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애의 묻혀버린 레코딩 데뷔

이 음반이 지금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면 ‘한영애의 첫 레코딩’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불행히도 본인은 이 음반을 녹음할 때의 최소한의 기억조차 가지고 있지 않고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기원을 따지는 재미’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천하의 한영애의 범상한 과거’에 대해 통속적인 악취미를 발휘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도 이 음반의 주인공은 한영애 혼자가 아니며 백호빈과 오종국이라는 다른 두 가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옴니버스 앨범’인데 당시에는 이런 유형의 음반이 비일비재했으므로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한영애는 두 곡만을 불렀을 뿐이므로(나머지 두 곡에 대해서는 ‘추기’를 참고하라) 음반을 대표하는 가수인 것도 아니다.

백호빈도, 오종국도 이후 성공적 경력을 구가한 것이 아니므로 이 음반에 대한 미스테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단지 앨범 수록곡의 대부분을 작곡한 인물이 오준영이라는 사실에서 몇 가지 시사를 얻을 뿐이다. 임성훈이 부른 “시골길”(1975.12)과 세부엉이 부른 “호수에 잠긴 달”(1977.5)라는 히트곡을 작곡한 인물이자 뒤에는 자작곡을 직접 부른 인물이 ‘작편곡’을 담당한 음반이라는 뜻이다.

오준영은 이른바 ‘통기타 포크 세대’에 포함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1976년의 시점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가요’의 하나로 변형되던 시점이다. 이런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곡들은 작곡과 가창은 통기타로 작곡했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편곡과 연주는 ‘통기타 중심의 반주’를 벗어나는 특징을 보이면서 뚜렷한 양식은 확립되지 못한 시기다. 그래서 동일한 인물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앨범의 수록곡들도 고른 스타일와 품질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백호빈이 부른 곡들은 소울/훵크인 “우리 두 사람”으로부터 명랑한 포크송 “나 어제 그녀 만나서”와 재래가요 스타일의 “그애를”(이용복의 곡이다)을 망라한다. 백호빈이 1975년 지구 레코드에서 임석호의 곡으로 취입한 사실을 안다면 오준영의 작곡이 스탠더드한 취향의 가수와 궁합이 잘 맞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날”의 경우 가창은 ‘1960년대 가요’풍인데, 연주는 ‘이지 리스닝 그룹 사운드’풍이다. “우리 두 사람”에서 깔짝거리는 훵키한 리듬의 기타를 누가 연주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다.

오종국의 4곡의 노래에서는 궁합이 잘 맞아간다. “지난 날”은 캠퍼스 그룹 사운드(특히 휘버스(Fevers))를 예시하는 곡이자, ‘오리엔트 사운드’의 영향을 검출할 수 있는 곡이다. 전자 올갠의 드론과 플루트의 산개 속에서 퍼즈와 와와를 이용한 기타 사운드는 하나의 양식의 역사를 고려할 때 중요한 텍스트이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당시에는 참 좋았던 곡’이다(사족이지만 이런 양식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은 이수만(!)이다). 아마도 오준영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하게 하는 곡이다. 불행히도 이런 실험은 이 한 곡으로 그친다. 나머지 세 곡들은 포크에 기반한 정감있는 곡들인데, 평자에 따라서 ‘1970년대 초중반 전성기 때의 포크가 퇴화했다’고 말하거나 혹은 ‘포크에 의식이 들어가기 전의 순수했던 시대를 재현한다’고 말할 곡들이다. 전자가 다소 우세할 전망이다.

문제의 두 곡, 즉 한영애가 부른 두 곡들도 오종국이 부른 곡과 다르지 않아서 동일한 평가의 대상이 된다. “사랑의 편지”나 “꽃피는 봄”이라는 제목을 보면 가사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실제도 예상과 다르지 않다. 곡의 분위기도 사근사근하고 어여쁘고 한영애의 노래도 마찬가지라서 따라서 의미심장한 구석은 없다. 플루트와 올갠 사이로 한영애는 사뿐사뿐 노래한다. 지금의 그녀를 떠올린다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혹시 한영애가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이렇다 할 음악적 경력을 밟지 않은 이유가 이렇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과 관련이 있을까. 하지만 저 시기 한국의 대중음악계가 극도의 혼돈에 처한 시기(요즘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였다면 한영애가 혼돈의 시절을 보냈다는 점에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런저런 억압을 받아가면서도 완전히 사그러들지 않고 명맥을 이어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면 말이다. 이 음반은 ‘1976년’이라는 시점에서 한국 포크(혹은 ‘언더그라운드’)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자랑할 필요도 없지만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는… 20030801 | 신현준 homey@orgio.net

0/10

추기:

1.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의 시의성을 따진다면 25년만에 음반을 발표한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의 두 트랙이 마지막 두 트랙에 수록된 점도 주목된다. 수록곡은 “세노야”와 “비둘기 집”이라는 1970년대 초 한국 포크의 고전이다. ‘혐오감을 준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이용복이 지상파 방송에서 사라져 가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2. 한영애가 부른 “사랑의 편지”는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정윤희를 앞세운 [왜 내가 슬퍼지나요/목마른 소녀](힛트, 1977)에도 재수록되어 있다. 이 앨범 역시 옴니버스 앨범이다.

수록곡
1. 우리 두 사람 – 백호빈
2. 나 어제 그녀 만나서 – 백호빈
3. 그 애를 – 백호빈
4. 그 날 – 백호빈
5. 지난 날 – 오종국
6. 하얀꽃 – 오종국
7. 시골풍경 – 오종국
8. 아름다운 마음 – 오종국
9. 사랑의 편지 – 한영애
10. 꽃피는 봄 – 한영애
11. 세노야 – 이용복
12. 비둘기 집 – 이용복

관련 글
한영애 vs 장필순: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여성적 측면(Female Sides of Korean Underground Music) – vol.5/no.14 [20030716]
한영애와의 인터뷰 – vol.5/no.14 [20030716]
장필순과의 인터뷰 – vol.5/no.14 [20030716]
해바라기 1집 [해바라기 노래모음 제1집] 리뷰 – vol.5/no.14 [20030716]
한영애 비공식 1집 [어젯밤 꿈/사랑의 바람(이정선 작편곡집)] 리뷰 – vol.5/no.14 [20030716]
한영애 비공식 2집 [작은 동산] 리뷰 – vol.5/no.14 [20030716]
해바라기 2집 [뭉게구름/여름] 리뷰 – vol.5/no.14 [20030716]
한영애 1집 [여울목] 리뷰 – vol.5/no.14 [20030716]
한영애 2집 [바라본다] 리뷰 – vol.5/no.14 [20030716]
한영애 3집 [한영애 1992(말도 안돼)] 리뷰 – vol.5/no.14 [20030716]
한영애 4집 [불어오라 바람아] 리뷰 – vol.5/no.14 [20030716]
한영애 5집 [난다 난다 난다] 리뷰 – vol.1/no.2 [19990901]
한영애 6집 [Behind Time: A Memory Left at an Alley] 리뷰 – vol.5/no.14 [20030716]

관련 사이트
한영애 팬 사이트: 코뿔소
http://www.hanyoungae.net