼즈 기타음은 인상에 남을 것이다. 슬라이드 기타와 더불어 파르르 떨며 울먹이는 “Hold On”의 하모니카 소리는 [Pure Phase](1995)에서부터 들려왔던 것이고, “Oh Baby”나 “Lay It Down Slow”의 웅혼한 가스펠 코러스는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의 “Cool Wave”에서부터 [Let It Come Down]에 이르기까지 계속 울려퍼지던 것이다. “The Twelve Steps”를 소금물에 절인 것 같은 “Never Goin’ Back”이나 “Cheapster”의 활력은 외려 이 성긴 사운드, 3주만에 모든 녹음을 마쳤다는 이 음반에서 훨씬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더불어, 이 사운드는 제이슨 피어스의 작곡 능력을 새삼 증거한다. “Hold On”, “Oh Baby”, “The Ballad Of Richie Lee”가 내뿜는 아름다움을 소리가 거칠다는 이유로 내팽개칠만큼 담대한 청자는 드물 것이다.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곡 중 마음 깊이 가라앉았던 것은 거의 언제나 피어스 특유의 ‘처량한(bleaky)’ 발라드였다. 가스펠의 힘을 빌어 점점 ‘우아하게(gracefully)’ 탈바꿈하는 그의 발라드는 이 음반에서도 느긋하고 서글프다. 이 음률이 표현하는 속되고 섬약한 경건함은 음반의 소리가 펑크-거라지가 표방하는 쓰리 코드주의의 단순 명쾌한 거칠음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말과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겹으로 둘러친 기타는 슈게이징의 선병질적인 어법에 가깝고(스트라이크를 맞은 볼링핀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Hold On”의 인트로), 거친 질감의 소리로 위장하는 세심한 어레인징(“The Power And The Glory”, “Rated X”)은 즉흥성의 표출과는 거리를 둔다.

결국 스피리추얼라이즈드는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이다. 아방가르드 색소포니스트 에반 파커(Evan Parker)를 초빙하여 만든, 음반에서 가장 독특한 시도일 (그레이엄 그린의 동명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을) “The Power And The Glory”는 일차적으로 ‘프리 재즈’이되, 근본적으로는 데뷔 음반 이래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주되어 온 스피리추얼라이즈드식 싸이키델리아이다. 음반의 누더기를 벗기면 나오는 것은 언제라도 날아오를 준비를 갖추고 있는 약에 찌든 날개인 것이다. 누더기를 너무 두껍게 걸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가끔 있지만 돌고 돌아온 스피리추얼라이즈드는 새로이 날고자 한다.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음반의 아름다움, 반짝이는 모래성같은 소리도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20030929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8/10

수록곡
1. This Little Life Of Mine
2. She Kissed Me (It Felt Like A Hit)
3. Hold On
4. Oh Baby
5. Never Goin’ Back
6. The Power And The Glory
7. Lord Let It Rain On Me
8. The Ballad Of Richie Lee
9. Cheapster
10. Rated X
11. Lay It Down S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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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ized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 리뷰 – vol.3/no.5 [20010301]
Spiritualized [Let It Come Down] 리뷰 – vol.3/no.22 [200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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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piritualize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