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xies – Come On Pilgrim [EP] – 4AD/Elektra, 1987 ‘이미 대가’들의 수업 시대 1986년, 6개월 가량의 푸에르토리코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메사추세츠 주립대학의 인류학 전공생이던 찰스 톰슨(Charles Thompson)은 룸메이트인 조이 산티아고(Joey Santiago)를 꼬드긴다. 록 밴드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허스커 두(Husker Du)와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를 좋아하는” 베이시스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어 이미 브리더스(The Breeders)란 밴드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던 킴 딜(Kim Deal)을 끌어들이고, 그녀의 추천으로 데이빗 러버링(David Lovering)을 드러머로 영입한다. 대충 사람이 모이자 사전을 뒤져 픽시스(Pixies)라는 밴드명을 짓고, 톰슨은 블랙 프랜시스(Black Francis)라는 농반진반의 예명까지 만든다. 흔한 시작이다. 이들이 만들어낼 음악에 비하면 정말 흔한 시작이다. 픽시스의 데뷔작인 [Come On Pilgrim]은 1987년 경 그들이 녹음했던 일련의 데모 테잎, 오늘날에는 ‘퍼플 테잎(The Purple Tape)’이라 알려진 데모곡 모음집에서 여덟 곡을 추려 만든 음반이다. 작년에 이 퍼플 테잎에서 또다시 아홉 곡을 추려내고 리마스터링을 거쳐 [Pixies]라는 편집음반을 발매했는데, “Broken Face”나 “Here Comes Your Man”의 초기 버전이 담겨져 있는 이 음반은 픽시스 팬들의 아련한(그러나 픽시스의 음악에, 사실 ‘아련한’ 따위의 말이 어울리던가)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이 곡들이 훗날의 걸작 [Surfer Rosa]와 [Doolittle]의 대표곡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이미 데모 테잎을 만들던 때부터 자신들의 스타일, 즉 ‘변이된 절단(mutated mutilation)’의 어법을 확립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이 EP 또한 자신들의 스타일을 확립한 소리를 들려준다. 오프닝을 장식하는 나른한 “Caribou”가 [Bossanova]의 전조처럼 들리는 것은, 그런 고로, 외형적으로는 결과론적 해석이지만 내재적 해석으로는 필연적 결론이 될 것이다. [Surfer Rosa]에 다시 실리게 될 “Vamos”는 이 음반에서 ‘아방가르드 컨트리’처럼 연주된다. 무지막지하게 내달리는 하드코어 펑크 “Isla de Encanta”는 그 유명한 ‘스톱 앤 스타트’가 완급조절과 다이나믹한 효과를 구현해낸다(농담이지만, “Ed Is Dead”의 ‘에리야에햐’라는 블랙 프랜시스의 스캣은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를 예언한 것 같다). 파워 팝과 뉴웨이브를 비튼 “I’ve Been Tired”나 멜로디만 놓고 들었을 때는 완연한 올드 팝인 “Levitate Me”까지, 여기 담긴 음악들은 가정용 못처럼 짧고 가늘며 직선적이다. 블랙 프랜시스의 보컬은 노래와 ‘스포큰 워드(spoken word)’의 중간 지점에서 ‘변태적으로’ 진동하고, 킴과 데이빗의 리듬은 꾸준하고 튼튼하다. 산티아고의 노이즈 취향도 알비니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건 이것이 ‘미국적’ 취향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픽시스를 처음 데려간 곳이 4AD 레이블이라는 점은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여기까지만 쓰고 끝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들은 픽시스이다. 블랙 프랜시스의 가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 안할 수 없다. 종교와 섹스, 죽음이라는 소재를 비릿하고 모호한 언어로 표현하는 그의 가사의 특징 또한 이 음반에서 이미 또렷이 드러난다. 도시를 혐오하며 순록에게 경배할 것을 강요하거나(“Caribou”),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Vamos”, “Isla de Encanta(기쁨의 섬)”)과 관음증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고(“Nimrod’s Son”), “그녀는 등신같은 은총 속에서 썩어들어간다”며 신앙을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Ed Is Dead”), “Levitate Me”에서는 “저 높은 곳으로 / 날 떠올려 줘 / 엘리베이터 아가씨, / 떠올려달라니깐”이라는 비꼼도 잊지 않는다. 더하여 푸에르토리코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된 탓인지 스페인어 가사와 카리브 해안에 대한 동경이 특별히 드러나는 것도 이 음반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훗날의 “Oh! My Golly!”와 모듬할 수 있는 “Isla de Encanta”). 그래서? 데뷔 당시부터 이미 대가였던 밴드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반이라고 말하면 적당한 평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더하여 [Surfer Rosa]와 종종 한 묶음으로 취급되는 음반이라는 말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음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이 가지 않는 것은 단지 EP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프로듀싱을 맡은 게리 스미스(Gary Smith)가 매만진 ‘지하실’ 스타일의 소리는 픽시스의 다른 음반에 비해 평이하고 밋밋하며, 이들의 특징을 잘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스티브 알비니(Steve Albini)의 쌩톤 기타음에 쾌감을 느끼거나 길 노턴(Gil Norton)의 ‘메인스트림’ 스타일 사운드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성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더불어 수록된 곡들도 ‘훗날을 위해’ 좋은 곡들은 빼놓은 것 같다는 의심이, [Pixies]를 듣게 되면 강하게 든다. 아까와는 달리, 이건 정말로 결과론적 해석이다. 20030811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7/10 수록곡 1. Caribou 2. Vamos 3. Isla de Encanta 4. Ed Is Dead 5. The Holiday Song 6. Nimrod’s Son 7. I’ve Been Tired 8. Levitate Me 관련 글 Intro : 우리들의 일그러진 요정들 – vol.5/no.16 [20030816] Bootleg Galore 4: 요정(妖精)들의 행방은? — The Pixies, The Breeders, Frank Black Pixies [Come On Pilgrim] 리뷰 – vol.5/no.16 [20030816] Pixies [Surfer Rosa] 리뷰 – vol.5/no.16 [20030816] Pixies [Doolittle] 리뷰 – vol.5/no.16 [20030816] Pixies [Bossanova] 리뷰 – vol.5/no.16 [20030816] Pixies [Trompe le Monde] 리뷰 – vol.5/no.16 [20030816] Pixies [Pixies] 리뷰 – vol.5/no.16 [20030816] Pixies [Complete ‘B’ Sides] 리뷰 – vol.5/no.16 [20030816] Frank Black [Frank Black] 리뷰 – vol.5/no.16 [20030816] Breeders [Pod] 리뷰 – vol.5/no.16 [20030816] Breeders [Last Splash] 리뷰 – vol.5/no.16 [20030816] Breeders [Title TK] 리뷰 – vol.4/no.20 [20021016] 관련 영상 “Caribou” Live 관련 사이트 4AD 레이블의 Pixies 페이지 http://www.4ad.com/artists/catalogue/pixies/index.htm Alec Eiffel : Pixies 프랑스 팬 사이트로 부틀렉을 포함해 방대한 디스코그라피가 잘 정리되어 있다. http://membres.lycos.fr/alec/index.html Breeders 공식 사이트 http://www.noaloha.com/breeders Elektra 레이블의 Breeders 페이지 http://www.elektra.com/elektra/thebreeders/index.jhtml 4AD 레이블의 Breeders 페이지 http://www.4ad.com/artists/breed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