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 아니 벌써 – 서라벌(SR 0090), 19771215 아니 벌써! – 아마 늦은? 앨범의 서두를 장식하는 두 노래는 산울림이 데뷔 이전에 이미 자신들이 이후에 보여줄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집을 내면서 동시에 성인의 냉소로 죽음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언급할 수 있는 김창완의 이중성은 여기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형제들의 기술적인 역량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할 정도이며 앨범의 사운드는 ‘불량하다’고 표현할 정도이다. 그 불량한 사운드는 형제들이 의도한 결과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앨범은 아이디어와 참신함이 기술적 재앙마저도 매력으로 끌어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세련되고 모범적인 사운드의 향연에 질린 귀에는 이 앨범의 조악한 사운드가 오히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첫 곡은 바로 데뷔곡인 “아니 벌써”이다. 음반사가 타이틀로 밀고 싶어했다는 곡 답게 레게나 스카를 연상케 하는 리듬에 산뜻한 멜로디를 가진 팝이다. 지금의 밴드라면 반드시 산뜻한 기타 사운드를 넣었겠지만 산울림이 ‘그 때는 오직 그것만 사용한’ 당시의 지저분한 퍼즈 기타는 이질적이면서 독특하다. 간주 부분에서 눈에 띄는 연주도 없이 한 코드를 유지하며 한참을 지연하다가 한눈파는 사이에 김창완의 기타 솔로가 나오는 양식은 사이키델릭 록의 영향이다. 후주 부분에서 마치 곡이 끝날 듯 페이드 아웃 되다가 다시 연주를 시작하는 부분은 지금 들어도 파격적이다. 기본적인 메이저 코드의 팝과 사이키델릭의 형식미가 만나고 있는 이 곡은 초기 산울림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특정 장르에 대한 강박 없이 자유분방한 음악적 형태를 취하며 밝음과 우울함이 집요하게 교차하는 조울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아니 벌써”의 밝은 가사가 검열이 산물이며 실제로는 “자살을 하려 했는데 벌써 날이 밝아버렸다”라는 반어법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더욱 납득할 만하다. 두 번째 곡은 바로 형제가 1집의 실질적인 타이틀곡으로 생각한다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우리들은 호숫가에 앉았지/나무처럼 싱그런 그날은…” 기쁜 순간에 우울한 척하는지 우울한 순간에 기쁜 척하는지 알 수 없는 가사는 이미 산울림의 ‘속 깊게 딴청피우는’ 정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 곡의 리프는 분명 하드록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피아노와 생톤의 기타 스트로크는 록의 중량감보다는 포크의 간소함을 연상시킨다. 간주에 들어가는 퍼즈 기타의 사이키델릭한 애드립은 몽환적이지만 김창완의 보컬은 약물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결코 감정에 도취하지 않고 집요하게 거리를 둔다. 이질적인 요소의 자연스러운 결합이랄까. 곡을 구성하는 세 개의 파트가 모두 조바뀜의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살짝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도록 하자. 파격이 무엇인지에 관심도 없이 파격을 선사한 형제 밴드의 데뷔 앨범은 아쉽게도 “전곡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만드는 명반”에 속하지는 않는다. 서두의 두 곡은 산울림의 전집에서도 반드시 베스트로 꼽힘은 물론 한국 록의 역사에서도 다시 없는 명곡일 것이다. “문 좀 열어줘”도 빠질 수 없다. 1집 이후 “가지마오”(7집)나 “소낙비”(9집) 등으로 이어지는 산울림식 스트레이트 로큰롤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곡은 중간에 두 개의 다른 곡을 붙인 듯 느닷없이 서정적인 연주가 나오다가 다시 본래의 곡으로 돌아오는 밉지 않은 파격을 구사한다. 그러나 나머지의 곡들 간에는 상당한 편차가 존재해서 긴장감이 계속 유지되지는 않는다. 가장 대학 그룹사운드에 유사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불꽃놀이’나 슬몃슬몃 고개를 내미는 퍼즈효과가 인상적인 잔잔한 “소녀” 등은 수작이지만 “골목길”, “그 얼굴 그 모습”과 같이 민요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곡은 밴드 멤버들인들 크게 만족했을지 의문이다. 마지막 트랙은 런닝타임 8분에 육박하는 “청자(아리랑)”인데 왜 부제가 “아리랑”인지는 호기어린 기타 솔로가 오르간과 경합하는 대목에 이르면 풀리게 된다. 재미있는 시도를 가득 담은 10분에 육박하는 대곡이지만 완성도 면에서는 앞의 세 곡에 미치지 못한다. 사실 이 앨범의 가치는 앨범의 완성도가 아니라 산울림과 같은 음악을 구사하는 방식을 가진 밴드의 출현이라는 점에 더 기울어진다. 한국의 1970년대를 양분하는 흐름은 미8군 무대를 기반으로 하는 그룹 사운드와 명동을 중심으로 성행한 포크송이었다고 한다. 전자는 “장인적으로 뛰어나게 연주하는 것이 목표”이며 후자는 “연주 실력 자체보다는 자기 세계의 표현을 보다 중시하는 것이 목표”인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흐름은 다른 지향을 가지고 있었을지 언정 엄격한 단련을 거친 ‘장인’들이었다. 영미의 록을 모델링하자면 이러한 흐름의 반동적/반정립적 영역에 또 다른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기타만 손에 잡으면 참여할 수 있는 자유분방한 표현양식으로서의 밴드 음악”이라는 토양이다. 1집 당시 자신의 악기가 제대로 튜닝되어 있는 줄도 몰랐던 산울림은 이러한 영역에 놓일 수 있는 1990년대 이전의(혹은 이후에도) 가장 중요한 밴드일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기성의 어떤 음악적 토양에도 기반하지 않고 집 안에서 ‘음악놀이’를 하면서 자신들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러한 ‘거라지스러운’ 방식의 출현은 “아니 벌써”라고 해야 할까, “아마 늦은”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1990년대 이전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등장한 다른 뚜렷한 밴드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산울림은 그들을 단련시키는 특정한 토양을 가지지 않은 채로 그들의 노래말처럼 “어느날 피었네”하는 식으로 갑작스레 등장, 50만장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정상의 대중적 지명도를 얻어냈다. 김창완이 미 8군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외국음악을 듣고 자랐다지만 이들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는 “연주를 틀리면 음악인 취급을 하지 않았다”라는 미8군 뮤지션들과 전혀 다르다. 산울림의 음악는 한국적 포크의 정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김민기-조동진 계열의 포크와 교감하며 나왔다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분류하자면 산울림의 음악은 송골매와 같은 캠퍼스 그룹 사운드와 편의적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당시 1970년대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가 음악을 접하고 표현하는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광의로 같은 토양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음악을 듣는 것을 일상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된 첫 세대이며 대학생은 그것을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계급이었던 것이다. 산울림이 ‘형제의 음악놀이’로서 방구들을 두들기며 밴드를 시작한 것이나 ‘동아리’의 기수라는 형태로 캠퍼스 그룹 사운드가 운영된 것은 사뭇 다르지만 이제 팝/록을 청취하고 표현하는 행위가 ‘취미’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는 점을 공유한다. 반면에 “단 하나의 카피도 하지 않았다”라는 산울림을 카피곡 위주로 대학 내에서 활동했던 캠퍼스 그룹 사운드와 같은 흐름으로 묶어놓고 만족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협의로 보면, 캠퍼스 그룹 사운드가 자신을 주류에 표출하기 전부터 삼형제는 100곡 이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완 인터뷰에 의하면 김창훈이 샌드 페블스의 멤버였다는 정도를 빼면 산울림은 당시 학생들의 움직임 자체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즉 산울림은 70년대 청년문화라는 토양 아래에서 캠퍼스 그룹 사운드와 함께 자라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장한 밴드이다. 아마도 특정한 토양 없이 70년대 한국의 허공에 떠다니는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해서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형성한 밴드로 산울림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양분은 영미 사이키델릭, 이장희 등 주류 포크 록의 구어적 표현, 펄 시스터즈를 위시한 신중현 계열의 흐느적거리고 능청거리는 감각 정도? 그러나 산울림이 사이키델릭 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기반의 정서는 오히려 냉정한 관조에 의한 것이듯이, 이 모든 것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봐도 산울림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산울림은 산울림이다. 취미 밴드가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한국에서 가장 정점의 형태로 보여준 밴드라고 하면 과언일까. 20030924 | 김남훈 kkamakgui@hanmail.net 10/10 수록곡 Side A 1. 아니 벌써 2. 이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3. 골목길 4. 안타까운 마음 5. 그 얼굴 그 모습 Side B 1. 불꽃놀이 2. 문 좀 열어줘 3. 소녀 4. 청자(아리랑) 관련 글 ‘해변가요제’ 4반세기를 기념하며… – vol.5/no.17 [20030901] 김창완과 배철수 – vol.5/no.21 [20031101] 개구쟁이 로커와의 한낮의 몽중대화: 김창완과의 인터뷰 – vol.5/no.17 [20030901] 황무지에 울려 퍼진 산울림, 또는 산울림의 독백: 김창훈과의 인터뷰(1) – vol.5/no.17 [20030901] 황무지에 울려 퍼진 산울림, 또는 산울림의 독백: 김창훈과의 인터뷰(2) – vol.5/no.22 [20031116]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의 후일담: 샌드 페블스(6기)의 이영득과의 인터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1집 [아니 벌써]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3집 [내 마음/그대는 이미 나]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4집 [특급열차/우리 강산]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5집 [한낮의 모래시계/이렇게 갑자기]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6집 [조금만 기다려요/못잊어/어느 비 내리던 날]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7집 [가지 마오/하얀 달/청춘]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8집 [새야 날아/내게 사랑은 너무 써]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9집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멀어져간 여자]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10집 [너의 의미/지금 나보다/꿈이야 생각하며 잊어줘]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11집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슬픈 장난감]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12집 [Adagio(꿈꾸는 공원/불안한 행복/동창생)] 리뷰 – vol.5/no.17 [20030901] 산울림 13집 [무지개] 리뷰 – vol.5/no.17 [20030901] 김창훈 [요즘 여자는/딸과 인형] 리뷰 – vol.5/no.17 [20030901] 김창완 [기타가 있는 수필] 리뷰 – vol.5/no.17 [20030901] 김창완 [Postsctript] 리뷰 – vol.5/no.17 [20030901] 김창완 [Cadeau De Papa(아빠의 선물)] 리뷰 – vol.3/no.11 [20010601] 배리어스 아티스트 [제1회 ’77 mbc 대학가요제] 리뷰 – vol.5/no.17 [20030901] 샌드 페블스(화랑) [달빛 속에서(저 새)/달려라] 리뷰 – vol.5/no.17 [20030901] 관련 사이트 산울림 팬 사이트: 산울림 즐기기 2 http://sanullim.na.fm 산울림 팬 사이트: 산울림 팬 페이지 http://www.sanulim.com 산울림 팬 사이트: 산울림 추억하기 http://my.netian.com/~wet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