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weiv] 여름 특집으로 ‘나를 섬칫하게 한 다섯 곡의 노래”를 뽑았을 때, 후보작 중에는 자니 캐쉬의 “Folsom Prison Blues”도 있었다. 바로 이런 대목이었다. But I shot a man in Reno, just to watch him die 리노에서 난 한 사내를 쐈지, 그저 죽어가는 모습을 보려고 빠르고 신나는 컨트리 비트에 맞춰 무덤덤하게 살인의 추억을 노래하는 자니 캐쉬의 목소리는 잠시나마 등골을 오싹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결국 이 노래를 목록에서 제외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뒤를 따라오는 가사 때문이었다. When I hear that whistle blowin’, I hang my head and cry 경적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 고개 숙여 울음을 삼킨다네 자니 캐쉬, 검은 옷의 사나이 진정한 살인마에게 죄책감이란 눈씻고 찾아봐도 없어야 할 터이나, 자니 캐쉬가 분한 이 폴섬 감옥의 죄수는 그토록 냉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캐쉬가 온갖 저질스럽고 망가진 밑바닥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한시라도 존엄을 잃지 않았던 것은 물론 그의 둘도 없이 웅혼한 목소리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그런 척박함 속에서도 그가 항상 믿음, 구원, 희망 등 영적인 끈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때문에 미 남부의 ‘천박한 시골 음악’으로 낙인찍힌 컨트리 음악계에서는 매우 드물게도, 자니 캐쉬만큼은 줄곧 세간의 일관된 찬사와 경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환갑이 넘은 나이로 1994년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섰던 것은 물론이고, 한때 MTV의 자랑이기도 했던 혹독한 록 비평가(?) 비비스와 버트헤드(Beavis & Butt-Head) 조차도 이 검은 판쵸를 날리는 노년의 카우보이에게는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으니. “Folsom Prison Blues” from Glastonbury Festival, 6-26-94 이미 오래 전부터 ‘전설’의 반열에 올라있던 자니 캐쉬는 약물과 술에 찌든 채 매일같이 무대에 올랐던 젊은 시절의 ‘허랑방탕함’이 건강에 미친 해악에도 불구하고, 일흔을 넘기면서 최근까지도 왕성한 음악활동을 해 왔다. 그러던 그가 이렇듯 갑작스레 세상을 뜬 데는 아마도 영혼의 짝(soulmate)이었던 준 카터(June Carter)가 몇 달 전 먼저 유명을 달리한 탓이 무엇보다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캐쉬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카터 가족(The Carter Family)의 일원으로 컨트리 음악계에 이름을 날렸던 그녀는, 캐쉬로 하여금 약물중독을 이겨내고 음악에 매진하게 하면서 그에게 문자 그대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니와 준의 결합은 컨트리 계에 카터-캐쉬 가문이라는 하나의 ‘왕족’을 탄생시킨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날 만큼 컨트리 가수로서의 입지를 굳힌 전처 소생 로잰(Rossane)을 비롯, 둘 사이의 아들인 존 카터 캐쉬 또한 음반 프로듀서로서의 명성을 쌓아나갔고, 그 외의 일가 친척들도 컨트리 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로 채워져 있다.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 왼쪽부터 자니 캐쉬, 준 카터, 딸 로잰과 칼린(Carleen) Johnny Cash with June Carter, “It Ain’t Me Baby” from [The Lousiana Hayride Archives] 캐쉬의 업적은 컨트리라는 좁은 땅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에게 경력의 출발점을 제공해 준 것은 다름아닌 멤피스의 썬 레코드(Sun Records)였는데, 바로 그곳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칼 퍼킨스(Carl Perkins)는 컨트리의 일종이었던 로커빌리로부터 ‘로큰롤 혁명’을 이끌어내는 데 선봉장이 되었다. 비록 캐쉬의 음악은 대부분 그의 충실한 백밴드 테네시 투(Tennessee Two)가 만들어내는 2/4박 정통파 리듬을 고수함으로써 컨트리의 영토를 결코 완전히 떠나지 않았지만, 날로 백인화되어가는 컨트리에 블루스적인 감성을 재도입한 데서는 캐쉬도 그의 레이블 동료였던 로큰롤러들과 다르지 않았다. “I Walk The Line” from [The Lousiana Hayride Archives] 음악면에서 백인화될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보수적 가치를 점차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내쉬빌(Nashville)을 중심으로 상업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나간 주류 컨트리의 입장에서 보면, 항상 소수자,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컨트리 외부의 영역으로도 서슴없이 손길을 뻗치던 캐쉬는 이방인이라기보다는 이단아(maverick)였고, 그런 지위에 걸맞게 내쉬빌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되 그로부터 멀지 않은 교외에서 살았다. 그래도 어쨌든 그는 100여 곡이 넘는 히트 싱글, 평생공로상을 포함한 11개의 그래미, 그리고 1969년에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딴 TV 쇼를 진행했을 정도로 더없는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누린 행운아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영광은 다소 엉뚱하게도 올해 MTV의 비디오 음악 시상식으로부터 왔다. 다름아닌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곡 “Hurt”를 부른 자니 캐쉬의 뮤직 비디오가 최우수 촬영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Johnny Cash, “Hurt”(music video) 그에게 바쳐진 헌정음반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컨트리뿐 아니라 수많은 록 음악인들이 캐쉬에게 경의를 표해 왔고, 캐쉬 또한 최근의 스튜디오 앨범 [American Recordings] 시리즈에서 이에 화답한 바 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의 경력 전체에 걸쳐, 아니 어쩌면 미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교류들 중 하나는 밥 딜런(Bob Dylan)과의 그것일 터이다. 이 20세기 미국을 대표한 양대 음유시인의 공동작업은 가히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의 만남에 견줄 만한 것으로, 세간에 흔히 퍼져 있는 남부-시골-컨트리 대 북부-도시-포크라는 허위의식적 대립을 말끔히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 성과가 담긴 기념비적 음반 [Nashville Skyline](1969)은 포크의 상징인 밥 딜런이 어떻게 그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까지 바꿔가면서 컨트리에 경도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비록 정규 앨범에서 캐쉬의 참여는 “Girl From The North Country” 한 곡에 그치지만, 부틀렉으로 돌아다니는 내쉬빌 세션 녹음은 둘의 역사적인 만남을 보기 좋게 그려내고 있다. 자니 캐쉬와 밥 딜런 Johnny Cash with Bob Dylan, “I Guess Things Happen That Way” from [The Nashville Sessions] “나 자신과 내 음악에 대한 밥 딜런의 영향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친구 사이가 됐지만, 그전부터 이미 난 그의 팬이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밥(의 음악)은 시간을 초월해요. 언제든 하루가 다 가기 전에 밥 딜런의 노래가 한곡은 내 속에서 흘러나와요.” (자니 캐쉬 인터뷰)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자니 캐쉬의 음악은 미국을 전형적으로 상징하고 대표한다. 무릇 대부분의 컨트리 음악이 그러하듯, 캐쉬의 음악 또한 자신이 태어난 땅 아메리카를 찬양한다는 의미에서 애국적이다. 9-11 테러를 “TV에서 보았을 때,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는 그의 응답은 그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애국심이 그리 맹목적이고 단순한 것이 아닌 만큼, 그는 “그런 감정으로부터 회복되었죠, 이 나라가 회복하고 있는 것처럼”이라고 누그러뜨릴 줄도 알았다. 결국 이는 미국 사회의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입장에서는 애국심조차도 매우 다른 것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2차 대전에 해병대로 참전해서 이오 지마(Iwo Jima) 전투에서 영웅이 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망해 가는 부족을 보며 알콜중독으로 불행한 삶을 마감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얘기를 담은 “The Ballad Of Ira Hayes”는, 어머니로부터 아파치 인디언의 혈통의 일부를 이어받고 대공황으로 인해 부랑자(hobo)가 된 아버지를 둔 자니 캐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도 곧 이라크에서 돌아온 흑인 및 라티노 병사들의 얘기가 될 지도 모른다. “The Ballad Of Ira Hayes” from Newport Folk Festival, 7-26-64 오늘도 아메리카의 젊은이들은 대의명분 없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들의 영령을 위로해 줄 카우보이 장의사는 이제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가 검은 옷을 입어야 했던 여러 이유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우리는 과연 누가 그를 대신해 노래해 줄 수 있을까 애태우며 기다릴 뿐이다. 자니 캐쉬, 고이 잠들라. 20030925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Well, you wonder why I always dress in black, Why you never see bright colors on my back, And why does my appearance seem to have a somber tone. Well, there’s a reason for the things that I have on. I wear the black for the poor and the beaten down, Livin’ in the hopeless, hungry side of town, I wear it for the prisoner who has long paid for his crime, But is there because he’s a victim of the times. I wear it for the sick and lonely old, For the reckless ones whose bad trip left them cold, I wear the black in mournin’ for the lives that could have been, Each week we lose a hundred fine young men. And, I wear it for the thousands who have died, Believen’ that the Lord was on their side, I wear it for another hundred thousand who have died, Believen’ that we all were on their side. (lyrics from “Man In Black”) 관련 글 납량특집: 나를 섬칫하게 한 다섯 개의 노래들 관련 사이트 자니 캐쉬 공식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