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필터 – 003: The Third Eye – 티 엔터테인먼트, 2003 모호해져 버린 세 번째 불만 한국에서 ‘록 음악’이라는 범주가 여성화(?)된지도 꽤 오래 되었다. 록 음악이란 그저 ‘기타를 치는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이라고 간단히 정의하자. 이런 록 음악이 ‘시커먼 가죽 점퍼와 찢어진 청바지를 걸치고 머리를 길게 기른 우락부락한 사나이들이 하는 것’이라는 통념은 이제는 ‘거의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 한국에서 창작되는 국산(國産) 록 음악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즐겨 듣는 외제(外製) 록 음악도 마찬가지다. 창작된 록 음악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이런 현상에서 한국이 늦은 편인 것은 이제나 저제나 당연한 일이고… 이런 현상은 단지 ‘여성 보컬을 앞세운 록 밴드가 인기를 누린다’거나 ‘록 공연장에서 여성의 비중이 증가한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록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성 자체가 이전처럼 남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공격적이고 거칠고 무겁고 빠르고 시끄러운, 한마디로 강력하고 에너지 넘치는 사운드는 이제 시대착오적이 되어 가는 분위기마저 있다. 이건 좀 심한 말일까. 맞다. ‘하드코어’라고 부르는 음악이 여전히 인기가 있는 걸 보면 일방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일 게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강력하고 에너지 넘치는 사운드가 록 음악의 ‘지배적 형식’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새로운 감성을 담은 록 음악을 ‘모던 록’이라고 부르는 것도 관행으로 정착한 모양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모던 록이라는 문구를 사용해서 홍보하는 음악’일 게다. 펑크나 하드코어가 사춘기의 원초적 반항 심리를 드러낸 것이라면, 모던 록은 젊은 감성을 감각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충 그럴 것이다. 대체로 전자가 10대 남자를 연상시킨다면, 후자는 20대 여자를 떠올린다는 이야기다. 부연하면, 전자가 남자만 다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내아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면, 후자는 남녀공학 대학교에 다니는 여대생을 떠올리게 한다. 어차피 시비 걸릴 말이므로 한마디 더한다면 전자가 ‘힙합’과 친하고, 후자는 ‘테크노’와 친한 것도 시사적이다. 물론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은 훨씬 복잡하겠지만. 체리 필터는 이 가운데 어떤 범주에 속할까. 조유진이라는 여성 보컬을 앞세우고 있으니 일단 ‘모던 록’에 속한다고 해야 홍보하기 편할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모던 록으로 분류되는 음악의 감성이 대체로 여성적이고 실제로 모던 록 밴드 가운데 여성을 내세운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자우림이나 더 더같은 ‘중견’ 밴드부터 러브홀릭이나 스웨터 같은 ‘신예’ 밴드에 이르기까지… 생각해 보니 한때를 풍미한 주주클럽같이 ‘그 사람들 지금 뭐하고 있지?’라는 질문이 나오는 존재도 있었다. 그렇지만 체리 필터에는 여성을 간판으로 내세운 모던 록 밴드에게 없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사춘기 반항’이라는 코드가 있다는 점이다. 즉, 와일드하면서도 마일드하고, 하드하면서도 소프트하고, 터프하면서도 델리키트(delicate)하다. 한마디로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이런 특징이 체리 필터가 ‘인디 출신’으로서 가요계에 파란을 몰고 온 비결로 보인다. 1년 전 가요 차트 상위권까지 진출한 “낭만고양이”의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번 앨범에서 ‘과연 “낭만고양이”의 후속탄이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후보곡은 “오리날다”다. “낭만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쉬운 코드 진행, 따라부르기 좋은 후렴구, 재미있는 가사 등 히트곡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멜로디가 유치하다’는 록 골수주의자의 반응이 없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그거야 ‘알면서…’라는 반응으로 되 넘기면 될 문제다. 문제는 ‘그게 그거 같다’는 반응일 텐데 앞으로의 대처가 주목된다. 만약 ‘오리날다’라는 오리구이 전문점이 등장한다면 음반의 성공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흰소리로 들리겠지만, 실제로도 흰소리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이 정말 많다). 물론 이 곡이 밴드가 진짜 하고 싶은 음악은 아닌 것 같다. “오리날다”와 스타일은 유사하지만 “Dive”, “아싸라비아”, “Back To The Future”, “Dr. Faust” 등의 곡은 앞서 이야기한 ‘와일드하면서 마일드한…(이하 생략)’ 이들의 특징에 부합하는 곡이자 공연장에서 뒤집어지면서 신나게 놀기 좋은 사운드를 담고 있다. 그 점에서 서태지나 크라잉 넛처럼 족보가 다른 이들의 선배들의 영향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서태지의 영향이야 의도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크라잉 넛의 경우 한경록이 “낭만고양이”에 이어 “달빛소년”의 작사를 맡았으니 그저 간접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아싸라비아”에서 너바나(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의 전주의 순서를 뒤바꾼 듯한 리프도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골라 듣는 재미도 있다. “Snow Man”과 “꿈꾸는 Sailor”는 이른바 ‘록 발라드’다. 이 음반이 한국(및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지만, ‘성의 없다’는 인상과는 거리가 멀므로 음반의 대표곡이 아니라면 눈감아줄 만하다. 한편, “Digital Shockwave”는 랩핑에 가까운 보컬과 헤비 메탈의 리프가 소리의 난장을 만들어내고 “No Peace Yes War?”에서는 힙합 리듬과 스크래칭 음 사이로 게스트로 초빙된 MC 스나이퍼의 랩핑을 통해 반어법으로 외치는 반전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보싸 노바 리듬과 아코디언 소리가 등장하는 “달빛소년”과 트립합(trip-hop)의 사운드 텍스처를 담은 “Tick-Tock”같이 이색적인 트랙도 있다. 이럴 때 ‘양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사족이다. 총평하면 이번 음반은 상업적으로는 실패할 것 같지 않다. 문제는 음악적 성패일 것이다. 성별, 세대별로 고루 호소력을 가질 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음악을 그렇게 많이 듣지는 않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만족할 만하지만, ‘음악을 많이 듣고 많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저런 불만을 가질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혹시 불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불만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한 것이 지금의 현실 아닐까. 즉, 록 음악이 ‘가요’로서 성공을 거두는 것 이상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음악에 대해 ‘클리셰로 가득해 있고 자기만의 양식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하는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곰곰 생각해 볼 문제다. 20030904 | 신현준 homey@orgio.net 5/10 수록곡 1. Dive 2. 오리날다 3. 달빛소년 4. 푸른 꽃 흰 나비 5. Digital Shockwave 6. Snow Man 7. 아싸라비아 8. Back To The Future 9. 꿈꾸는 Sailor 10. Dr. Faust 11. 오리 날다 M-Version 12. No Peace Yes War? 13. Tick-Tock 관련 글 체리필터 [Made In Korea?] 리뷰 – vol.4/no.19 [20021001] 관련 사이트 체리 필터 공식 사이트 http://www.cherryfilter.co.kr 체리 필터 팬 사이트 http://cherryclub.zety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